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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오일여행자 Apr 26. 2018

미안하지만 그건 불행이야

시속 80km의 삶과 시속 4km 삶

_ (갑자기 잠에서 깨며) 엄마야! 아... 맞다... 여행 끝났지 (머쓱)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잠에 들지만, 언제나 발작하듯 잠에서 깬다. 광고 속 한 장면처럼 아침 햇살에 아름답게 기지개를 켜면 좋겠지만, 늘 무언가 못 볼 꼴을 목격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깬다.


‘혹시 오늘 체크아웃이 아침 9시는 아니었나? 예매해 둔 비행기표가 있었는데 늦지 않았나?’ 


의심하며 벌떡 일어나지만, 결국 아무 일도 예정되지 않은 시시한 목요일일 뿐이다.

@Jeju, Korea _weekdaytraveler

놀랍게도 여행은 끝났다. 체크아웃 날짜를 신경 쓰며 잠들지 않아도 되고, 며칠 뒤의 숙소를 알아볼 필요도 없고, 장거리 이동에 대비해 알맞은 짐을 미리 꾸려놓지 않아도 된다. 신기하게도 여행은 끝난 지 몇 달이 넘었고, 오늘은 정말 시시한 목요일일 뿐이다. 허연의 시, <목요일>을 외운다.


"오늘은 목요일. 결국 오늘도 꿈이 피를 말린다. 그 꿈이 나한테 이럴 수가." 


그러니까요. 여행이 나한테 이럴 수가요.


여행이 끝난 요즘의 일상을 돌아보자면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차에서의 하루가 떠오른다. 2년 전 (엄마야2. 그게 벌써 2년 전이라고요?) 포드고리차는 예상보다 더 지루한 도시였지만, 나는 그곳에서 며칠을 더 머물렀다. 만나야 할 사람도, 봐야 할 것도, 해야 할 것도 없는 이  도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읽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London, UK _weekdaytraveler

호스텔 주인아저씨는 책이나 읽으러 한국이라는 그 먼 나라에서 몬테네그로까지 온 건지 당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문득 배낭 가득 읽을거리를 싸서 포드고리차로 몰려드는 배낭독서객들을 상상했다. 고요하고 지루한 이 도시에서 유일한 일과는 오직 읽는 것뿐이니까.


여행이 끝난 요즘의 일상을 돌아볼 때 포드고리차가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고요하고 지루한 여행 후의 일상에서 나의 유일한 일과는 오직 읽고 쓰는 것뿐이니까.


그러니까 대개 9시쯤 일어나 커피를 두 잔쯤 마시고 해 잘 드는 데 앉아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들은 짧게 메모를 하고 그러다 멈출 수 없으면 몇 시간이고 생각나는 것을 끄적인다. 짧은 문장이기도 하고, 긴 대화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부치는 편지이기도 하다.

@San francisco, US _weekdaytraveler

내게는 총 219권의 책이 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궁금해서 일일이 세어보았다. (그렇다. 시간이 남아돈다.) 2년 전 여행을 떠날 때 100권 정도를 처분한 상태다. 중고서점에 되팔거나 특별히 원하는 책이 있는 지인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별로 인기도 없고 대중적 재미도 크지 않은 책들만 남을 줄 알았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가 좋아하고 아끼던 책들만 남아서 조금 다행이었다. 예를 들면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나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같은. 똑같은 책은 없고, 여러 번 읽은 책은 있다.


여행이 끝난 지 한참 된 지금까지 책들을 뒤적이는 이유는 여행이 끝난 후의 일상을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여행 후의 삶을 어떻게 다르게 만들 수 있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답을 제시해주는 책은 역시 없다. 하긴 애초에 정답이 없으니, 그런 책이 없는 게 당연하지. 그래도 역시 책을 뒤적이는 걸 멈출 수 없다. 지금 내게는 읽고 쓰는 것만이 유일한 안전벨트니까.

@Málaga, Spain _weekdaytraveler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물어온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나는 솔직하게 답한다. 포드고리차에서 지내듯 책을 읽으며 산다고. 고요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유일한 일과는 오직 읽고 쓰는 것뿐이라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 읽고 싶은 만큼 읽고, 쓰고 싶은 만큼 쓴다고. 친구들은 반문한다.


_ 포드고리차가 대체 어디야?
_ 책 (따위나) 읽고 있다고? 돈은 안 벌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런다고 답하면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_ 그래, 뭐. 근데 좀 유치하잖아, 여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건 사춘기 때 끝나야 하지 않나? 미안하지만, 그건 좀 불행한 거야.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어떻게 먹고 살 거냐고.


시속 80킬로미터의 자동차 도로를 달려 나가는 친구들에게 시속 4킬로미터 산책로를 걷고 있는 나는 외계의 존재에 더 가까운 법이다. 하지만 유치한 사춘기를 이제껏 앓는 날더러 불행하다고 하면서도, 끝내는 미안한 표정으로 술을 따라주는 친구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여행이 끝난 후에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건 정말 불행일까?


*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여행이 나한테 이럴 수가] 출간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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