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맞아도 , 자주 실패해도 괜찮은 여행
영상 18도에서 영하 18도까지
리투아니아 빌니우스의 공항은 어느 소도시의 시외버스 터미널이 떠오를 만큼 작고 아담했다. 에스토니아의 탈린과 불가리아의 소피아를 오가는 항로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 공항은 유럽의 저가 항공들이 잠시 들렀다가는 휴게소 같았다. 창밖으로 온통 흰 눈이 덮인 도로와 어깨 위에 소복이 눈을 얹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보였다. 두툼한 그들의 겉옷을 보니 우리가 겨울에 들어섰음이 문득 실감 났다.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 하얀 눈꽃이 활짝 핀 나무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아주 환하고 긴 밤을 통과했다.
어제는 영상 18도를 웃돌던 텔아비브에서 한 낮을, 오늘은 눈이 펑펑 내리는 영하 18도의 빌니우스에서 새 밤을 맞는다. 계절과 계절을 오가는 이 여행이 문득 낱말 퍼즐처럼 재미나고 설레었다.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들이 가득한 황금빛 도시에서 두툼한 털모자를 쓰고 하얀 눈밭 위를 살금살금 걷는 북유럽의 도시까지, 우리 여행이 오가는 넓은 폭이 새삼 실감 났기 때문이다. 계절과 계절을 오가고 시대와 시대를 넘나드는 여행 그리고 이 여행을 통해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를 조심스레 이어가는 일, 그야말로 은밀하고도 위대한 진폭의 여행이었다. 어쩌면 한층 가벼워진 가방 덕분에 가능해진 일이 아닐까? 공항을 나서는 발걸음에 괜스레 힘이 넘쳤다.
친구의 털모자
하지만 온통 얼음판인 도심 속을 걸으며 우리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영하 18도의 추위를 도대체 견뎌 낼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옷을 모두 꺼내 입고 혹시 몰라 챙겨 왔던 1유로짜리 장갑까지 꼈지만, 끊임없이 내리는 눈과 영하의 추위에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우리가 가진 가벼운 살림살이들은 일상에 꼭 필요한 것들로만 꾸려졌기 때문에 날씨가 조금이라도 추워지면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다. 껴입을 수 있는 옷은 한정적이고 가방이 작으니 춥다고 옷을 더 살 수도 없고 눈비가 내린다고 우산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_ 이렇게 추운 줄 알았으면 리투아니아에 오지 않았을 거야. 이런 게 불행인가. '불행'이라는 단어는 '영하 18도에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없다'는 뜻이거나 '함박눈에 머리가 젖어서 얼어붙은 상태'를 뜻할 거야
미리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 숙소로 가기 위해 눈이 잔뜩 쌓인 작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예상보다 늦게 도착했고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찬바람에 거북이처럼 목이 움츠러들었다. 추위에 떨다 불행하게 끝나버릴 것 같은 여정을 걱정하며 숙소에 도착했다. 도착한 숙소에는 늦은 시간까지 우리를 기다려준 호스트, 에릭이 있었다.
_ 아름다운 빌니우스에 온 것을 환영해!
_ 아름답..겠지? 정말 미안해. 아름다운 걸 보고 듣기엔 오는 길이 너무 추웠어!
_ 머리카락이 다 얼었구나. 너희들 짐이 없어서 그런지 옷이 너무 얇다. 내가 내일 내 옷과 모자를 좀 빌려줄게. 그걸 입으면 충분히 빌니우스를 즐길 수 있을 거야.
에릭은 빌니우스의 눈 내린 풍경이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다고 말하며 자신의 털모자와 두툼한 점퍼를 들고 다음날 아침, 우리를 다시 찾아왔다. 그가 쓰던 모자와 두툼한 외투를 받아 들며 우리는 따뜻한 그의 체온도 같이 챙겨 입었다. 우리는 에릭의 털모자를 쓴 채로 잔뜩 눈을 맞으며 빌니우스의 겨울을 온전히 즐겼다. 그렇게 만난 빌니우스의 눈송이들은 참 예뻤다. 얼어붙은 강물 위로, 손님 없는 허름한 식당 위로, 그림처럼 느리게 걷는 할머니의 머리 위로 공평하고 일정하게 소리 없이 내렸다. 에릭의 털모자가 아니었다면 느낄 수 없었던 포근한 눈송이들이었다.
할머니의 우산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를 괴롭히던 추위는 빌니우스에서 끝나지 않았다. 리투아니아의 겨울을 지나 기어코 따뜻한 봄을 맞이하리라 기대에 부풀었던 이탈리아 남부는 쌀쌀맞고 변덕스러운 날씨로 우리를 괴롭혔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거세게 쏟아지는 비는 황홀한 아말피 해안을 장마철 동해바다처럼 만들어버렸고 칼처럼 날카로운 바닷바람은 두툼한 패딩점퍼를 떠올리게 했다.
_ 불행이라는 단어의 뜻을 고쳐야겠어. '불행'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지중해의 푸른빛을 볼 수 없다'거나 '비를 맞으며 안 오는 버스를 기다린다'는 뜻이야
큰 마음먹고 찾아간 아말피 해변에서 우리는 내내 쏟아지는 폭우를 피하느라 비 피하기 적당한 처마를 찾아다니느라 바빴고 아름다운 지중해를 바라보기는커녕 비수기라 온통 문을 닫은 가게들 틈에서 제때 끼니를 챙기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비를 맞고 시무룩해져 돌아오는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람들 덕분에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빌니우스에서 자신의 털모자를 선뜻 빌려준 에릭처럼, 비가 오는 오후면 늘 우산을 빌려주던 제제 할머니가 계셨다.
_ 여행 중에 비가 와서 속상하지? 그럴 필요 없어. 비가 와야만 생기는 더 멋진 일도 많아, 저 무지개처럼.
내내 비가 내려 청량한 아말피 해변을 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즐거웠다. 우리는 할머니와 베란다를 모두 열고 리듬감 넘치는 빗소리와 흠뻑 젖은 공기의 냄새를 맡으며 진한 커피를 마셨고 직접 만든 무화과 잼과 레몬차를 나누며 무지개가 뜨기를 함께 기다렸다. 할머니는 여행도, 인생도 가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얼마든지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고도 하셨다. 무지개는 비가 와야만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덧붙이시면서.
무슨 아이언맨도 아니고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지난 여행을 떠올렸다. 1년 전 여행을 처음 떠나올 때 우리는 온갖 기능성이 두루 포진된 강력한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 이 옷과 함께라면 무엇도 두렵지 않아!'라며 의기양양했다. 빨간 슈트를 장착하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토니 스타크처럼, 우리는 초기능성 등산바지의 찍찍이를 보란 듯이 펄럭거렸다. 그뿐인가? 옷이 이미 최강 방수인데도 커다란 배낭 안에는 기능성 우비와 3단 접이식 우산까지 넣고 다녔다. 물에 젖으면 정체가 탄로 날 인어도 아니었는데 뭐가 그리 두려웠는지 모르겠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더 가관이었다. 비가 오기만 하면 얼른 우산을 사기 위해 편의점으로 내달렸다. 잠깐 내리다 그칠 비, 약하게 흩날리는 눈발도 그 꼴이 그렇게 신경질이 나고 견딜 수가 없었다.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거야?'라는 마음으로, 퍼붓는 비와 한 판 붙을 기세로 편의점에 달려가 일회용 우산을 사고야 말았다. 그렇게 쓰고 버린 일회용 우산이 신발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건 내리는 비가 아니었다. 내가 한 판 붙고 싶은 것도 부슬부슬 흩날리는 눈은 아니었다. 시시하게만 보이는 나의 일상과 정답이 아닌 것 같은 나의 삶, 그렇게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순응하는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참을 수 없음을 나는 물건을 소유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안간힘을 썼다.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능동적일 수 있는 순간은 '내 삶이 틀렸다, 우리 모두 엉뚱해질 필요가 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이 아니라 그저 일회용 우산을 살 때뿐이었으니까. '비에 젖지 않으리, 실패하지 않으리, 불행하지 않으리'라고 되뇌며 나는 새장 속에 살기를 원했으니까. 비가 오지 않으면 마른땅은 사막이 되고 무지개를 영영 볼 수 없는데도 감히 새장 밖으로 나갈 마음을 먹지 못했으니까.
우산이 없어도, 자주 실패해도
이제는 우산이 없어도 비가 오면 반갑고 신발이 젖어도 눈이 오면 기쁘다. 짐 없이 여행하면서 비로소 비를 맞고 눈을 맞는 법을 알게 된 것만 같다. 우산에 우비까지 챙겨 다니며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만발의 준비를 하던 때에는 모르던 즐거움이다. 어쩌면 짐이 없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를 맞아도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비를 맞지 않으려, 실패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무엇이든 소유하는데 급급했던 나였는데 이제 조금은 옷이 젖어도 즐거운, 매일 실패해도 덤덤한, 보다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 같다.
가끔 모두들 아름답다고 하는 곳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느낀다. 바위 위에 빈틈없이 붙은 따개비처럼 거대한 절벽을 감싼 형형색색의 건물들과 푸른 바다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포지타노는 명성만큼 아름다웠다. 겨울이라 마을 뒤로 솓은 높은 산마루에는 흰 눈이 쌓여있었다. 그 눈이 낯선 풍경을 더욱 이국적으로 만들었다. 좁은 골목을 누비다 잠시 걸터앉은 계단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먼 바다에서 몰려오는 먹구름이 이제 친숙하다.
앞으로도 우리는 우산이 없어도 즐거운, 비를 맞아도 괜찮은 여행을 하고 싶다. 그리고 우산을 사지 않아도, 무언가 소유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을 살고 싶다. 물건이라는 덫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고 무엇을 살 것인지 결정하는 자유 대신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자유를 누리고 싶다. 그러다 신발이 비에 흠뻑 젖고 자주 길을 잃고 혼자만 다른 트랙을 달리느라 외롭고 빨간 펜으로 실패만 줄줄이 늘어놓게 되더라도 괜찮다. 비 오는 날의 비정한 정서와 눈이 보내는 눅눅한 그리움을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고 손님이 없어 파리만 날리는 노천극장이어도 '내'가 주인공인 극을 올릴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인생이 되지 않을까? 똑똑똑- 한 방울씩 떨어지는 마지막 빗방울을 손에 담으며, 우리는 다시 젖은 몸으로 축축한 돌바닥을 걸어나간다.
_ 어, 비 온다. 우산 없어도 괜찮아? (눈치)
_ 어, 이상하게, 괜찮네? 우산 없어도, 옷이 좀 젖어도, 실패해도 괜찮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