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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오일여행자 Dec 03. 2017

다정한 무관심

파리의 단벌 여행자

달랑 옷 한 벌


스무 가지 정도의 물건이 들어있는 작은 가방을 아무리 뒤져도 마땅히 입을 만한 옷이 없다. 잠옷으로 입는 얇은 옷 한 벌과 외출복 한벌이 전부니 이건 고민해봐야 답은 하나인 객관식이다. 20kg의 짐을 2kg으로 줄일 때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던 주인공은 여러 벌의 옷이었다. 혹시 몰라 챙겨 온 여벌의 티셔츠들, 또 모르니 준비한 무거운 청바지, 그래도 몰라서 추가한 두툼한 등산화까지 제하니 가방은 금방 가벼워졌다. 그렇게 우리는 딱 한벌의 옷으로 두 달째 유럽을 여행 중이다. 늘 같은 옷을 입는 단벌 여행자로 지내는 데에는 꽤 큰 장점이 있다. 옷이 한벌이니 매일 아침 무얼 입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고 거울을 보며 불필요한 시간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니 바쁜 아침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Venice, Italy _weekdaytraveler

_ 뭘 그렇게 뒤져. 어차피 달랑 한 벌인데.

_ 오늘따라 거울 속 내 모습이 더없이 어둑어둑하군. 지금 혹시 밤이야? (시무룩)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갖가지 색의 옷을 입고 셀피에 열을 올리는 로마에서도, 개성 있는 젊은이들의 패션이 번뜩이는 로테르담에서도 검은색 옷 한 벌로 버텼는데 오늘 아침은 조금 달랐다. 별 것 없는 짐들을 뒤적이며 거울 속 내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건 아마도 오늘 우리가 파리로 떠나기 때문일 거다.


이건 벌칙인가요?  


_ 길고 복잡한 식사예절과 무덤을 거니는 우울한 철학자의 산책, 낭만의 출생지이자 예술가들의 수도 그리고 세련된 파리지앵의 외투 자락


파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다. 맨 마지막에 떠오른 단어를 중얼거리며 비행기 안의 사람들을 둘러본다. 파리행 비행기를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왠지 모두들 남다른 감각을 지닌 것만 같다. 짙은 초록색의 외투에 닿으며 아무렇게나 흐트러지는 얇은 머리칼, 사랑스럽게 비쥬를 나누는 두 여성의 복숭아 같은 뺨이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잘 손질된 낡은 구두와 자로 잰 듯 발목에 딱 떨어지는 파란 수트를 입은 사내는 좁은 복도를 런웨이처럼 걸어 다녔다. 


'이런 파리의 패셔니스타 사이를 하수구처럼 우중충한 차림으로 다닐 걸어 다녀야 하는 거야? 이건 대체 무슨 벌칙이지.' 인생 최악의 벌칙에 당첨된 기분이었다. 밟으면 터지는 지뢰를 본 것처럼 우리를 피해 다닐 사람들을 상상할 때쯤 비행기는 불안한 소음을 내며 오를리 공항에 착륙했다.

@Paris, France _weekdaytraveler

도착한 오를리 공항은 예상보다 작고 심플했다. 필요한 것들이 필요한 장소에, 군더더기 없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알기 쉬운 픽토그램과 깔끔한 안내 표시 덕분에 시내로 나가는 트램을 수월하게 찾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 쓰인 불어를 허술하게 읽어보니 마음 안에 묘한 흥분이 일었다. 누구나의 로망이자 모든 이의 낭만인 도시 파리에, 이름만으로도 무수한 예술가들을 설레게 하는 그 파리에 드디어 내가 왔다고 호들갑을 떨며 트램에 올랐다. 온갖 방정을 떨며 올라탄 트램 안은 요동치던 흥분이 싹 달아날만큼 조용했다. 싸늘한 파리의 공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모두 긴 머플러를 칭칭 두른 채 말이 없었다.

@Paris, France _weekdaytraveler

시내에 들어와서 갈아탄 지하철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 마디 조심스레 이야기를 나누는 건 우리 둘 뿐이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타인에게도 별 관심이 없었다. 겨울의 파리만큼이나 냉랭한 사람들의 무관심이 익숙지 않아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차림새를 신경 쓰던 어젯밤 내 모습이 머쓱해질 정도였다. 이거 진짜 벌칙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지하철이 파리 중심부에 도착했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


파리에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카페였다. 물가가 비싼 유럽에서 늘 장을 봐 밥을 지어먹고 1유로에 벌벌 떠느라 카페에 가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파리에서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17세기 처음 프랑스에 카페가 생긴 이후로 카페는 언제나 파리 문학과 지성의 상징이었으니까. 우리는 역에서 내려 카페를 향해 뛰듯이 걸었다. 사르트르는 카페 드 플로르로 가는 길이 자유에 이르는 길이라 썼다. 자유에 이르는 길이라니 주먹을 꽉 쥐고 뛰듯이 걸을 수밖에. 우리는 감옥을 부수고 나온 탈옥수처럼 생경한 자유를 느끼며 카페를 향해 뛰었다.

@Paris, France _weekdaytraveler

저 멀리 옅은 미색의 차양과 그 아래서 신문을 읽는 노신사가 보였다. 쌀쌀한 날씨에도 야외 테라스에는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로 붐볐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신문을 읽는 할아버지와 잘 차려입어 더 외로워 보이는 중년 여성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카페 드 플로르 안으로 들어서니 모딜리아니의 그림에서 본 듯한 붉은색 소파와 영화 <쥴 앤 짐>에서 쥴이 여인의 얼굴을 그리던 짙은 녹색의 둥근 탁자들이 '12개'도 넘게 놓여 있었다. 사르트르처럼 카페 구석에서 10시간씩 사색에 잠길 순 없었지만, 오랜 시를 품은 카페 안은 충분히 풍요롭고 적당히 쓸쓸한 냄새가 났다.

@Paris, France _weekdaytraveler

성큼성큼 다가와 카푸치노를 탁- 내려놓고 돌아서는 연미복의 종업원은 역시나 조금 시큰둥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기 할 일만 하는 종업원의 은빛 쟁반이 어찌나 무심한지 휙- 돌아서는 뒤통수에 작게 'Merci'라고 중얼거리다 민망해서 말끝을 흐렸다. 커피 한 잔을 시켜도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도시를 여행하는지 물어오던 이탈리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조금 춥고 외로운 기분은 날씨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카페를 나와 시내를 조금 돌아보고 집주인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집으로 향했다. 파리 외곽에 위치한 숙소는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뒤뜰에 몇 가지 채소를 심었고 각종 농기구와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창고도 한편에 마련되어 있었다. 마당을 정리하며 우리를 기다리던 앙리가 일어나, 반가운 얼굴로 악수를 건넸다.


_ 반가워, 앙리! 앙-리- 이 발음이 맞나? 하하.

_ 걱정마, 불어가 익숙할 리 없으니까. 춥지? 따뜻한 커피나 티를 한 잔 마실래?

_ 좋지! 그런데 앙리, 파리지앵들은 정말 시크해. 이것이 프렌치 시크인지, 좀 차갑달까? 아무튼 사람들 때문에 파리가 더 추운 것 같아.

_ 하하. 여긴 파리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널 경계해서 그런 게 아니야. 널 존중하기 때문이지, 시크하게.


다정한 무관심


앙리는 파리 사람들의 냉랭한 태도를 존중이라고 불렀다. 파리지앵을 상징하는 자유이자, 그들이 타인을 완벽히 존중하는 태도라고, 그 무심함이. 파리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앙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빠른 걸음으로 너른 대로를 걷는 사람들 모두 적당히 무심했다. 다소 과감한 포즈의 셀피족도 그저 못 본 듯 지나친다. 들뜬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여행자 사이에는 언제나 무심한 표정의 파리지앵이 있었다. 여행객들로 넘쳐나는 정신없는 파리에 든든한 무게추를 달아주는 건 그런 무심한 파리지앵의 표정이 아닐까?

@Paris, France _weekdaytraveler

처음엔 누구라도 무정하다 하겠지만, 자세히 보니 그건 무심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무심하나 무례하지 않고 시크하나 차갑지 않은. 빈자리는 늘 어른에게 양보하고 아이들이 타면 기꺼이 일어나 자기 자리를 내어주고, 다음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며 길을 물으면 최선을 다해 알려주던 파리의 사람들. 그저 쌀쌀 맞게만 보였던 그들의 태도가 사실, 그들만의 방식으로 타인의 공간을 존중하는 일이었다. 그 다정한 무관심 덕분에 파리 안의 어느 누구도 방해받지 않고 자기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지 모른다.

@Paris, France _weekdaytraveler

우리 역시 어느 순간부터 이들의 다정한 무관심이 반갑게 느껴졌다. 그들의 무표정에서 더 없는 자유를 누렸기 때문이다. 유행 지난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거나 매일 똑같은 옷을 입든 말든 사람들은 내게 전혀 관심이 전혀 없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일상 속의 짜릿한 반칙이자 근사한 변주였다. 누구든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격려였다.


내가 나이기 때문에


파리에 오기 전까지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썼다. 매일 새로 만났다 헤어지는 희미한 얼굴의 사람들, 유명 여행지에서 잠깐 스쳐 지나는 불투명한 눈빛들이 왜 그리 신경 썼을까? 아무래도 습관이었다.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나쁜 습관.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물건은 반드시 소유해야 한다는 강박,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차림새를 유지해야 한다는 억압, 평균을 맞추기 위해 삐져나온 팔은 자르고 무릎은 굽혀야 했던 악습.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타인을 의식하는 못된 습관들이 아침 해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처럼 진득하게 우리를 쫓아다녔다.

@Paris, France _weekdaytraveler

파리의 무관심은 우리를 그 지독한 습관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대체로 무표정한 도시와 주로 무신경한 사람들은 별 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별난 우리를 스쳐갔다. '매일 똑같은 옷을 입는 게 뭐 어때서? 짐 없이 여행하는 게 뭐 별거야? 관심 없지만 네 삶은 존중해. 그러니 당신도 타인의 삶을 아껴줘'라고 말하는 듯한 파리 사람들. 그들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Paris, France _weekdaytraveler

그리고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건 생각보다 더 근사한 일이었다. 내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보다 내가 왜 이 옷을 입었는지가 더 중요해지고 남들이 나의 차림에 대해 하는 말보다 내가 나의 차림에 대해 담아내는 이야기가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어째서 옷이 한벌뿐인지, 짐을 줄이고 여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가감 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생각이 틀렸을까, 내 삶이 남과 얼마나 다를까 검열하지 않아도 된다. 마침내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된 기분이다. 비로소 나의 이야기를 허풍이나 과장 없이, 거짓과 조작 없이. 인스타그램에 전시하는 사진 말고 보정 없이 걸어놓는 재미없는 진짜 사진.

@Paris, France _weekdaytraveler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도 우리는 같은 옷을 꺼내 입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마음을 다해 여행에 집중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가볍게 떠나는 이 여행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도구가 아니듯 오늘 아침과 우리의 일상도 어딘가에 전시하기 위함이 아니니까. 남과 비교하며 불행해지는 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으니까.


앙리가 준비한 마지막 식사는 간단한 감자 수프였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발을 딛고 뜨끈한 수프를 마시니 뱃속이 심해처럼 눅눅하고 편안해졌다. 우리는 우리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고 앙리는 여전히 시크하게, 별 것 아니라는 듯 우리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재미가 없다는 듯, 관심 없다는 듯, 그렇지만 마음을 다해 우리를 존중하며. 파리에서 지내는 동안 서서히 짧아진 그림자가 이제 영 보일락 말락 한다. 문득 정오가 머지않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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