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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오일여행자 May 17. 2018

엄마, 나 왔어

엄마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엄마와 마실 소주를 사러 동네 슈퍼에 들렀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같이 들르던 곳이었다. 퇴근하는 길에 들러 소주 한 병, 비 오는 오후에는 막걸리 하나, 술에 잔뜩 취한 여름밤에는 차가운 맥주 한 캔을 샀다. 그럴 때마다 슈퍼 아주머니는 집에 안주는 있냐고, 속 든든히 채운 후에 마시라고 무심히 한마디 건네고 말았다.

@Shizuoka, Japan _weekdaytraveler

기울어진 가게 선반, 어설프게 써붙여진 가격표까지 그대로다. 아주머니도 날 기억하고 계셨다. 오랜만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그저 오랜만이라며 웃으신다. 어쩐지 친했던 직장 동료를 만나는 것보다 편안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꼬치꼬치 묻지 않고, 그저 들고 나는 바람처럼, 피고 지는 꽃처럼 자연스럽게 나를 가게 안으로 들이셨다.


가끔 사람들이 나를 잡아주기보다 놓아주었으면 싶다. 소주 한 병 사갈 때나, 2년 동안 지구 어딘가를 방황하고 빈털터리로 돌아왔을 때나, 그저 나를 멀리멀리 흘려보내 주었으면 싶었다. 슈퍼 아주머니처럼.

@Jeju, Korea _weekdaytraveler

_ 엄마, 나 왔어.


달그락거리는 소주 두 병을 까만 비닐봉지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 늦게 도착한다고 그리 일렀는데, 역시나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내 나만 기다린 모양이다. 엄마와 나는 현관에 서서 서로를 안아주었다. 나 없이 외로웠을 엄마, 엄마 없이 서러웠던 나, 우리는 서로의 팔딱이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조금 안도했다.


짐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차려진 밥상에는 지난봄에 캐다가 얼려놓은 냉이가 올라와 있었다. 구수한 된장국을 한 술을 뜨니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와 나는 별말 없이 밥을 먹으며 소주를 마셨다.


내가 베를린에서 매일 들르던 공원이 원래는 공항이었다거나, 3박 4일 동안 텐트를 치며 춤을 추었던 벨기에 축제는 과연 찜통처럼 더웠다거나, 2년을 방랑하느라 돈은 다 써버렸고, 한국에 돌아는 왔지만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엄마에게 자백할 수는 없으니까.

@Grand Canyon National Park, US _weekdaytraveler

여행이 끝나고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엄마집 소파에서 무던히 읽고 썼다. 여행하는 동안 썼던 글을 책으로 내기 위해 생전 다룰 줄 몰랐던 프로그램도 열심히 만지작거렸다. 아무도 관심 없는 이야기를 책으로 낸다는 게 우스워서 매일 백 번씩 현타가 왔지만, 달리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시간은 아주 많으니까.


오늘 아침도 엄마는 범죄현장을 감식하는 전문가처럼 꼼꼼하게 소파 주변을 청소한다. 어제 먹고 찌그러뜨린 맥주캔 2개, 커피 자국이 눌어붙은 3개의 잔과 먹다 남은 빵, 펼쳐 놓은 책 몇 권과 도저히 풀 수 없게 꼬여버린 이어폰과 충전기 무덤. 담배꽁초와 시체가 없는 게 다행인 수준이다. 엄마의 잔소리에 피카소를 방패로 삼았다.


_ 엄마. 피카소 작업실이 얼마나 더럽고 지저분했는 줄 알아? 그런데 동료들은 그 무질서에서 피카소의 독특한 질서가 탄생하고, 어? 엄마? 그 너저분함에서 뭔가 기발한 게 떠오르는 거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_ 피카소가 다 뭐야. 너 뭘 또 쓰느라 그러는 거 다 알아. 그래도 좀 치우면서 해야지.


아무래도 엄마가 노트 속에 적어놓은 소설의 한 구절을 본 모양이다. 여행을 다녀와 재취업에 매진하는 대신 "어차피 별 볼 일 없는 인생, 그나마 좋아하는 걸 해보지 뭐. 그런다고 이번 생이 여기서 얼마나 더 망하겠어" 싶은 마음을 아무래도 엄마에게 들킨 것 같다.  

@Shizuoka, Japan _weekdaytraveler

머쓱하게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찬 아침 공기가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아르바이트를 해볼까 생각했다. 지난번에 만난 슈퍼 아주머니한테 일을 시켜달라고 할까. 할머니랑 쑥이며 나물을 뜯으러 다닐까.


아무래도 자전거로 할 수 있는 일이면 좋겠다. 밤공기를 마시며,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약간의 돈을 벌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학자금 대출금을 갚으려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던가. 빚 갚기 위한 게 아니라 글 쓰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인생이 지금처럼 막장으로 느껴지진 않을 것 같았다. 엄마에게도 덜 미안할 것 같고.


누군가 '요즘 뭐해?’라고 물으면 밤엔 자전거 타고, 낮엔 글을 쓴다고 답해야겠다. 베란다에 놓인 엄마의 화초들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나는 지금 온 세상을 무시 중이니까.

@Berlin, Germany _weekdaytraveler

엄마는 집을 나서기 전에 ‘글을 쓰는 거냐고, 그걸로 먹고살 수는 있냐’고 물었다. 나는 면접관의 질문에 답하듯, 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이젠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라, 그냥 뭐라도 해보는 거라고 말할 순 없었다.


엄마는 내 밥벌이 말고도 걱정할게 많으니까. 오늘 두고 나간 세탁물처럼 나 말고도 챙겨야 할 것들이 벅차게 많으니까. 그래도 엄마는 괜찮다고 말해주면 좋겠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애틋함을 느끼는 건 언제나 엄마니까. 엄마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말이 하나 더 늘었다.


_ 난 있잖아~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하늘땅만큼~ 달려라, 하니! (하니~) 이 세상 끝까지, (까지~) 달려라 하니! 엄마! 나는 달릴 거야! 열심히! (달려라 하니 버전)

_ (한숨) 엄마 나간다. 어지르지 좀 말고!  

_ 넵. 다녀오세욥!


*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여행이 나한테 이럴 수가] 출간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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