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 신고 바다로 간다
떠날 준비, 여전히 1분
도착한 발리의 덴파사르 공항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자주 보이는 한국 관광객들이 반갑고 의아할 정도로 많은 호주 관광객들은 낯설었다. 둥그런 발음의 문장, 여행자들과 뒤엉켜 흥정 중인 택시 기사님, 새벽임에도 축축하게 덥혀진 공기 냄새를 맡으니 우리가 도착한 곳이 전혀 새로운 대륙임이 실감 났다. 땀으로 질척해진 운동화를 고쳐신었다. 두툼한 바지와 긴 팔 셔츠는 조금 접어 올리고 연신 땀을 흘리며 가까운 숙소를 향해 걸었다. 덥다. 정말 오랜만의 무더위였다.
지난 밤 이를 닦고 마지막 칫솔을 포함한 몇 안 되는 짐을 가방에 넣고 보니 새삼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세 달 동안 이 작은 가방에 든 짐으로 여행을 해왔는데 이 새벽 문득 새로운 긴장감에 사로 잡혔다. 유럽을 떠나 아시아 대륙으로 이동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집 앞 슈퍼에 잠깐 나가려던 늦은 밤의 외출, 친구들과 밤새 놀다 찜질방에서 자기로 한 급작스런 외박처럼 무방비인 채로, 우리는 다른 대륙으로의 여행을 감행하고 있었다. 한밤에 가로지르는 비밀스런 달리기, 사랑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아찔한 도주처럼 가슴이 종잡을 수 없이 쿵쾅거렸다.
'주머니가 더 많은 바지를 입었어야 했나? 아무래도 복대는 있었어야 했지? 기나긴 비행시간을 목베개 없이 가다가 정말 목이 부러지는 일은 없겠지? 머리를 빗지 않고 100일이 넘으면 진짜 헤그리드로 변하지 않을까? 정말 매일매일 빨래할 수 있을까?'
처음 배낭을 없애고 이스라엘로 떠나던 그 날 머릿속을 맴돌던 고민들이 다시 나를 흔들었다. 그래도 우리는 손을 꽉 잡고 괜찮을 거라며 서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100일, 자주 빗지 못한 머리가 빗자루처럼 빳빳해졌지만, 가끔 불편하긴 해도 언제나 무리 없이 평온하게 지내온 가벼운 여행이었으니까.
운동화 신고 바다로
밤새 끈적한 더위와 뒤엉킨 시차에 괴로워하다 일찌감치 눈을 떴다.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는 새벽에도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솜 인형처럼 피로에 축 늘어져 미리 예약해둔 보트 회사의 픽업 차량을 기다렸다. 작은 승합차를 타고 우리는 발리 중심지를 통과하여 한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길리 트랑완안까지 이동할 예정이었다.
분명 우리가 구매한 것은 스피드 보트 티켓인데, 길리 트라왕안까지 여러 섬을 거쳐 간단다. 발리 섬과 인접한 램봉안 섬과 롬복 본 섬의 승기기를 지나 길리 트라왕안까지 무려 3시간이 소요된다니. 주룩주룩 흐르는 땀을 닦으며 부디 악몽이기를 바랐다.
_ 말도 안 돼. 멀미약 없는데 어쩌지?
_ 그것보다 우리만 운동화 신고 있는 거 알아?
_ 스피드 하다며. 너, 완행열차 티켓을 산 것이냐? 나 3시간 동안 멀미하라고?
_ 일단 운동화는 벗자. 배에 타려면 바다에 발은 담가야 해, 저것 봐.
그 애가 가리킨 곳에는 생각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배가 있었다. 해변과 다소 떨어진 얕은 바다에서 승객들을 태우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운동화를 신고도 가뿐히 배에 오르는 상상은 유람선에나 해당되는 경우였다. 파도는 계속 들이치고 배는 파도만큼 커다란 몸짓으로 출렁이며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바닷물이 빠졌을 때 잘 올라타지 않으면 곧바로 큰 파도에 몸이 몽땅 젖을 지경이었다.
대부분 아주 가벼운 차림의, 더러는 수영복 차림의 여행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배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벼운 슬리퍼를 신고 배에 오르는 사람들 틈에 서서 우리는 물끄러미 서로의 신발을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나는 두툼한 운동화를, 그 애닌 낡은 워크를 신고 있었다.
우리의 작은 가방에 여분의 신발이 있을 리 만무했다. 운동화를 손에 든 우리의 모습이 옛 애인의 결혼식에 참석한 불청객 같기도, 다른 계절에 준비 없이 떨어진 시간여행자 같기도 했다. 난처하고 황당한 농담 같은 이 상황을 이젠 그저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뒤져도 우리에겐 슬리퍼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겨울 운동화 신고 여름 바다를 즐기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우리는 두툼한 양말과 운동화를 벗어 손에 들고 맨 발로 바다 앞에 섰다. 긴 바지는 몇 번 접어 무릎까지 올렸다. 그리고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바다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결국 배에 완전히 오르기도 전에 접어 올린 바지가 다 젖었고 손에 들고 있던 운동화도 파도에 흠뻑 적셔졌다. 주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축축한 차림으로 자리에 앉았다.
우리만 옷이 젖어도, 우리만 남들과 달라도 괜찮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만난 풍경을 마음껏 즐겼다. 뜨거운 태양과 새파란 발리의 바다, 손에 든 운동화와 이마를 타고 내리는 땀방울. 우리는 그렇게 운동화를 신고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여기, 이국의 섬끝까지 오고야 말았다.
나의 오랜 짝사랑
춤추듯 출렁이는 배에서 멀미로 온갖 고생을 다한 끝에 도착한 길리 트라왕안은 작고 귀여운 들꽃 같았다. 자동차가 없는 이 작은 섬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마차와 자전거가 흙길을 덜컹덜컹 내달리고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 앉는 것이 유일한 일과인 작은 지도였다.
우리는 매일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동이 터오는 바다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요가를 하는 사람들과 함께 아침을 맞는다. 작은 섬 한바퀴를 자전거로 돌다 더우면 카페에 들러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며 낮잠을 자고 바다에 몸을 담그며 노닥거리는 게 일상이다.
그래서 이 작은 섬에는 하루 온종일을 바다에서 보내는 사람들이 참 많다. 저렴한 가격으로 스노클링을 즐기고 맑고 깨끗한 바다를 열심히 누비는 스킨스쿠버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도 큰 마음먹고 스노클링에 도전했다. 그러고 보니 생애 첫 스노클링이었다. 여태 뭐하고 사느라 그랬나 싶다.
내게 바다는 언제나 친해지고 싶은 멋진 친구였다. 서울에서 전학 온 세련된 이름의 친구나 검게 그을린 피부로 '알로하'라는 손인사를 건네는 어느 여행자처럼, 언제나 먼저 말 걸어 친해지고 싶은 존재가 내게는 '바다'였던 것 같다. 엄청난 짝사랑이지.
그동안은 거절당할까 두려워 차마 내 마음을 고백할 용기가 없었는데 왠지 이 섬에서만큼은 바다에게 말을 걸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발리는 신들의 섬이니까 바다와 나의 사랑을 응원해주는 신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먼저 이름을 묻지 못해 머뭇거렸던 도시 전학생과 뻔하지 않은 질문을 하려 고민만 하다 놓쳐버린 어느 여행자와의 어긋남을 생각하며 나는 단단히 물안경을 고쳐 썼다. 똑똑. 바다의 창문에 조심스레 노크를 하며.
_ 그래. 내 짝사랑에 더 이상 흑역사는 없다. 고백의 순간이다!
_ 너 대학 때, 엄청난 외사랑에, 입에 담기도 힘든 흑역사, 많지 않아?
_ 오늘 나 거절당하면 다 네 탓이야. 그리고 대학 때 얘긴 하지 말랬지 (흑역사가 매우 많다)
길리에서의 스노클링은 짧은 이동시간과 맑은 바다, 저렴한 가격 때문에 아주 인기가 많다. 수십 명이 함께 출발하는 스노클링 배가 하루에도 몇 대씩 길리 인근을 오간다. 그 가운데 떠 있는 우리 배의 이름은 럭키. 부디 우리에게도 행운을 가져다주길 바랐는데 역시 여행은 뜻대로 되는 법이 없다.
첫 번째 스노클링 포인트까지 이동하는 30분, 배는 망망대해로 나아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짙푸른 바다로 나아갈수록 공중 그네에 탄 것처럼 두려워졌다. 뱃속에서 스멀스멀 뱀처럼 구불거리는 멀미의 기운까지 느껴지자 나는 몹시 불안해졌다.
불편한 속을 진정시키며 첫 번째 스노클링 포인트에 도착했다. 옆사람처럼 멋지게 포물선을 그리며 풍덩- 뛰어들지 못하고 사다리로 살금살금 내려가 몸을 담갔다. 바다에 들어가는 건지, 냉탕에 들어가는 건지 모르게 몸을 담근 바다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그리고 바다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면 칠수록, 커다란 파도에 몸이 일렁일수록 내 속도 함께 울렁였다. 이를 악물고 억지로 바다에 둥둥 떠 있기를 십여분, 파도를 넘나들수록 울렁거리던 속은 더 매스꺼워졌다. 30분을 간신히 채우고 배에 올라탄 우리는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것 같은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결국 우리는 다음 스노클링 포인트를 포기한 채 배에 드러누워 멀미를 삼키기 바빴다.
_ 이대로 바다에 구토를 하게 되면 여기 모인 이십 개국, 백명의 여행자들에게 아주 신선한 추억이 되겠지?
_ 야. ‘토’ 요일에 '토'도 이야기하지 마, 울렁거려. 저기, 멀리, 수평선을 봐. 그게 도움이 된대. 저, 멀리를. 웁-
우리는 바다 위를 여유롭게 흘러 다니는 여행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덤 앤 더머처럼 시답지 않은 농담과 만담을 시전하며 멀미를 견디기 위해 애썼다. 모두 물고기처럼 촉촉이 바다를 누빌 때 우리만 실연당한 표정으로 바다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결국 정박한 섬에서 점심은 입에도 대지 못하고 멀미약을 얻어먹었다. 그래. 결국 거절당했다. 나의 오랜 짝사랑.
‘바다’라는 여행 과목
세계여행이라고 불리는 장기 여행에서, 여행자들에게 바다는 반드시 진입해야 하는 길로 여겨지곤 한다. 그 길을 거치지 않고 목적지에 닿을 수 없다고 말하는 딱딱한 내비게이션처럼 이 과목을 이수하지 않고는 졸업할 수 없는 필수 수강과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길 위에서 만나는 수많은 여행자들 역시 우리에게 반드시 바닷속 세상을 여행해보라 권했다. 사실 이 지구의 진짜 표정은 모두 바닷속에 있다면서.
우리도 여행을 시작하기 전엔 발리든, 세부든, 다합이든 어느 작은 바닷가 마을에 몇 달씩 썩으며 바다를 마음껏 즐기리라 상상했다. 하지만 우리는 늘 멀미로 고통받다 배에서 뱉어졌고 빈 병처럼 간신히 물 위를 떠다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왠지 바다라는 시험 과목에서 F를 받은 것만 같고, 그렇게 자신 있다던 여행마저 멋지게 해내지 못한 것 같아 '역시 이번 생은 망한 건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직도 버스를 탈 때마다 멀미약을 챙겨 드시는 엄마의 멀미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나의 지독한 뱃멀미, 오랜 시간 햇볕을 받으면 끓는 주전자처럼 맥을 못 추는 햇볕 알레르기, 아무리 마음먹어도 떨쳐 치지 않는 심연에의 공포까지. 우린 여러모로 깊은 바닷속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것을. 아닌 척 멋지게 다이빙하고 싶지만 냉탕에 들어가는 사람처럼 주춤거리고 마는 것을. 하지만 이젠 스런 못난 자신의 모습도 인정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못나고 후진 나의 조각도, 결국엔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퍼즐이니까.
지금 여기서, 춤을 추자
가끔 여행은 거대한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던 맨 얼굴을 보여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해보지 않으면 그것이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인지, 그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 평생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바다라는 시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바다라는 시험지를 통해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확인한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는 남은 일정에서 스노클링과 스킨스쿠버, 서핑 등 각종 수상 레저들을 과감히 삭제했다.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몇 달 전 불필요한 짐을 버릴 때 다짐했기 때문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탐하느라 소중한 지금을 낭비를 하지 않기로, 온 인생을 남들이 가진 것을 갖기 위해 허비하지 않기로,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기로 말이다.
생각해보면 짐이 없어진 이후로 우리는 보다 더 자신에게, 보다 더 현재에 집중하게 된 것 같다. 가지지 않기로 선택한 것에 대해 타인과 경쟁하지 않고 소유한 물건의 목록과 촌스러운 운동화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려 하지 않으며 미래의 불행 보다 오늘의 여행에 집중하여 매 순간을 음미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여행도, 우리의 인생도 찰나 같은 한 순간이 쌓여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각자의 방식으로 바다를 다시 만나자 서로에게 약속했다. 우리가 우리만의 방식으로 가볍게 여행하듯 우리만의 해석으로 바다를 읽어가자고 같이 다짐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린 어김없이 자전거를 끌고 바닷가로 나간다. 스노클링과 서핑 보드를 든 멋진 친구들이 먼 바다로 나아간다. 우리는 그들이 보이는 나무 아래 앉아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다. 샤워를 하며 흥얼거리듯 노래를 부르고 몸짓에 가까운 춤을 추기도 한다.
저무는 햇살이 따뜻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지금 이 순간, 물에 젖은 운동화를 툭툭 털어 해에 말리고 다 식은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이 순간의 즐거움에만 집중한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노래하자. 이것이 여행을 향한, 인생을 향한, 바다를 향한 나의 새로운 사랑의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