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없을 때까지 해보자, 이 여행 병자야!
아무래도 병세가 심각하다. 날로 악화되는 증세에 명약도 소용이 없다. 어느 날은 동네를 베를린 어디쯤으로 착각하고 슈퍼에서 독어로 얼마냐 물었다가 슈퍼 아주머니께 등짝 스매싱을 맞았고(아야- 아파요, 아줌마), 동전 지갑에 유로 동전과 태국 동전을 잔뜩 넣어 들고 나갔다가 울면서 돌아왔다. (살 수 있는 게 없어요. 응, 아니야. 여기 유럽 아니야. 태국도 아니야.)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는 여행 중 늘 입고 다니던 옷을 주워 입고 짐을 꾸려 공항으로 간다.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 틈에 한참 앉아있다가, 지나가는 외국 여행자를 붙잡고 수다를 떤다. 그러다 몇 시 비행기를 타느냐 물으면, 나는 마법이 풀린 호박마차처럼 푹 퍼져버린다.
다들 잘 살고 있는 건가? 돌아온 여행자들은 모두 무탈한가? 긴 여행은 주유소처럼 가뿐히 들르고, 다들 충전된 마음으로 쾌속 질주 중인가? 나만 여행의 후유증으로 길바닥에 퍼져버린 건가?
세상이라도 구할 줄 알았던 2년 간의 여행이 냄비 받침용 독립출판물과 통장의 마이너스 부호가 되어 내 뒤통수를 후려치다니.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여행도 끝났고, 글 쓰기도 물 건너갔는데 앞으론 어떻게 살아야 하지?
길 잃은 애처럼 울먹이며 결국 K를 불러냈다. 바쁜 사람을 불러내, 망한 책 이야기와 여행 후유증에 대해 주절주절 널어놓긴 싫었지만 지금 그 애를 만나지 않으면 심리상담사나 의사에게 가야 할 심각한 상태였다. 심각한 여행 우울증에 놓인 상태이니, 익숙한 농담과 여행의 추억을 꼭 처방받아야 했다.
오랜만에 만난 K에게 익숙한 여행의 정서를 털어놓았다. 런던 펍에서 술에 잔뜩 취한 나를 업고 숙소까지 걸어온 K의 튼튼한 두 다리와 프라하 야경을 보며 저녁을 먹다가 여권과 여행경비가 몽땅 든 가방을 두고 왔던 어느 밤, 해지는 바다를 보기 위해 매일 열심히 밟던 녹슨 자전거의 페달까지, 나는 미친 사람처럼 여행에 대해 중얼거렸다. K에게 처방받은 익숙한 농담과 여행의 추억을 약처럼 꼭꼭 씹어 삼키니,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K는 언제나 ‘나를 나로’ 존재하게 했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딱 지금의 내 모습을 지킬 수 있도록 응원해주었다. 내가 구름을 먹어치우며 들떠 돌아다닐 때도, 해저 탐험하듯 땅굴을 파고 들어가 주저앉아 있을 때도, 내 안의 무언가가 변하지 않도록 긴 여행 내내 나를 똑바로 봐주었다.
때로는 심리상담사가 되어, 대부분은 조련사가 되어 날뛰는 나를 잡아주었다. 여태까진 그게 고마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발전이 없는 거다. 내 인생이 망한 건 전부 K 때문이다. (다시 병이 도지는 중이다)
꼬박 2년을 함께 여행하며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멍청인데, K는 달랐다. 여행하는 동안 온라인으로 꾸준히 무언갈 공부하더니, 결국엔 대학원에 붙었다. 난 2년을 몽땅 여행에 올인했는데, 이 자식은 슬쩍 딴 주머니를 찬 거다. 내가 만든 책은 적자를 면치 못해 냄비 받침이 되어버렸는데, 넌 대학원에 합격했다고? 그 애가 나를 앞질러 멀리멀리 나아가고 있다.
나_ 인생이 망해가고 있어. 넌 멀쩡한데 왜 나만 망하는 거야. 왜! 나만. 세상은 멀쩡히 흘러가는데 나만 멈춰 있는 기분이라고.
K_ 기분 탓이야.
나_ 기권이야. 나 대신 흰 수건 좀 링 위에 던져줘. 그건 차마 못 보겠다. 대신 마지막 회심의 어퍼컷을 날리자. 최후의 결정적 한 발은 꽂아주고 링 밖으로 나가자.
K_ 그래! 할 수 없을 때까지 해보자, 이 여행 병자야. (웃음)
통장에 과자 부스러기처럼 남은 돈을 탈탈 털었다. 최후의 순간에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숨겨놓았던 월세방 보증금까지 끌어 모았다. 올인이다. 클릭 몇 번으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 티켓을 결제했다.
토막 난 통장 잔고를 확인하며 대체 왜 이런 미친 짓을 했을까 생각해보았다. 떠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깡통이 되어버렸기 때문일까? 지독한 여행 후유증에 나가떨어진 여행 병자이기 때문일까?
모든 사람이 열병처럼 여행의 끝을 앓지 않는다. K처럼 여행이 끝나고 비로소 자기만의 신세계를 창조하는 근사한 사람들도 있다. 대체 나의 어디가 고장 나 버린 걸까? 다시 짐을 싸려니 K에게 미안해졌다. 그 애를 다시 여행의 수렁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어딘가 부서진 내가 주치의도 없이 여행을 떠날 수는 없었다. 머리 위로 차가운 물을 부어줄 코치 없이 링에 설 수는 없었다. 망가진 나의 세계를 재건하는데 K의 도움이 간절했다. 링 위에 흰 수건을 던지는 대신, K는 나의 글러브를 단단히 고쳐주었다. 그리고 끝까지 가보자고, 할 수 없을 때까지 여행을 해보자며 내 주먹을 힘을 실어주었다.
고쳐 잡은 글러브를 팡팡 맞부딪혀본다. 한 달간의 미국 여행이 끝나면 통장잔고는 완벽한 제로에 수렴할 것이다. 완벽한 빈털터리라고 생각하니 묘하게 기운이 났다. 여행이 끝나고 150일 간 두들겨 맞아 넉다운이 되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를 비웃는 세상이란 놈의 턱에 빠르고 정확한 훅을 꽂아 넣은 기분이다.
물론 그 녀석은 쓰러지지 않고 나를 향해 걸어올 테지만 이젠 더 잃을 것도 없다. 완전한 빈털터리에다, 이미 죽도록 맞아서 몸에 감각도 없다. 그래. 나 빈털터리 미친놈이다! 덤벼라! 냄비받침으로도 끄떡없는 책을 퍽퍽 날려줄 테니! 그래. 난 또 여행 간다! 끝난 줄 알았지?
*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여행이 나한테 이럴 수가] 출간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