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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오일여행자 Nov 05. 2017

무엇을 살지, 어떻게 살지

2kg의 여행가방이 주는 질문

암스테르담의 올리밴더스


암스테르담에서 우리의 일과는 자전거를 타고 미술관을 가거나 축축한 잔디를 밟으며 공원을 산책하는 일로 채워진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던 평범한 날 중에 하나였다. 구름이 잔뜩 끼었음에도 바람이 나쁘지 않아 자전거를 끌고 나갔고 마침 비행기 티켓과 중요한 서류들을 넣을 봉투를 사야 했기에 암스테르담 시내의  미술 용품점에 들렀을 뿐이다. 그렇게 우연처럼 들른  상점에서 우리는 우연치곤 아주 운명적인 사건을 만나게 된 것이다

@Amsterdam, Netherlands _weekdaytraveler

상점으로 들어서자 곱실거리는 금빛 머리칼을 이마까지 내린 점원이 보였다. 소년처럼 앳돼 보이던 그는 우리에게 ' 알고 왔구나?'라고 말하는 듯한 짧은 눈인사를 건넸다. 그의 머리칼처럼 포근한 분위기의 상점에는 처음 보는 색깔의 물감과 독특한 디자인 용품들이 가득했다. 상정을 돌아보다 익숙한 색의 가방이 눈에 띄었다. 파란색과 빨간색이 나란히 칠해진 그 가방은 내가 들고 있는 프라이탁과 똑 닮은 디자인이었다. 자신의 마술 지팡이를 고르기 위해 지팡이 가게 '올리밴더스'에 들어선 해리포터처럼 우리는 그 가방이 오랫동안 우리를 기다려온 지팡이임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암스테르담의 젊은 올리밴더가 가게에 들어서는 우리에게 보낸 그 눈빛의 의미를 이제야 알  같았다. '너, 이 가방 때문에 이곳에 왔구나?' 

@Paris, France _weekdaytraveler

프라이탁과 미니멀리즘  


_ 와! 이거 정말 멋진데? 내 생각에 이 두 가방은 원래 하나였던 것 같아. 이렇게 같은 디자인의 가방을 서로 다른 장소에서, 그것도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 찾는다는 건 정말 드문 일이야. 이건 꼭 사야 해! 그리고 너희들 이야기를 꼭 사람들과 공유해봐. 아마 지금껏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될 걸? 


금빛 머리의 점원이 호들갑을 떨며  가방을 꼭 사야 한다고 말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프라이탁이 만들어지는 독특한 방식 때문이다. 프라이탁은 스위스의 그래픽 디자이너 두 명이 만든 브랜드로 트럭을 덮을 때 사용하는 방수포를 재활용하여 만든 업사이클링 제품이다. 트럭의 방수포를 재활용하기 때문에 비가 와도 젖지 않고 내구성 역시 아주 강하다. 6개월 간 사용하며  튼튼함에 매번 감탄할 정도였다. 모든 제품은 수작업으로 만들어지고 활용하는 방수천에 따라 모든 가방이 독특하고 개별적인 디자인을 가지는 것이 큰 매력이다. 그렇기에 같은 디자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비슷한 디자인일 경우 원래 하나였던 큰 천을 나눠 쓴 경우에나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Perth, Australia _weekdaytraveler

이미 누군가 5년  사용했던 중고제품을 베를린에서 구매했는데 그와 같은 디자인을, 5년 뒤 암스테르담에서 만나게 되다니! 젊은 점원이 우리에게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우리도 생각해보니 무언가 운명적인 느낌이 들었다. 어릴  하나의 징표를 나눠가지며 영영 헤어진 형제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드라마 속 이야기처럼 말이다.  애는 운명을 믿지 않는 로봇이지만, 확률적으로 따져봐도 아주 드문 경우라며 씨익- 웃어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프라이탁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우리에게 이 가방이 정말 필요한 걸까? 최소한의 여행, 미니멀 여행을 하기로 해놓고 또 무언가를 사야 한다는 건 불쾌한 아이러니가 아닐까?

 

_ 미니멀리즘이니 뭐니 해놓고 최소한의 짐만 가지고 여행을 하네 마네 해놓고 미니멀 때문에 새로 가방을 산다는 게 좀 우습지 않아?

_ 맞아. 그런 것도 같네. 우리가 아예 소비를 하지 않기로 한 건 아니지만...

_ 몇 가지 짐을 커다란 배낭에 넣고 다니는 게 불편해서 필요했던 물건이라고 해도 마음이 불편해. 굳이 사지 않아도 되는데 괜한 소비를 하는 것 같아서 죄짓는 마음도 들고.

_ 하지만 우리가 속세를 등지고 산으로 들어가는 스님도 아니고 필요할 때에 필요한 물건을 사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 오히려 그게 미니멀리즘 아닐까? 필요한 때에 필요한 물건을 사는 거 말이야. 게다가 나는 이 가방이 만들어진 과정이 꽤 합리적이고 윤리적이라고 생각하거든. 패스트 패션도 아니고 리사이클링을 통한 제품이잖아. 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물건을 살 건지 잘 고민하는 것도 미니멀리즘이라고 생각해.

 

그래. 미니멀리즘이 소유한 모든 것들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는 태도는 아닐 거다. 법정스님도 말씀하셨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어쩌면 미니멀리즘은 내게 불필요한 것들을 줄이고 과도한 소비 습관에서 벗어나 내게 필요한 물건만,  사물의 가치만 남기는 게 아닐까?

 

1유로 지뢰밭


그 순간 문득 베를린에서 산 핑크색 모자가 생각이 났다. 시내 산책을 나섰다가 지뢰밭처럼 깔려있는 패스트 패션 매장을 피해가지 못하고 1유로에 판매한다는  모자를 덜컥 사버리고 말았다. 필요하지도 않고 심지어  먹은 솜처럼 부피도 엄청나게 큰 모자였지만 '1유로 밖에 안 하잖아!'라며 모자를 사고야 말았다. 커다란 모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 나를 보고  집에 살고 있는 친구인 비키가  만화 주인공 같다며 웃는다. 비현실적으로 거대하고 낯선 열매의 그림자처럼 핑크빛인 모자를 들고 선  모습이 값싼 인형처럼 초라했다. 지뢰가 터지고야 말았던 것이다.

@Berlin, Germany _weekdaytraveler

비키는 미니멀리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지만 일상생활에서  누구보다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미니멀리스트로 살고 있다. 찢어진 청바지는 중고물품을 거래하는 동네 가게에서 구매했고 바람을 막아주는 낡은 외투는 몇  전 마우어 파크의 벼룩시장에서 저렴하게 샀다는 중고품이었다. 매일 들고 다니는 가방은 자신의 헤진 티셔츠와 바지를 이용해 직접 제작한 에코백이며, 집안의 먹거리들과 화장품은 윤리적 기업으로 유명한 곳의 제품들이었다. 그녀의 일상은 단순하지만 깊이 있는 살림이었고 자신이 사랑하는 도시와 이 세계를 이해하는 자기만의 방식이었다.

 

그저 유행을 따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우리는 안다. 일회용처럼 쓰고 버리는 물건들이 이 세계를 망치고 있다는 , 자주 샀다가 자주 버리는 싸고 질 나쁜 물건들이 농약처럼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걸.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 사람과 동물에게 모두 유해학 화학물질과 강으로 흘러드는 폐수까지. 그렇게 나쁘게 만들어지고 빠르게 버려지는 물건들을 구매하지 않고 가치가 담긴 물건들을 구매하는 , 어쩌면 필요할 때에 필요한 만큼의 물건을 사고 옳은 가치를 담은 물건을 사는 데 집중했더라면 소유한 물건들을 정리해 나가는 미니멀리즘은 애초에 필요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Berlin, Germany _weekdaytraveler

그래서 그 가방은 어떻게 되었냐고? 어느 영화 속 스위스 은행의 비밀스러운 개인 금고를 열듯 하얀 박스가 나란히 줄지어 걸려있는 가운데서 조심스럽게 우리의 가방을 선택했다. 프라이탁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공감하며 우리는 고민 끝에 그 프라이탁을 구입했다. 그저  다른 유행에 동참하는 기분으로 미니멀해지고 싶은  아니라면 미니멀리즘은 소비를 통해 자신이 무엇에 가치를 두는 지를 증명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무언가를 사지 않는 데만 몰두하지 않고 무엇을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무조건 버리는 유행에 현혹되기보다 그 일이 환경과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잘 관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Berlin, Germany _weekdaytraveler일

그래서 우리의 미니멀리즘은 불필요한 물건을 줄여 가볍게 여행을 떠나는 것에서 시작하되, 나쁜 음식을 먹지 않고 소유하는 것보다 가치 있는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가끔은 지금처럼 무엇을 버릴지 고민하는 일보다 무엇을 남길 것인지가 더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미니멀 여행 또한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무엇,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남기기 위한 과정일 테니까. 그런 생각 끝에 드디어 핑크색 그림자의 커다란 지뢰가 모자를 따라 밤안개 속으로 멀리멀리 사라져 가는 듯했다. 그 모자와의 이별이 차가운 목욕처럼 개운했다.

 

지구 끝까지, 딱 1분


이제 우리에게는 목에  방수 지갑도, 튼튼한 지퍼로 무장한 안전 복대도, 침낭과 매트가 주렁주렁 달린 만능 배낭도 없다. 하지만 겨우 2kg에 불과한  작은 가방이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무엇을 '사는' 행위에 대한 아이러니부터 어떻게 '사는'  옳은 것인지에 대한 진득한 고민까지. 우리는 그때마다 수많은 여행지에서의 기억들과 마주하게  것이다. 프라이탁 가방을 사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던 오늘처럼. 


 여행으로 어떤 답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우리에게 던져질 수많은 질문들을 마주하며 보다 나은 우리가 되기를 바랄 뿐 미니멀리즘이  세계를 아끼는 다정한 안부가 되길 바랄 뿐이다.

@Tel aviv, Israel _weekdaytraveler

생택쥐 페리는 말했다. '완벽함이란  보탤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성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더는 뺄 것이 없어 완성된 완벽한 두 개의 가방만 들고 여행을 떠난다. 각자 스무 가지 남짓의 물건만 담긴 작은 프라이탁 가방이 여행에 필요한 전부다. 짐을 가방에 넣고 새로운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데 필요한 시간은 1분. <배낭 없이 배낭여행> 첫 여행지, 이스라엘로 가기 위한 준비시간은 딱 1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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