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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오일여행자 Dec 10. 2017

촛불을 켜는 일부터

어떤 환상이라도 부디 저지를 수 있기를

사랑의 이름


_ 코펜하겐 북쪽에 미술관 하나가 있어. 이름은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 바다가 보이는 멋진 풍경 속의 미술관인데,

_ 미국에 있는 게 아니고?

_ 미국 아니고, 덴마크. 처음 그곳에 집을 지은 사람이 세 여자를 사랑했는데, 그들 이름이 모두 ‘루이스’였대. 그래서 그 집의 이름을 루이지애나라고 붙였단 말이지. 으- 낭만적이야. 그거야말로 사랑의 이름이지. 이런 이야기가 얽힌 미술관에 가지 않을 수 있겠어?

@Denmark Copenhagen, weekdaytraveler

_ 그 ‘루이스’들은 알고 있었을까? 과거 속의 다른 '루이스들'에 대해서 말이야.

_ 글쎄? 아마 알았어도 상관없지 않았을까? 내 첫사랑의 이름이 너의 이름과 같았을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상관 없잖아?

_ 같은 이름의 사람을 사랑하는 게 정말 낭만이라고 생각해? 벌 받는 거야.


우리는 자주 여행과 사랑 그리고 예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 기쁨이기도, 때로 절망이기도 한다. 사랑이란 게 그런 거니까. 그리고 루이지애나 미술관은 여행과 사랑과 예술 그리고 가끔의 기쁨과 때때로의 절망이 만나는 교차로다. 건널목마다 사랑과 예술이 쏟아지는 교차로에 놓인 작은 신호등이다. 루이지애나 미술관은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에게 사랑의 대명사로 자리했다. 유럽을 떠돌며 코펜하겐을 꿈꾸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나간 모든 사랑의 이름이 하나인 일이 과연 낭만인지 형벌인지 답을 찾지는 못했다. 사랑이란 게 그런 거니까. 

@Denmark Copenhagen, weekdaytraveler

코펜하겐에서 기차로 40여분이면 도착하는 작은 마을, 훔레벡에 루이지애나 미술관이 있다. 작은 기차역에 내리면 들리는 소리라곤 새울음뿐인 시골 마을이다. 조용한 마을을 가로질러 십여분 걸으면 초록빛 담쟁이덩굴이 무성한 2층 집이 나온다. ‘루이지애나 현대 미술관’이라고 쓰인 간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칠 법한 평범한 외형의 집이었다. 그 평범한이 이 미술관을 빛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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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으로 들어서자 작은 서재와 같은 공간에, 별채로 이어지는 좁은 복도에 집과 하나 된 듯 자연스럽게 걸린 미술 작품들이 있었다. 커다란 창 너머로는 푸릇한 정원의 풍경과 칼더의 작품이 하나의 액자처럼 보였다. 미술관은 그 자체로 주택이자, 작품이자, 정원이었다. 미술과 건축, 자연의 조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미술관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공간이었다. 사랑의 이름들이 명찰처럼 붙여진 미술관을 빠져나와 바다를 마주하는 언덕에 올랐다. 파도가 철썩 이는 언덕에 앉아 우리는 코펜하겐이야말로 이야기가 넘치는 도시라 생각했다. 사랑 이야기가 얽힌 이 아름다운 루이지애나 미술관처럼 온 도시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로 가득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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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와 스키장


코펜하겐을 상징하는 이야기 중 가장 오래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는 역시 안데르센의 인어공주가 아닐까? 내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는 언제나 인어에 관한 것이었다. 신비로운 물속 세상을 헤엄치는 인어의 비늘과 결국에는 물거품이 되고야 마는 그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 어릴 적 내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던 그 인어의 고향이 발트해와 북해가 만나는 차가운 바닷가 도시, 코펜하겐이다. 환상적인 인어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이곳이 코펜하겐이라는 사실이 작은 인어 동상을 보자 꽤 실감이 났다. 찬바람을 뚫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호스트인 조나단에게 물었다.

@Denmark Copenhagen, weekdaytraveler

_ 코펜하겐에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아. 어릴 때부터 인어 이야기를 참 좋아했었거든.

_ 맞아. 아주 오래전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흘러 다녔던 도시지. 햄릿의 무대가 되었던 성도 이곳이 있거든. 뭐, 꼭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야. 도시 곳곳에 숨겨진 최신 이야깃거리들도 많지. 오래된 크레인을 이용해 번지점프대를 만든 이야기는 들어봤어? 아, 곧 오픈 예정인 스키장 이야기에 대해선?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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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 도심에 스키장을 만들고 있다니! 조나단이 들려준 스키장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었다. 완공을 앞둔 발전소 지붕의 경사면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심한 끝에 많은 사람들이 원했던 스키장을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쓰레기를 태워 전기와 난방용 열을 만드는 열병합발전소에 스키장이라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면 1500m 길이의 슬로프가 펼쳐지는 기발한 스키장이다. 그뿐 만이 아니다. 오래된 운하 한가운데에 있는 크레인을 철거하는 대신 번지점프대로 활용하고 집보다 정원이 더 큰 집을 짓거나 세모난 모양의 베란다가 달린 독특한 아파트를 세운 주민들도 있다. 버려진 컨테이너 박스들을 모아 새로운 집으로 변화시키는 청년들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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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가 필요 없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수 백개의 섬들을 이어주는 자전거 하이웨이도 있는데 앞으로 코펜하겐의 교외 지역까지 연결이 확대되어 3000km에 달하는 거리가 연결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곳에선 도대체 안 되는 일이 없다. 무엇이든 안 되는 이유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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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이 인어를 꿈꾸던 뉘하운의 좁은 집과 햄릿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오래된 성은 코펜하겐 사람들에게 언제나 영감을 주는 이야기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들을 품은 이 도시는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건 아마 이야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순서가 불가능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실패를 허락하는 상상력이야말로 이야기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재료니까. 코펜하겐은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이 가능하다고 응원해주는 도시였다.


저녁 있는 삶


여행 전에 살던 도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상상은 무엇이었을까? 칼퇴근해서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볼 수 있었으면, 올여름에는 눈치 안 보고 휴가를 낼 수 있었으면, 점심은 내가 원하는 시간에 좀 먹을 수 있었으면, 그나마 직장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가 교통비나 조금 아꼈으면, 주말에 자주 갈 수 있는 공원이 있었으면, 자전거 탈 때 차들이 조금 덜 빵빵거렸으면, 그런 상상들이 내게는 인어공주만큼이나 허황되고 환상적인 상상 속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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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인어공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물을 맞대고 사는 사람들이 꿈꿀 수 있는 바다 세상에 대한 상상이니까. 덴마크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만들며 늘 새로운 무엇을 꿈꿔왔는지 모른다. 저녁 있는 일상을 환상으로 두는 우리의 이야기와는 많이 다르다. 이들의 꾸는 꿈은 그래서 더욱 동화 같다. 인어공주의 이야기처럼 환상적이고 도심 속 스키장처럼 즐겁고 모든 사람이 행복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우리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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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켜는 일부터


에어비앤비로 머문 코펜하겐의 집은 방이 여러 개에, 거실도 큼직하다. 4명의 덴마크 젊은이들이 함께 살고 있는 만큼 여유공간이 충분히 넓다. 미술을 전공한 집주인 덕에 넓은 거실은 온통 감상하기 좋은 미술 작품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이 집에 사는 친구들은 커다란 거실을 놔두고 맨날 좁아터진 부엌 탁자에 모여서 초를 켜놓고 있는다. 거기서 책을 읽기도 하고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학교 과제를 하고 룸메이트들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기도 한다. 각자 식사를 마친 늦은 저녁, 우리는 어김없이 주방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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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그런데 왜 늘 주방에 있는 거야? 거실이 더 넓잖아.

_ 그러게? 왜 그렇지, 우린? 하하. 친구들이 더 많이 오면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눌 거야. 그런데 우리끼리 있을 땐 더 아늑한 이곳이 더 좋아. 넓다고 꼭 좋은 건 아니잖아.

_ 그래, 넓은 게 좋은 건 아닌데 말이야. 그거 알아? 우린 여행을 떠나기 전에 넓은 게 가장 좋은 건 줄 알고 살았어. 넓은 거실을 위해서 저녁도 없이, 주말도 없이 야근하며 살았지. 그런데 어느 날 생각해보니, 너무 바빠서 정작 그 넓은 거실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는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면 믿어져? 제시간에 퇴근하는 게 인어공주처럼 환상적이라는 게 믿어져? 그리곤 끊임없이 행복하지 못해 괴로워해,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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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뭐, 덴마크 사람이라고 모두 행복할까? 그건 잘 모르겠어. 사실 오늘같이 추운 날 자전거를 타고 나갈 생각 하면 어찌나 우울한지, 하하. 북유럽 겨울의 필수품이 항우울제라는 말이 과연 농담일까 싶지. 행복를 찾아 떠나야 할까? 떠나서 얻을 수 있는 거라면 나도 당장 짐을 싸고 싶지. 그렇지만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행복이나 유토피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나마 우리는 하루를 어떻게 잘 보낼지 자주 생각해. 지금 이 순간, 일상 속에서 날 편안하게 만들려 노력할 뿐이지. 그냥 저녁에 불을 끄고 텔레비전도 끄고 촛불을 켜봐. 초를 켜고 친구들과 이렇게 하루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난 가장 편안해.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행복하다고 느낄지도, 인어공주보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뭐.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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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타닥- 초가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우리의 이야기도 깊어졌다. 길고 긴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우리는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일단 매일 촛불을 밝혀보기로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일상을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매일 저녁, 촛불을 켜는 작은 일과에서 시작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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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풍의 맥주 거품, 세모난 베란다, 초로 만든 난로, 사랑의 이름 같은 이야기들이 모여 각자의 삶을 응원하는 도시, 코펜하겐. 우리가 살고자 하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인어의 이야기와 저녁 있는 일상을 가슴에 품으며 우리가 어떤 환상이라도 부디 저지를 수 있게 되길 바랐다. 안데르센이 ‘여행은 정신을 다시 젊어지게 하는 샘’이라고 했던가? 문장을 고치자. 코펜하겐은 정신을 젊어지게 하는 샘이라고, 코펜하겐은 다른 삶을 이야기 하는 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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