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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오일여행자 Nov 26. 2017

우리가 배낭과 바꾼건

 산책은 배낭 대신 얻은 선물 같은 거야

계획표 너머의 여행


_ 오. 파도바? 파두아? 여기 어때? 살아생전 도대체 들어본 적이 없는 도시야. 밀라노에 가기엔 내 패션이 너무 후지고 베니스에 살기엔 물가가 너무 살 떨리고. 이탈리아 토박이가 알려준 곳이라 더욱 믿음이 가잖아. 우리, 여기로 가자.

_ 좋다! 파도바로 가자, 존 레논! (짐을 줄이고 린스를 사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헤어스타일이 존과 매우 비슷해졌다)

@Italy Rome, weekdaytraveler

이탈리아 남부에서 멀어질수록 드문드문 보이던 해변가의 작은 마을들이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커다란 도로 위를 내달리는 자동차들이 여기저기서 경적을 울렸고 바쁘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너른 평원 지대를 지나 우리는 조금씩 이탈리아 북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우리는 밀라노에 가는 길 위에 있겠지만, 지금 우리는 파도바로 가는 중이다. 


사실 파도바는 본래 우리 여행 계획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도시다. 심지어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이었는데 로마에서 만난 이탈리아 친구의 추천으로 급히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파도바가 작지만 운치 있는 도시라며 꼭 가보길 권했다. 그런 소도시야말로 이탈리아를 제대로 즐기는 법이라고 덧붙이면서.

@Padova, Italy _weekdaytraveler

가만 생각해보니 작고 한적한 소도시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딱 맞는 여행지였다. 우리는 그렇게 터미널에서 급히 계획을 변경해 파도바로 향하게 되었다. 밀라노에 머무르려 했던 계획을 바꿔 이리도 갑자기, 그렇게 무작정. 사실 이런 일들은 모두 우리에게 짐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서 이름도 생소한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로 이동하고 무작정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도시로 훌쩍 떠나고 이 모든 변화는 우리가 가볍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이전보다 큰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 여행은 언제나 계획표 너머에, 모험은 늘 우연 이후에 있었다.


아이와 어른 사이의 여행


갑작스레 도착한 파도바는 쌀쌀한 날씨에도 산책을 멈출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도시였다. 멋스럽게 늙은 중세시대의 건물들이 여전히 깊이 숨을 쉬고 뜨거운 한낮의 해와 갑작스러운 비를 막아주는 둥근 아치형 지붕이 편안한 산책로를 만들어준다. 도심 구석구석을 걸으며 우리는 자주 앳된 얼굴의 젊은이들을 만났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파도바는 이탈리아에서 볼로냐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에서는 파리에 이어 세 번째로 대학이 만들어진 도시란다. 단테와 갈릴레이가 교수로 재직했던 파도바 대학으로 여전히 수많은 젊은이들이 모이고 있었다.

@Padova, Italy _weekdaytraveler

파도바는 온통 책가방을 둘러맨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커다란 배낭에 전공 서적을 잔뜩 집어넣고 자전거를 타는 대학생들과 연구실에서 논문 쓰느라 하루 종일 커피를 들이부을 것 같은 두꺼운 안경의 대학원생들까지, 도시 전체가 커다란 학교의 좁은 골목이 복도처럼 보인다. 두툼한 전공 서적들을 복사하는 정겨운 프린터 숍과 가성비 좋은 푸짐한 식당들은 물론, 다른 도시에서는 자주 볼 수 없던 만화방도 여럿 있었다. 도라에몽 인형을 만지작거리고 '너의 이름은' 포스터에 열광하는 스무 살 청년들이 모여드는 재미난 공간이었다.

@Padova, Italy _weekdaytraveler

시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고풍스러운 카페 페드로키는 그런 파도바 젊은이들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이다. 1831년에 문을 연 이 카페는 그 이후부터 줄곧 자유로운 젊은이들의 아지트였다.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이탈리아 청년운동이 시작된 역사적인 장소이자 수많은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 내일을 토론하고 오늘을 작당하던 공간이었다. 카페 페드로키를 포함해 이 도시에는 무언가에 몰두하는 젊은이들로 가득한 카페들이 많다. 우리도 한 카페에 들어가 그룹과제와 시험공부에 매진하는 학생들 틈에 살포시 앉아보았다.

@Padova, Italy _weekdaytraveler

문득 대학 시절 우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는 작은 상처에도 벌벌 떨었고 시시한 작별에도 애를 끓이곤 했다. 그리곤 벌을 받은 시시포스처럼 술집과 학교를 오가며 자발적으로 아늑한 수렁에 빠지곤 했다. 진짜 나와 숨바꼭질하느라 온 시간을 허비했다. 삶은 모르는 것 투성이었고 생은 지루하기만 한 굴레였다.


파도바가 좋은 이유는 이 도시가 수백 년 동안, 그것도 온전히, 시시하던 그 시절의 나와 같은 젊은이들이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자기를 찾기 위해 학문과 겨루고 끝없이 사랑에 패배하며 힘겹게 저스틴 비버와 이별하는, 자신의 역사를 새로 쓰기 위해, 확실하고도 특별한 자기를 빚기 위해 치열한 나와의 결투가 벌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여행도 그런 결투가 아닐까? 새로운 나를 만들기 위해 실패하고 또 실패하는. 우리는 그런 파도바가 참 좋았다. 관광객이 없는 작은 도시를 이리저리 쏘다니며 우리는 산책을 멈추지 않았다. 파도바를 떠나는 그 순간까지.


이게 여행인지, 고행인지


오래도록 파도바를 산책하며 우리는 생각했다. 우리가 아무도 모르는 이 도시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산책 덕분이라고. 파도바에 누군가의 과거와 우리의 미래도 있다고 여기게 된 건 순전히 우리가 이 도시를 천천히, 오래 걸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 산책은 배낭 대신 받은 선물 같은 거라고 말이다.

@Padova, Italy _weekdaytraveler

이전의 여행에서는 온전히 산책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왜? 배낭이 무거우니까.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 때문에 어디든 빨리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싶었으니까.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무엇이든 자세히 보고 도시의 사소한 얼굴도 면밀히 살피는 여행을 꿈꿨지만, 여행이 길어질수록 사람만 한 배낭을 이고 도시를 걷는 일은 무중력 체험처럼 기이한 현상에 가까워져 갔다. 더욱 괴로운 건 형벌처럼 나를 짓누르는 짐 더미의 무게가 나에게만 불한당이 아니라는 점이다. 좁은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사람으로 붐비는 거리에서, 우리의 짐은 타인의 산책마저 방해하는 악당이 되곤 했다. 모처럼만에 휴일을 훼방 놓는 우리의 배낭은 사람들의 일상과 부딪혀 줄곧 불협화음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원한 여행이 누군가 부여해준 특별한 권한이 아니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비일상적인 생활로 여행을 꾸려가고 있었던 셈이다.

@Firenze, Italy _weekdaytraveler

우리가 배낭 대신 얻은 건,


인간은 걷는 만큼 존재한다고 했다. 여행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파도바를 걸으며 우리가 비로소 진짜 여행을 하고 있다고, 우리가 드디어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저 버스로 오며 가며 보았다면 알지 못했을 도시의 매력을 걸으며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가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길 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연결하는 도저히 이름 붙일 수 없는 귀한 여백을 마련했기 때문에. 천천히 걸으며 발견하는 여행의 즐거움 때문에 우리는 파도바에서 3주를 머물렀다. 예전처럼 그저 여행을 왔다면 딱히 볼 것도 없고 지루해서 쉽게 지나쳐버렸을 작고 심심한 도시에.

@Padova, Italy _weekdaytraveler

오랜동안 머물렀던 파도바에서의 일상은 아주 단조롭다.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과는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나서는 것뿐이다. 아침 8시,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툭툭 털며 길을 나선다. 가장 먼저 찾는 곳은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성 안토니오 성당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부디 잃어버린 무엇이든 찾기를 바라며, 한 사람이라도 부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기도한다. 성당을 나서면 점차 붉어진 아침 공기를 마시며 세계 최초의 식물원과 젊은이들의 공원을 천천히 걷는다.

@Padova, Italy _weekdaytraveler

드라이기가 없어 매일 젖은 머리를 말리는 게 일이었는데 이제는 드라이기 대신 아침 산책의 햇볕과 불어오는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는 일이 더 귀해졌다. 드라이기를 넣을 배낭 대신 아침 산책을 얻은 셈이다. 짐이 없는 우리에게 필수품은 더 이상 드라이기가 아니다. 엑셀을 열어두고 배낭 안을 가득 채울 물건들을 적을 필요도 없다. 대신 우리는 머릿속에 필요한 몇 가지만을 생각한다. 정해진 시간에 시작하는 4시간의 산책, 머리를 말릴 햇살, 그날의 온도에 맞는 시 한 구절. 그것이면 여행은 충분해진다.


_ 어쩌면 짐과 바꾼 건 시간이 아니었을까? 여행을 하면서도 늘 짐에 치이고 시간에 쫓기고 했는데 말이야. 출근하듯이 집을 나서서, 업무 보듯이 사진을 찍고.

_ 배낭을 옮기고, 짐을 쌌다가, 또 짐을 풀고. 서둘러 관광명소를 보고, 습관적으로 사진을 찍고. 그래, 배낭과 맞바꾼 건 산책이 아니었을까? 우리에게 생긴 빈 시간에 길게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되었잖아. 어쩌면 짐이 없어서 비로소 우리가 바라던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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