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금 더 가볍게 여행할 수 없을까?
시작은 프라하에서
지난해 가을쯤 우리는 프라하를 여행 중이었다. 여행 내내 나의 표정은 산타의 비밀을 알아버린 일곱 살 꼬마처럼 뚱- 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싶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프라하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던 도시 중 하나였다. SNS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까를교 사진과 비슷한 방식으로 보정된 달달한 색감의 프라하 전경에 이미 백기를 든 상태였기 때문이다.
프라하 어디를 가던 이미 수백 번도 더 본 듯한 기시감이 우리를 엄습했다. 가지 않은 곳 구석구석까지 이미 프라하를 훤히 내다보는 기분이었다.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오늘은 얼마나 시시한 것인지 시간여행자의 마음을 헤아릴 지경에 다 달았다. 게다가 여행자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과 특히 많은 한국사람들로 작은 도시가 온통 정체 중이었다. 예쁘게 차려입은 여행객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사진을 찍는 통에 까를교는 을지로처럼 줄줄이 밀렸고 운치 있는 구도심은 단풍보다 화려한 색의 등산복을 빼입은 어머니 단체 관광객들로 북적여 여기가 프라하인지 북한산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나의 삐딱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프라하는 유달리 낭만적이고 별스럽게 아기자기했다. 햇살에 반짝이는 도시의 붉은 지붕과 오래된 다리 위에서 울려 퍼지는 보헤미안의 음악, 중세시대를 담은 100여 개의 탑까지 유럽의 여러 도시 중 가장 어여쁜 풍경임에 틀림없었다. 오그라드는 대사를 팍팍 날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올드타운의 사랑스러운 풍경이 그 어떤 로맨틱 영화도 실패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프라하는 누구나의 연애사처럼 예쁘고 달달했다. 우리는 그 아기자기한 여행지에서 한 편의 영화처럼 우연히 두 명의 여행자와 동행하게 되었다. 프라하 구시가지의 한 카페에서 만난 우리는, 얇은 반죽으로 둘둘 말려 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프라하의 빵 뜨르들로의 맛이 과대평가되었다는 데 공감하며 금세 가까워졌다.
두 명의 여행자는 자신들 역시 비엔나에서 만난 동행이라고 했다. 우리는 예쁜 여행객들 사이를 배회하며 코젤 생맥주를 물처럼 마시고 해 질 녘 페트리진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며칠을 함께 보냈다. 일정이 달라 서로 다른 곳으로 헤어져야 하던 마지막 날, 우리는 각자의 배낭을 메고 프라하의 터미널에서 다시 만났다. 그날 그 터미널이 앞으로 우리 여행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한 채, 그토록 관심 없던 프라하에 온 것이 운명처럼 느껴지는 순간을 만나리라곤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너 도라에몽은 아니지?
터미널에서 다시 만난 두 여행자는 자기 몸 만한 크기의 배낭을 자신 대신 의자에 앉혀둔 채로 우리를 맞았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낭이었다. 그들의 배낭은 마치 도라에몽 같았다. 주머니 안에 세상 만물을 담고 사는 만화 주인공, 도라에몽 말이다. 최고급 침낭과 텐트는 기본으로 들어있고 우리 동네의 작은 약국을 방불케 하는 상비약 종합 세트와 금방이라도 깊은 맛의 사천 짬뽕을 끓여낼 듯한 번듯한 요리 도구와 언제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에 한 벌씩 챙겨 왔다는 남극 탐사용 방한복까지! 거기에 100매+100매에 1유로 밖에 안 해서 샀다는 가성비 최고, 부피 최고의 물티슈까지 나왔을 때 우리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내 모습이 저렇구나.’ 거대한 배낭이 머리 위로 쏟아져 물건들이 비처럼 머리를 때렸다.
두 여행자와 헤어지고 난 후 우리는 말없이 터미널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우리의 이 커다란 배낭에는 과연 무엇이 들었을까? 우리는 지난 여행 동안 이 중에 얼마나 많은 물건들을 사용했을까?' 산으로 들로 백패킹을 하러 온 것도 아닌데 무슨 짐이 이리도 많은지, 온갖 비상약 중 실제로 사용한 것은 두통약과 밴드 약간 뿐이고 엄청난 무게를 자랑하는 블루투스 스피커는 사용법 마저 잊어버렸고 혹시 몰라 챙긴 여벌 티셔츠 중 한 번도 입지 않는 것도 있었다. 여행의 분명한 목적 없이 남들이 정한 무수한 조건들과 변수에 맞춰 온갖 짐들을 챙겨놓은 것이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히는
_ 우리 이 많은 걸 다 왜 가져온 거야? 이 스피커 진짜 왜 가져왔어? 얼마나 크게 음악을 들으려고? 심지어 어떻게 켜는 건지도 까먹었어. 소름.
_ 달팽이처럼 산다더니. 진짜 집을 이고 다닌 꼴이잖아. 비유가 아니었어. 소오름.
_ 여행에 이 많은 게 전부 필요하진 않은데 말이야. 우리, 조금 더 가볍게 여행할 수 없을까?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실없이 웃었다. 이 커다란 배낭 때문에 불편했던 순간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끔찍한 무게 때문에 이동에 많은 제약이 있었고 비행기를 이용할 때도 수화물을 추가하다 보니 비용 역시 배가 되었다.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숙소를 구하고 배낭을 먼저 옮겨야 했기 때문에 여행하는 날보다 이동하는 날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수많은 짐과 잡동사니로 가득 찬 집을 처분하면서 그렇게 자유롭기를 꿈꾸었는데 여행에 와서도 짐에 발목 잡히는 일상은 변하지 않은 셈이다.
우리는 배낭에 있는 물건들을 전부 꺼냈다. 그리고 오늘,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것만 남기고 하나 둘 물건들을 제외시켜 보았다. 그렇게 배낭에서 제외된 물건들의 대부분은 미래의 어떤 순간을 위한 대비책이었다. 있을지 없을지 모를 위험이나 필요에 대비해 이 무거운 배낭을 지고 오늘도 힘에 부치는 걸음을 옮겨왔던 것이다. 여행을 하고 있었지만, 미래의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 오늘도 야근을 마다치 않고 열심히 돈 벌어 보험료를 내던 지난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배낭을 정리하며 우리가 지난 1년 동안 몇 개월 뒤에 혹시나 필요할지도 모를 불필요한 잡동사니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인정했다. 그리고 몇 개월 뒤의 위급한 순간이나 미래의 행복할지도 모르는 어떤 날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저당 잡히는 고리를 끊어내야겠다고 마침내 결심했다. 그래 우리 배낭을 없애보자!
배낭 없이 배낭여행
본래 배낭여행은 최소한의 차림과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용기 있는 자들의 여행을 뜻하는 게 아닌가? 돌이켜보면 진짜 배낭여행은 어떤 브랜드의 배낭을 메는지보다, 어떤 실용적인 물건을 챙겼는지보다 어떤 자세로,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가 늘 더 중요하고 재밌는 부분이었다.
최소한의 짐만 추려 떠나는 새로운 여행, 배낭 없이 떠나는 배낭여행, 적은 짐과 가벼운 가방이 우리에게 선물할 그 여행이 무척 기대된다. 장석주 시인의 책 '철학자의 사물들'에는 여행가방에 대한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여행가방을 꾸리다가 드러난 내 욕망의 던적스러움에 부끄러워진다. 여행 가방 안에는 덜어내고 남는 최소한도의 물건들만 남는다. 그 간소함이 곧 삶의 복잡함을 이기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할 것이다.' 시인의 구절을 마음속 깊이 담으며, 우리 여행과 삶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해보고자 더 적게, 더 의미 있게 여행을 떠나보려고 한다.
_ 그런데 우리, 뭐부터 챙겨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