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80km의 삶과 시속 4km 삶
_ (갑자기 잠에서 깨며) 엄마야! 아... 맞다... 여행 끝났지 (머쓱)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잠에 들지만, 언제나 발작하듯 잠에서 깬다. 광고 속 한 장면처럼 아침 햇살에 아름답게 기지개를 켜면 좋겠지만, 늘 무언가 못 볼 꼴을 목격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깬다.
‘혹시 오늘 체크아웃이 아침 9시는 아니었나? 예매해 둔 비행기표가 있었는데 늦지 않았나?’
의심하며 벌떡 일어나지만, 결국 아무 일도 예정되지 않은 시시한 목요일일 뿐이다.
놀랍게도 여행은 끝났다. 체크아웃 날짜를 신경 쓰며 잠들지 않아도 되고, 며칠 뒤의 숙소를 알아볼 필요도 없고, 장거리 이동에 대비해 알맞은 짐을 미리 꾸려놓지 않아도 된다. 신기하게도 여행은 끝난 지 몇 달이 넘었고, 오늘은 정말 시시한 목요일일 뿐이다. 허연의 시, <목요일>을 외운다.
"오늘은 목요일. 결국 오늘도 꿈이 피를 말린다. 그 꿈이 나한테 이럴 수가."
그러니까요. 여행이 나한테 이럴 수가요.
여행이 끝난 요즘의 일상을 돌아보자면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차에서의 하루가 떠오른다. 2년 전 (엄마야2. 그게 벌써 2년 전이라고요?) 포드고리차는 예상보다 더 지루한 도시였지만, 나는 그곳에서 며칠을 더 머물렀다. 만나야 할 사람도, 봐야 할 것도, 해야 할 것도 없는 이 도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읽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호스텔 주인아저씨는 책이나 읽으러 한국이라는 그 먼 나라에서 몬테네그로까지 온 건지 당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문득 배낭 가득 읽을거리를 싸서 포드고리차로 몰려드는 배낭독서객들을 상상했다. 고요하고 지루한 이 도시에서 유일한 일과는 오직 읽는 것뿐이니까.
여행이 끝난 요즘의 일상을 돌아볼 때 포드고리차가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고요하고 지루한 여행 후의 일상에서 나의 유일한 일과는 오직 읽고 쓰는 것뿐이니까.
그러니까 대개 9시쯤 일어나 커피를 두 잔쯤 마시고 해 잘 드는 데 앉아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들은 짧게 메모를 하고 그러다 멈출 수 없으면 몇 시간이고 생각나는 것을 끄적인다. 짧은 문장이기도 하고, 긴 대화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부치는 편지이기도 하다.
내게는 총 219권의 책이 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궁금해서 일일이 세어보았다. (그렇다. 시간이 남아돈다.) 2년 전 여행을 떠날 때 100권 정도를 처분한 상태다. 중고서점에 되팔거나 특별히 원하는 책이 있는 지인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별로 인기도 없고 대중적 재미도 크지 않은 책들만 남을 줄 알았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가 좋아하고 아끼던 책들만 남아서 조금 다행이었다. 예를 들면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나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같은. 똑같은 책은 없고, 여러 번 읽은 책은 있다.
여행이 끝난 지 한참 된 지금까지 책들을 뒤적이는 이유는 여행이 끝난 후의 일상을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여행 후의 삶을 어떻게 다르게 만들 수 있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답을 제시해주는 책은 역시 없다. 하긴 애초에 정답이 없으니, 그런 책이 없는 게 당연하지. 그래도 역시 책을 뒤적이는 걸 멈출 수 없다. 지금 내게는 읽고 쓰는 것만이 유일한 안전벨트니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물어온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나는 솔직하게 답한다. 포드고리차에서 지내듯 책을 읽으며 산다고. 고요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유일한 일과는 오직 읽고 쓰는 것뿐이라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 읽고 싶은 만큼 읽고, 쓰고 싶은 만큼 쓴다고. 친구들은 반문한다.
_ 포드고리차가 대체 어디야?
_ 책 (따위나) 읽고 있다고? 돈은 안 벌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런다고 답하면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_ 그래, 뭐. 근데 좀 유치하잖아, 여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건 사춘기 때 끝나야 하지 않나? 미안하지만, 그건 좀 불행한 거야.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어떻게 먹고 살 거냐고.
시속 80킬로미터의 자동차 도로를 달려 나가는 친구들에게 시속 4킬로미터 산책로를 걷고 있는 나는 외계의 존재에 더 가까운 법이다. 하지만 유치한 사춘기를 이제껏 앓는 날더러 불행하다고 하면서도, 끝내는 미안한 표정으로 술을 따라주는 친구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여행이 끝난 후에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건 정말 불행일까?
*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여행이 나한테 이럴 수가] 출간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