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오일여행자 May 29. 2018

불행하게, 오래오래

어쩌다 한번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야

서울이다. 2년 만이다. 얼만큼의 시간이 흐른 걸까? 휴대폰 약정 기간이 진작에 끝났고, 동생이 살던 원룸의 계약 기간도 끝이 났다. 옹알이만 겨우 하던 조카는 네이티브 스피커가 다 됐고, 함께 직장을 다니던 동료는 초고속 승진으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결혼을 했거나 할 예정이다.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그럴 나이가 되었다. 잠깐 우주선을 나갔다 돌아왔을 뿐인데, 우주선 안의 동료가 10년 정도 나이를 먹어버린 어느 행성의 중력이 내게도 적용된 것 같다.

@Prague, Czech  _weekdaytraveler

2년 만에 돌아온 서울. 더욱 쿨하고 힙해진 서울러들 틈에서 변함없는 건 무릎 나온 바지를 입은, 몹시나 궁상스러운 차림의 나뿐이다. 행여 옆사람에 뒤쳐질까 무섭게 앞으로 달려 나가는 사람들이 거침없는 경주마처럼 보인다. 


_ 역시 서울에는 오는 게 아니었는데! 자고로 친구의 결혼식에는 핑계를 대고 봐야 하는 건데!


결혼식장에 도착하기 전에 부디 세상이 망해준다면 좋겠다. 그렇다면 여행이 끝나고 망하지 않는 세상을 조금 용서해줄 요량이다. 이 정도 염불을 외면 한 번쯤 망해줄 만도 한데, 날씨마저 끝내주게 좋다. 젠장.

@San francisco, US _weekdaytraveler

살가운 가을 햇살이 10월의 예식장 앞에 와르르 쏟아졌다. 따뜻한 날씨였고 축복받은 날이었다. 화려하고 큼직한 꽃들로 장식된 결혼식장은 모퉁이마다 풍요가 느껴졌다. 이곳에 발 들인 누구에게도 야근의 피로나 밀린 카드값, 골머리를 앓게 하는 가족의 존재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의 앞날에도 전세 대출과 각종 융자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그들의 설레는 표정에서 나는 오래전 여행을 막 떠날 때의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나 _ 자, 게임을 시작하지. 나에 대해 들은 소문들을 하나씩 이야기해봐.

친구A_ 2년 놀았다고 들었지. 여행 갔다 왔다며.


나 _ 놀았..지? 깨달음의 여정이라고 해두지. 다음?

친구B_ 깨달음 좋아하네. 실컷 놀다가 지금은 어디 시골에서 유배 중이라던데?


나 _ 셀프 유배야. 선비적 삶. 안빈낙도, 안분지족. 다음?

친구C_ 그래서 요즘엔 뭐해? 우리 팀에 그만둔다는 사람 있는데 관심 있어?


나 _ 밤엔 자전거 타고, 낮엔 글을 쓰지. 그게 지금의 내 일이야. 다음?

친구D_ 딱 들어보니까, 너나 나나 망한 게 틀림없네.


새로 산 자동차를 끌고 왔다는 친구 앞에서 나는 자전거를 타고 글을 쓴다고 덤덤히 말했다. 몇 잔 마셔둔 소주가 효과를 발휘한 건가?


아니다. 고루 나눠가진 불행 때문이다. 여행이 끝나서 절망하는 나는 명함도 못 내밀만큼 다채로운 불행이 친구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고 있었다. 나보다 나은 삶을 누리는 친구들을 짐작하며 주눅 들던 내 모습이 소주처럼 썼다.

@Jeongseon, Korea _weekdaytraveler

A는 집 안의 빚더미와 엄마의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택했지만, 여전히 마음 편안한 생활은 아닌 모양이다. 자동차를 새로 뽑았다는데, 어째 표정은 차로 몇 대 맞은 모양이다.


B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진학한 학교에서 엄청난 중압감에 매일 아침 좌절한다고 했다. 아르바이트로 학자금 대출을 갚으며 '학자금 다음은 전세대출이겠지' 싶다고 한다. 그리고 이 빚 잔치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까 봐 두렵다고 했다.


C는 자신의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이 악물고 버텨야 하는 매일에 지쳐간다고 고백했다. 일에 인생을 걸었다, 곧 일에 인생을 빚진다고. D는, 그 애의 인생은 차마 쓸 수가 없다. 부디 그 애가 살아남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다 때려치우고 여행을 떠났다 완전히 망했지.

@Thessaloniki, Greece _weekdaytraveler

우리는 모두 인생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며, 마침내 이 삶을 완성하기 위해 각자의 선택을 했다. 내가 여행하는 이유도, 친구가 대학원에 가거나 결혼을 하는 이유도, 모두 삶이 달라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최후의 선택이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미완성인 이 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여행으로 혹은 결혼으로 우리 인생이 완성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른이 넘은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다. 더는 성장하지도, 더는 나아지지도 않은 인생의 정체기에서 어쩌면 결혼이나 여행이 생을 완전히 바꾸는, 그래서 비로소 달라질 수 있는 마지막 찬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결혼이나 여행으로 생을 완성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얼마나 절망하게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Thessaloniki, Greece _weekdaytraveler

엄마를 보고도 울지 않던 녀석이 우리가 앉은 자리에 와선 갑자기 눈물을 터뜨렸다. 열다섯, 그때도 우리는 시내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불행해서 울었다. 각자에게 덮쳐오는 고난의 쓰나미를 손을 잡고 발을 걸어 버텼지만 가끔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죽일 듯이 싸우는 부모를 피해 친구네 집 문을 쾅쾅 두드리면서, 추락하는 성적을 붙드느라 쩔쩔매다 마침내 포기하면서, 출발선이 다른 친구들이 부러운 마음을 숨기고 아르바이트를 나가면서 말이다. 서로 다른 삶의 진창에서 허우적대느라 1년에 한 번 만나기도 벅차지만, 우리가 여전히 친구인 이유다. 불행한 역사의 한 페이지에 함께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Lagos, Portugal _weekdaytraveler

우리는 열다섯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인생의 파도들을 넘고 있다. 어느 작가님의 말처럼, 우리가 몰아쳐오는 인생의 파도를 멋지게 잡아타는 서퍼라면 얼마나 좋을까?


여유롭고 유연하게 성난 파도를 넘고 싶지만, 우리는 미역처럼 들어붙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코로 들어간 바닷물을 풀어내기 바쁘다. 어쩐지 그때나 지금이나 삶이 우리에게만 고약하게 구는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선택하고 싶다. 몰아치는 파도를 우스운 폼으로 넘으며, 넘어지라고 발을 거는 삶의 장난을 위트 있게 받아치며, 포기하지 않고 무엇이든 선택하고 싶다.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고, 사랑하는 누군가와 새로운 삶을 선언하고, 일에 매달려 혹독한 직장생활을 버텨내며.


울고 있는 친구의 눈물을 닦아주며 축하한다고 짧게 속삭였다. 이건, 진심이다. 세상이 망하라고 매일 밤 올리는 기도만큼 간절하고 절절한. 저마다의 이유로 울고 있는 친구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어서 잔을 들라고 말하곤, 얼마 전 영화에서 본 대사를 마음을 다해 읊어주었다.


"어쩌다 한 번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야. 그러니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자. 그리고 또 만나자. 불행한 얼굴로, 가능하면 더 나은 인생으로."

_ 영화 <꿈의 제인> 중


*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여행이 나한테 이럴 수가] 출간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이전 03화 엄마, 나 왔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