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여행자들은 모두 어디에 숨은 걸까?
_ 지옥에 돌아온 걸 축하한다! 소감이 어때?
_ 얼떨떨했는데, 웰컴 투 헬이라고 하니까 도망가고 싶어 졌어요. 방금.
_ 농담! 2년 가까이 여행했는데 어때? 뭘 느꼈어? 재취업은?
_ 글쎄요. 여행이 끝났는데도 세상은 멀쩡하다는 거?
승진했다고 제법 중간관리자의 포스를 풍기는 대학 선배를 2년 만에 만났다. 헤어진 애인에게 취중 문자를 보내고, 그 사람 전화를 기다리느라 대학 생활을 통째로 말아먹은 나를 잘 아는 인간 중 한 명이었다.
술 먹고 오열하던 내게 가지가지한다며 혀를 차고, 쓸데없는 데 시간 낭비한다며 나 망하라고 제사를 지내던 인간이다. 연애 상담도, 인생 상담도 매번 정곡을 찔러대는 통에 후배들 모두가 슬금슬금 피하던 그 냉혈한을 종로 술집 한복판에서 만나게 된 거다.
2년 간 여행을 해도 가본 곳보다 못 가본 도시들이 더 많을 만큼 넓은 게 세상인데, 왜 지금 이 시간, 이 공간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55위의 인간을 만나게 되는 걸까? 한국에 오자마자 인생이 시궁창으로 굴러 떨어지는 징조가 보인다, 보여.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로 여행의 소감을 물어오는 선배의 모습이 마치 머리 셋 달린 지옥의 문지기처럼 보였다. ‘그럼 그렇지. 네가 실패해서 여기로 돌아올 줄 내 진즉에 알았다’고 속삭이는 듯한 기분에 단테의 신곡이 떠올랐다. 여행이 끝나고 열린 지옥의 문에 이렇게 쓰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사람들은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2년 가까이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내게 아주 원대한 꿍꿍이가 있다고 착각한다. 남들은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거대한 수작을 세워서 세상이라도 구한 줄 아나보다. 그리곤 내가 무슨 점성술사라도 된다는 듯이 멋대로 자기 인생의 답을 내게 묻는다. 내가 우물쭈물거리며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면 '그것 봐. 내 그럴 줄 알았다’라며 슬쩍 비웃는다.
인생이 지옥문을 통과하게 된 건 우연히 아니라 운명이었나 보다. 여행이 끝났는데도 재수 없는 선배에게 당당하게 자랑할 새 인생도 없고, 사람들은 여전히 나 빼고 모두 열심히 살아가고, 집구석은 여전히 엉망이고, 여행이 끝났는데도 세상은 이렇게나 멀쩡하니 말이다.
정말 중요한 건 여행 이후의 삶이라고들 한다. 나 역시 여행이 끝나면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질 줄 알았다. 우리 모두 그런 걸 기대하고 긴 여행을 떠나는 거니까. 하지만 여행이 항상 인스타그램 피드처럼 화려하지 않듯, 여행 후의 삶도 누군가의 성공 스토리처럼 멋지지만은 않다.
여행으로 유명해져서 계속 여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 의외의 재능을 발견해 전혀 다른 진로의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 과감하게 사업에 도전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한 나라로 이민을 가거나 유학을 떠나는 사람. 그중 어느 것에도 포함되지 않는 나는 여행으로 삶이 바뀌었냐는 질문에 우물쭈물거리며 고개만 돌린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는 선배의 말에 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만다. 여행을 떠나기만 하면 인생이라는 양동이가 한 번에 뒤집어져 경기 역전에 성공할 것 같지만, 삶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도 세상이 망하지 않았다고요? 내 여행이 끝났는데도, 이 글을 다 썼는데도, 여전히 세상이 멀쩡하다고요? 그럼 전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죠?"
돌아온 여행자들은 모두 어디에 숨은 걸까? 화려한 여행 사진을 남기고 모두들 어디로 가버렸을까? 여행이 끝나도 아물지 않는 고민은 무얼 하며 견디는 걸까? 사실 모두들 일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나만 이러는 걸까?
여전히 모르겠다. 여행이 끝나고 진짜 삶이 달라지려면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당장 다음 달에는 친구의 결혼식 있다. 망했다. 여행이 끝나서, 비로소 인생이 망한 것 같다.
*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여행이 나한테 이럴 수가] 출간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