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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오일여행자 Nov 12. 2017

여행은 가볍게, 영혼은 무겁게

여행, 주머니에 넣은 불행처럼

배낭은 없습니다 


_ 불가리아, 소피아행 맞습니까? 수하물이 없으신데, 그것도 맞나요?

_ 네. 부칠 짐은 없습니다 


배낭을 없애고 떠나는 첫 번째 여행지를 두고 우리는 적잖은 고민을 했다. 짐이 없어 자유로워진 우리의 장점을 살려 가능한 멀리멀리 떠나고 싶었다. 배낭이 없으니 따로 부칠 짐도 없다. 부칠 짐이 없으니 항공권은 잔뜩 저렴해졌고 늦은 시간에 출발하고 여러 도시를 경유하는 노선을 선택하는 데에도 부담이 적었다. 우리는 벽 한쪽에 지도를 붙여놓고 여러 노선을 이어 붙여 가장 멀리 떠나는 항로를 창조했다. 네덜란드의 아이트호벤 공항에서 불가리아의 소피아를 거쳐,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향하는 경로였다. 

@Tel aviv, Israel _weekdaytraveler

수화물 없이, 아무도 가지 않는 날짜에,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법한 공항을 통해 아주 낯선 도시로 떠나게 되었다. 텔아비브, 배낭 없는 여행의 첫 기항지로 무척 낯설고 흥미로운 여행지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깔끔하게 정돈된 네덜란드의 아인트호벤 공항으로 들어섰다. 배낭을 메던 등 위로 바람만 시끄럽게 미끄러졌다.  


짐으로부터의 해방


텔아비브 공항은 아테네의 어느 신전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웅장하고 거대했다. 하늘처럼 넓은 천장을 받치고 선 기둥 사이로 점처럼 작은 사람들이 먼지처럼 이리저리 떠돌았다. 드르륵드르륵- 캐리어 끄는 소리가 공항 안을 헤매고 수하물 찾는 곳을 알리는 화살표가 머리 위를 떠돈다. 예전 같았으면 제일 먼저 수하물을 찾으려 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다. 물건과 무게에 대한 치열한 언쟁으로 점철된 몇 번의 비행이 마침내 우리를 Baggage Claim Area 수하물 찾는 곳으로부터 해방시켰다. 

@Tel aviv, Israel _weekdaytraveler

배낭이 없다. 배낭에 눌리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양의 어깨와 공허한 허리춤에서 풍선이 돋아난 듯했다. 몸무게 0kg의 해저 도시나 중력이 없는 봉긋한 달 표면에 도착한 듯 무게감을 상실해버린 느낌이었다. 그래. 짐이 없다. 짭짤한 사해에 배처럼 두둥실 몸을 띄워, 물에서의 낮잠을 즐기는 듯한 환상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롤러코스터의 안전 바가 내려오는 순간만큼 짜릿하고, 수박서리를 하던 어린 날의 밤만큼 온몸이 들썩였다. 

@Tel aviv, Israel _weekdaytraveler

우리는 '최소한의 물건만 남은 여행가방의 간소함이 삶의 복잡함을 이기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할 것'이라는 장석주 시인의 말을 구호처럼 외치며 텔아비브 공항 검색대를 유영하 듯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가벼운 몸과 자유로운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짐이 나오는 컨베이어 벨트 주변에 우르르 모인 사람들을 유유히 지나쳤다. 배낭이 언제 나올지 몰라 목을 쭉 빼고 컨베이어 벨트만 바라보던 지난날 우리 두 사람도 그곳에 있었던 것 같다.  


누구든 나서서 당신을 도울 테니


모래 위에 지어진 섬 아닌 섬, 텔아비브 시내는 노란 건물들로 가득했다. 구도심은 귀퉁이가 닳아 뭉툭해진 낡은 빌딩들로 북적였고 오랜 건물들 사이로 현대적 디자인의 거대한 빌딩들이 버섯처럼 돋아있었다. 그 옆으로 보이는 유대교 회당과 검은 옷의 랍비들이 보니 이스라엘에 온 것이 실감 났다. 우리는 작은 버스 장류장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 번호와 시간표를 보며 에어비앤비 숙소의 주소와 비교해보고 있었다. 읽을 수도 없는 글자들을 이리저리 조합하며 암호를 해독하듯 골몰하고 있으니 문득 우리 옆을 서성이던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가 타야 할 버스를 찾아 먼저 알려주셨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도움이 필요할 때는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언제든 도움을 청하라고, 누구든 나서서 당신을 도울 거라고.   

@Tel aviv, Israel _weekdaytraveler

텔아비브의 사람들은 언제나 친절하고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늘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혹시 길을 찾기 힘들거든, 주변 사람에게 휴대폰을 빌려 자신에게 꼭 전화를 하라고 당부한 것이 떠올랐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흔쾌히 전화를 빌려줄 것이라고 덧붙이던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베트남에서 라오스로 가던 야간 버스에서 만난 스물두 살의 대학생이 나의 첫 은인이다. 베트남에서 사둔 간식을 도둑 맞고 라오스 돈도 없어 꼬박 굶고 있던 내게 그녀는 먼저 다가와 자기의 음식과 라오스 돈 얼마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꼭 갚겠다며 숙소 주소라도 알려달라고 했더니, 나 대신 다른 사람을 도우면 된다고 말하던 곱슬머리 친구. 당시에 이스라엘 여행자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며 동네가 떠나가라 떠드는 통에 여행자들 사이에서 평판이 썩 좋지 않았지만, 내게 이스라엘은 그녀로 인해 유달리 따뜻한 나라였다. 


오랜 시간이 흘러 도착한 텔아비브에서 역시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도움으로 따뜻한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늘 나서서 우리를 돕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길을 잃을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염려와 환대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가시가 손에 박힌 듯한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막 위의 수영장


우리는 텔아비브에 머무는 내내 길고 긴 해변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숙소에 먼저 들러 배낭을 두고 무게에 짓눌린 몸을 쉬게 해야 할 시간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황금빛을 자랑하는 긴 해변가의 고운 모래는 밀가루처럼 부드러웠고 1월에도 여름처럼 푸르게 빛나는 지중해 위로 크고 작은 파도들이 쉼 없이 부서졌다. 서핑을 즐기는 젊은이들과 산책 나온 가족들, 발리볼이나 세팍타크로 같은 스포츠를 즐기는 텔아비브 사람들이 해변을 가득 채웠다. 그 풍경이 무척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Tel aviv, Israel _weekdaytraveler

그렇게 해변을 따라 한 시간 가량을 걸으면 텔아비브의 끝자락, 올드시티에 도착했다. 텔아비브 중심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예루살렘만큼이나 긴 역사를 가진 고대 항구 올드 욥바는 햇볕에 노랗게 반짝이는 해바라기처럼 빛바랜 건물들로 가득했다. 낡은 항구 주변에는 오래된 창고를 개조해 만든 레스토랑이 많았다. 항구는 온통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가득 찼고 넓은 공간을 활용해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전시한 아트 센터 역시 매력적이었다.  젊은 예술가들이 만드는 독특한 세계와 수천 년 전 사람들이 만들어낸 고대 항구의 세계가 좁을 골목을 사이에 두고 수없이 교차하고 있었다.   

@Tel aviv, Israel _weekdaytraveler

따뜻한 날씨와 높은 파도, 서핑을 즐기는 젊은이들과 두 아빠가 표현하는 넘치는 사랑은 캘리포니아를 떠올리게 했다. 실핏줄처럼 얽힌 오래된 골목과 복잡한 시장의 막다른 길목들은 중동 어느 나라의 바자르를 떠오르게 했다. 여러 개의 시공간이 교차하고 다양한 문명이 충돌하며 만들어진 블랙홀 같은 도시, 그곳의 사람들은 오늘도 요트 위에서 풍요로운 한 나절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문득 이토록 넘치는 풍요와 아낌없는 사랑이 어리둥절했다. 진흙탕에 빠진 신발을 어쩔 줄 모르고 바라보는 아이처럼 당황했다.   


_ 박제된 것처럼 보이는 이 아름다운 화면은 과연 사실일까? 이들이 전하는 따뜻한 환대와 존중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수백 킬로까지? 그 안에 점선으로 나누어진 어떤 지역에는 왜 이 크고 아름다운 화면에서 제외되는 걸까? 누군가는 이 화면 밖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  

@Tel aviv, Israel _weekdaytraveler

우리는 사막 한가운데 만들어진 푸른 수영장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수영장의 소독약 냄새가 바닷바람을 타고 우리 앞까지 흘러왔다. 얼마 전 뉴스에서 본 가자 지구의 물 부족 문제와 텔 아비브의 수영장들, 매일 크고 작게 벌어지는 이곳의 테러와 전쟁의 잔상들, 잊히지 않는 사람들의 환대와 마음에 남는 젊은 군인들의 군화. 이스라엘에 머물며 내내 불편했던 마음의 가시들이 푸른 수영장 물 위로 둥둥 떠올랐다. 그날 밤 우리는 마음속에 부대끼는 사람들의 그림자와 보이지 않는 가시가 박힌 수영장을 떠올리며 이스라엘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배낭 없는 용의자 둘 


부칠 짐이 없었던 우리는 바로 출국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출국장으로 들어가려고 보니 짐이 없어도 사전에 안전 체크를 해야 한다며 공항직원이 우리를 다른 줄로 안내했다. 우리는 사람들 틈에 섞여서 안전 체크를 기다렸다. 긴 줄에는 몇 명의 무슬림과 처음 보는 신기한 색의 여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여권 사진과 생김새가 달라 보이는 한 남성은 30분이 넘도록 똑같은 질문을 반복적으로 받았다. 그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전염병에 걸린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구석으로 격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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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불길함이 공항 주변을 맴도는 사이,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공항 직원을 마주하며 우리는 부디 ‘감염되지 않았다’는 진단이 나오길 바랐다. 공항 직원은 딱딱한 말투로 얼마나 여행을 했는지, 왜 짐이 이것뿐인지, 이스라엘엔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반복해서 물었다. 한국의 가족관계부터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여행했는지, 이전의 연애사와 심지어 동거 여부까지 치밀하게 물었다. 그게 왜 필요한 질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비밀 작전을 지시하 듯 무전을 치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우리는 여권 사진과 다르게 생겼다고 격리된 그 남성과 함께 무리에서 낙오되고 말았다. 감염이었다.   


배낭이나 짐이 없다는 게 잠재적 테러리스트만큼 위험한 의심 사항인지, 낯선 여행 경로와 불길한 색의 여권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잠재적 용의자가 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우리는 겁먹은 거북이처럼 움츠리곤 잠자코 다음 검사를 기다렸다. 얼마쯤 지나자 동물의 왕 사자도 때려눕힐 다부진 눈빛의 직원이 나타났다. 그녀는 각 잡힌 말투로 우리를 몰아붙이며 질문을 시작했다. 방금 전과 동일한 질문을 하며 우리가 답한 내용과 맞는지 대조하는 듯했다. 


우리는 수십 번에 걸쳐 같은 답을 반복했다. 왜 짐이 없는지, 얼마나 길게 연애했는지와 같은 이상하고 긴 조서를 꾸몄다. 공항 관계자는 우리가 왜 짐이 없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한국에서 왔는데 어째서 짐은 암스테르담에 있고 이 가방만 들고 왜 리투아니아라는 이름도 생소한 목적지로  떠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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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없는 용의자 둘은 반복적인 질문 끝에 간신히 출국장에 입성할 수 있었다. 수염을 길게 기른 남성과 함께 격리동을 빠져나오며 우리는 잠깐 웃었다. 그리고는 짐 없는 여행이 주는 자유를 만끽하던 지난 며칠이 떠올랐다. 짐 없는 여행자와 수염을 기른 무슬림이는 건 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일까? 편견으로 나를 보는 시선의 불편함,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향한 묘한 그들의 경계심이 우리를 마구 헤집었다. 수염을 기른 남성과 짧은 악수를 나누며 서로의 안전한 여행을 빌어주었다.   


손바닥에 박힌 가시처럼, 주머니에 넣은 불행처럼


리투아니아에 도착한 저녁, 우리는 그 날 오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트럭 테러에 대해 듣게 되었다. 대형 트럭 한 대가 버스에서 막 내린 젊은 이스라엘 병사들을 향해 돌진한 사건이었다. 뉴스는 사망한 4명의 군인이 모두 20대의 젊은 이스라엘 병사들이라고 전했다. 이 테러사건 때문에 오늘 공항 경비가 더욱 삼엄해졌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일정을 조정하지 않고 이스라엘에 더 머물렀다면 오늘 예루살렘에 방문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 여행은 전혀 다른 결말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Tel aviv, Israel _weekdaytraveler

이스라엘과 리투아니아 사이 어디쯤에서 우리는 여행의 목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왜 여행을 할까?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피곤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삶을 어떻게든 바꿔보기 위해, 모두들 저마다의 이유와 결심으로 자기만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 곁을 스쳐가는 수많은 사고와 갈등을 목격하며 우리의 여행이 언제나 자기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나의 여행이 이 세계와 얼마나 친밀한 것인지, 나의 삶이 이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Tel aviv, Israel _weekdaytraveler

누군가는 분쟁이 벌어지는 곳으로의 여행이 부당한 자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라 비판하고, 누군가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이 사고가 몇 사람의 불행인지 측정하고 있을 테지만, 우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믿어보는 쪽을 선택했다. 하루키는 2009년 예루살렘상을 수상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말했다. '오지 않는 것보다 오는 것을, 외면하기보다 무엇이든 보는 쪽을, 침묵하기보다 여러분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는 쪽을 선택했다'라고. 


우리 역시 무엇이든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건 아닐까? 친절하기만 한 사람들의 마음과 흉터처럼 남은 지도 위의 불편한 점선, 그리고 우리가 행운처럼 비켜간 비극을 담담히 가슴에 담으며, 우리도 무엇에든 침묵하지 않고 누구에게든 말을 건네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 같은 글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담는 사진으로, 그리고 새로운 실험이자 최소한의 윤리인 우리의 여행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   

@Tel aviv, Israel _weekdaytraveler

언제나 자기만의 것이 아닌 여행을 마음에 담고 죽음을 주머니에 넣은* 채 비행기는 다시 활주로를 달린다. 주머니 속에 담긴 누군가의 불행이 편안한 우리 여행의 불편한 가시로 남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손바닥에 박힌 가시처럼, 주머니에 넣은 불행처럼 남은 이 여행이 오래전 배낭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그리고 마음먹는다. 여행은 가볍게, 영혼은 무겁게, 다시 길을 나서자고.   



*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는 찰스 부코스키의 일기를 담은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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