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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오일여행자 Dec 17. 2017

여행이 한 편의 영화라면

도입부는 언제나 흑백의 파리에서 시작된다

날씨의 법칙   


여행을 하면서는 누구나 맑은 날씨와 파란 하늘을 기대한다. 날이 흐리거나 비라도 오면 괜히 여행을 망치는 기분이 든다. 매일 술래가 된 기분으로 파란 하늘과 숨바꼭질을 하는 셈이다. 실내 박물관에 가거나 숙소에서 쉬는 날이면, 꼭! 해가 반짝 떠 날이 기가 막히게 좋은 거다. 참 얄궂은 여행의 법칙이다. 그럴 때면 잔뜩 샘이나 토라진 중학생의 얼굴 하곤 일부러 하늘을 등지고 앉는다.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슬며시 뒤통수를 쓸면 따뜻함에 배꼽이 간질거려 냉큼 창을 마주 보고 앉는다.

@France Paris, weekdaytraveler

_ 이것도 참 행운 아닌가? 파란 하늘을 아늑한 집 안에서 온전히 즐길 수 있다니. 저기 파도처럼 커튼을 밀고 들어오는 햇살을 봐.

_ 맞아. 자고로 도시가 이리 컬러풀한 날에는 집에 있어야지, 적어도 파리에선.


곰곰이 생각해야만 의미가 되는 것들이 있다. 날씨가 흐린 날 산책을 한다는 것, 파란 하늘이 기가 막힌 날 집 안에 머문다는 것, 모두 괘씸한 벌칙 같지만 사실은 의미 있는 변주다. 흐린 날 걸어야만 볼 수 있는 센느 강변의 물안개와 비가 내리는 날에만 들리는 어느 철학자의 독백을 생각하면 언제나 여행의 함정 같던 날씨의 법칙이 꽤 괜찮은 일상의 변주가 된다. 파리는 언제나 흑백의 스크린에서 시작하는 한 편의 영화 같은 도시기에 더욱 그렇다.


흑백영화 속 파리


코펜하겐에서 돌아온 이후 파리의 날씨는 더없이 흐렸다. 하지만 잔뜩 찌푸린 날씨의 파리가 싫지 않았다. 아마도 사진을 좋아하는 그 애와 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파리를 보며 최초로 떠올리는 장면이 흑백의 미장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애는 아찔한 에펠탑 위에 춤을 추듯 서 있는 페인트공을 찍은 마크리부의 사진을, 나는 트뤼포의 영화 <쥴 앤 짐>에서 세 주인공이 철교 위를 달려 나가는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니까. 그러니 우리에게 파리가 한 장의 흑백사진 혹은 한 장면의 흑백영화일 수밖에.  

@France Paris, weekdaytraveler

우리는 비라도 올 듯 잔뜩 날이 흐리면 흑백영화 같은 파리의 거리를 신나게 걸어 다녔다. 파란 하늘이 얼굴을 비출 때는 조용히 카페에 숨어들 거나 조용히 집에서 쉬기도 했다. 페인트 공이 서 있던 에펠탑과 카트린이 몸을 던졌던 한밤의 센느강을 걷고 여전히 파리를 오가는 영화 '라붐'의 84번 버스를 탔다. 그리고 '비포센셋'의 제시와 셀린느라 재회한 서점을 헤밍웨이처럼 드나들며 '아멜리에'가 물수제비를 뜨던 운하에 앉아 서로 장난을 걸기도 했다. 파리에서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거리들은 반드시 어느 영화 속의 무대다. 그래서 파리를 걷다 보면 도시 자체가 너무나 완벽한 미장센이자, 아주 거대한 영화관처럼 느껴진다. 

@France Paris, weekdaytraveler

시작은 오데옹 거리  


특히 파리지앵들이 가장 파리다운 동네로 꼽는다는 오데옹 거리는 온갖 헌책방과 예술극장으로 붐빈다. 오데옹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작은 골목마다 1900년대의 흑백영화를 상영하는 예술 영화관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어느 골목의 작은 영화관에서는 68년도의 영화를 최신작인 듯 홍보하고 씨네필들을 유혹하는 자료들이 쌓인 서점과 영화 도서관이 넘쳐난다. 모든 영화인들의 영원한 뮤즈가 파리라는 사실이 오데옹 거리에서 문득 실감 난다. 


그래서 우리의 파리 여행은 늘 오데옹 거리에서 시작되었다. 작은 영화관들을 돌아다니며 예술 영화 한 편을 보거나 낡은 서점에 들러 읽을 수 없는 책들을 펼쳐본다. 짧은 흑백 영화 한 편을 보고 헤밍웨이가 서재처럼 들르던 오데옹 12번가를 지나면 비로소 기나긴 파리의 산책이 시작되는 것이다.

@France Paris, weekdaytraveler

오데옹에서 기지개를 켠 여행은 뤽상부르 공원으로 이어진다. 어쩐지 날이 좀 맑아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으로 향한 공원에서 우리는 파리지앵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햇볕을 쬐어본다.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곰처럼, 비 오는 저녁 난로 앞에 모여 앉은 아이들처럼, 고개를 들고 햇살에 흔들리는 해바라기처럼 느릿하게 그러나 정성스럽게 해를 쬔다. 


그러다 다시 날이 흐려지면 몽파르나스 묘지로 간다. 붉은 입술이 훈장처럼 찍힌 사르트르의 묘 앞에서 자유롭도록 선고받은 삶을 어찌해야 할지 잠시 고민한다. 아주 잠시만. 그리고 고요하고 음울한 묘지 안을 살금살금 걸으며 한껏 평화로워진 마음을 업고 산책의 종착지, 에펠을 향해 걷는다.

@France Paris, weekdaytraveler

마지막은 에펠탑


오데옹에서 시작된 파리 여행의 마지막은 언제나 에펠이다. 하늘을 뒤덮는 검은 구름과 잔뜩 찌푸린 회색빛 콘크리트 블록이 에펠을 사이에 두고 조우한다. 무채색의 에펠이 언뜻 스쳐가는 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누구나의 로망이자 누구나의 연인인 에펠이 흑백 프레임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는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검게 저무는 파리의 하늘을 한 편의 영화처럼 감상했다. 날이 전부 어두워지자 푸르스름한 밤하늘 사이로 에펠의 조명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앉아있던 자리 바로 앞에는 반짝이는 에펠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시던 커플이 있었다. 에펠과 함께 사진 속에 담긴 그들의 뒷모습이 어느 프랑스 영화의 주인공처럼 촘촘한 서사를 담고 있는 듯 보였다.

@France Paris, weekdaytraveler

_ 아름다운 장면이야. 이 두 사람은 분명, 어제 오데옹 거리에서 만났을 거야. 아무도 보지 않는 예술 영화를 보려고 갔는데 영화관에 딱 둘 뿐이었던 거지. 영화가 끝나고 나서 이 둘은 여기까지 한 시간을 같이 걸어왔을 거야. 이제 운명에 순응하고 사랑을 고백할 순간이지.

_ 순진하긴. 저것 봐. 와인을 두 병째 마시고 있잖아. 게다가 별로 웃지도 않아. 방금 실직한 두 명의 장그래이거나 이별여행을 온 이탈리아 사람일 거야.

@France Paris, weekdaytraveler

대부분 경우 낭만이 없는 그 애의 말을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 뒤로 우리는 멋대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영화로 쓰며 같은 듯 다른 두 사람의 뒷모습을 셀 수 없이 많이 그리고 아주 오래도록 카메라에 담았다. 희극이든, 비극이든 모두 아름다운 법이니까. 


에펠을 떠나기 전 우리는 용기를 내어 우리가 찍은 사진을 그들에게 전해주기로 했다. 우리가 찍은 그들의 뒷모습과 사진에 담은 아름다운 희비극의 서사를 잔뜩 담아서. 우리의 시나리오와 달리 두 사람은 캐나다에서 여행 온 커플이었다. 사진을 건네며 우리는 파리 여행에 대해, 이 순간의 풍경에 대해, 자신들이 주인공인 아름다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France Paris, weekdaytraveler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가 주인공인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우리는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짐 없이 떠난 이 여행은 영화의 도입부일까? 결말일까? 그는 나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왕이면 이 여행이 우리 영화의 도입부라면 좋겠다고, 아직 우리에게 할 이야기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깨지고 부서지고 엉망으로 무너지는 결말이 온대도 이 여행만큼은 신나게 달려 나가는 오프닝 시퀀스였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 시작이 여기, 파리여도 나쁘지 않겠다고.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진짜 이 모든 여행이 프랑스 영화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여행은 프랑스 영화로부터


쥴과 짐, 그리고 토마라는 청년으로 변장한 카트린은 꿈속인지 빗속인지 모를 철교 위에서 달리기 경주를 한다. 어색하게 그린 콧수염에, 커다란 모자까지 푹 눌러쓴 카트린이 먼저 뛰어 나간다. 세 사람은 새카만 철교 위를 숨차게 달리며 크고 희게 웃는다. 그리고 어둠 속의 배꽃처럼 서 있는 카트린의 표정이 정지화면으로 휙휙 지나가자 짐이 이야기한다.


_ '그럼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하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더군. '호기심 많은 사람. 직업은 아니지, 아직은 말일세. 여행하고 글 쓰고 번역하게. 도처에서 사는 걸 배우게. 미래는 호기심을 직업으로 가진 자의 것이네.'

@France Paris, weekdaytraveler

영화 <쥴 앤 짐>의 흔들리는 흑백 화면 속 세 사람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파리'라는 이름의 사진으로 남았다. 프랑스 와인의 종류를 줄줄 외다가 갑자기 집 밖으로 뛰쳐나가는 카트린의 모습을 생각하며 어떤 날은 문득 교문 밖으로 탈주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구 빗속을 달리며 아무나 들이받고 싶은 마음을 삼켰다. 그러다 빗속에서 결국에 나는 여행하고 글을 쓰게 될 것이라고 감히 느꼈다. 짐의 말을 주문처럼 외던 그때의 나는, 착각이 일상이고 운명이 버릇이던 열일곱이었으니까.

@France Paris, weekdaytraveler

서른 하나가 되어 음울한 날씨의 파리를 걷고 있는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내가 이렇게 오래도록 '여행하고 글을 쓰며 도처에서 사는 걸 배우는' 게 모두 한 편의 영화 덕분이었나 싶다. 정말 이 여행이 한 편의 영화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우리 여행을 영화로 만든다면 그 시작이 파리여도 괜찮겠다는 그 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은 오데옹 거리로 돌아가 밤새 영화를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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