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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끝났는데 세상은 멀쩡해요
by 주오일여행자 Apr 11. 2018

여행이 끝났는데도
세상은 멀쩡한 거 있죠

_ 그래, 지옥에 돌아온 걸 축하한다! 소감이 어때? 

_ 뭐, 얼떨떨했는데, ‘웰컴 투 헬-’이라고 하시니까 도망가고 싶어 졌어요, 방금. 

_ 하하. 농담이지! 그래서 2년 가까이 여행했는데 어때? 뭘 느꼈니? 취업은 언제 할 거야?

_ 글쎄요. 여행이 끝났는데도 세상이 멀쩡하다는 거? 


승진을 했다고 제법 중간관리자의 포스를 풍기는 대학 선배를 2년 만에 만났다. 헤어진 애인에게 취중 문자를 보내고, 그 사람의 전화를 기다리느라 대학 생활을 통째로 말아먹은 나를 잘 아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술 먹고 오열하던 내게 가지가지한다며 혀를 차고, 쓸데없는 데 시간 낭비나 하고 다닌다며, 나 망하라고 제사를 지내던 인간이었다. 연애 상담도, 인생 상담도 매번 정곡을 찔러대는 통에 후배들 모두가 슬금슬금 피하던 그 냉혈한을, 내가 한국에 돌아가서 꼭 만나고 싶은 사람 목록에는 끼지도 않던 그 인간을, 다른 친구들을 만나던 종로 술집 한복판에서 만나게 된 거다. 2년 간 여행을 해도 가본 곳보다 못 가본 도시들이 더 많을 만큼 넓은 게 세상인데 왜 지금 이 시간, 이 공간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55위의 인간을 만나게 되는 걸까? 한국에 오자마자 인생이 시궁창으로 굴러 떨어지는 징조가 보인다, 보여. 

@Tallinn, Estonia _weekdaytraveler

시끌벅적한 종로의 술집에는 적당히 취기가 오른 이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잔 부딪히는 소리와 찰랑이는 술 향기, 바닥에 떨어진 숟가락들이 발에 차였다.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로 내게 여행의 소감을 물어오는 그 선배의 모습이 마치 머리 셋 달린 지옥의 문지기처럼 보였다. ‘그럼 그렇지. 네가 실패해서 여기로 돌아올 줄 내 진즉에 알았다’고 속사이는 듯한 기분에 단테의 신곡이 떠올랐다. 여행이 끝나고 열린 지옥의 문에 이렇게 쓰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London, UK _weekdaytraveler

지옥문의 주문을 외며 나는 내 앞에 놓인 소주를 단숨에 마셨다. 달리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외딴섬에서 10년을 혼자 살았다 해도 그 선배와는 말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빈 술잔을 내려놓자마자 그 선배는 재취업을 해야 하니 힘들겠다며 술을 한 잔 더 따랐다. 그리곤 얼마 전에 승진을 해서 일도 바쁘고 괴롭지만 월급이 올라 만족스럽다며 자부심 가득한 미소를 만면에 재생시켰다. 나는 두 번째 잔도 거침없이 들이키곤 친구들이 기다린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친구들과 서둘러 자리를 파하고 술집을 나서기로 했다. 술집을 나가는 길에 아까보다 잔뜩 술이 오른 볼 빨간 선배에게 영원한 작별 인사를 했다.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고 속삭였는데 술에 취해 듣지 못한 것 같다. 

@Berlin,  Germany _weekdaytraveler

사람들은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2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내게 아주 원대한 꿍꿍이가 있다고 착각한다. 남들은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거대한 수작을 세워서 세상이라도 구할 줄 아나보다. 그리곤 내가 무슨 점성술사라도 되는 듯이 멋대로 자기 인생의 답을 내게 묻는다. 내가 우물쭈물거리며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면 '그것 봐. 내 그럴 줄 알았다’라며 슬쩍 비웃는다. 인생이 지옥문을 통과하게 된 건 우연히 아니라 운명이었나 보다. 여행이 끝났는데도 재수 없는 선배에게 당당하게 자랑할 새 인생도 없고, 사람들은 여전히 나 빼고 모두 열심히 살아가고, 집구석은 여전히 엉망이고, 여행이 끝났는데도 세상은 이렇게나 멀쩡하니 말이다.


_ 여기 천국이야? 

@krka national park, Croatia _weekdaytraveler

나도 천국에 머물던 때가 있었다. 저절로 파라다이스가 떠오르는 풍경의 크로아티아의 크르카 국립공원이었다. 투명한 초록빛 물과 그 아래 또렷이 보이는 신비한 모양의 바위들, 그 속으로 풍덩풍덩 뛰어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의 풍경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듯했다. 믿을 수 없도록 맑고 투명한 강물은 물고기의 비늘까지 훔쳐볼 수 있을 만큼 맑았다. 물결이 잔잔한 웅덩이에 낮잠을 자는 물고기들의 표정을 보고 있자면, 여기가 물속인지, 물 밖인지 혼란스러워진다. 물고기 바로 옆에서 함께 헤엄을 치면 문득, 내게도 미끌 거리는 비늘이 돋아날 것만 같다. 아주 커다란 어항 안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아니, 이곳이 천국이니 영영 머물고 싶은 마음이었다.

@krka national park, Croatia _weekdaytraveler

그 천국 같은 공간에서 우리는, 방학마다 한 달씩 여행을 다닌다던 초등학교 선생님을 만났다. 우리 또래였던 그녀는 작년에는 스페인을, 재작년에는 몽골을 여행했다며 방학이 있어 참 좋다고 말했다. 과연 천국 같은 크르카와 어울리는 삶이었다. 나는 대체 선생님이 될 생각도 하지 않고 뭐 했을까? 그녀의 말을 들으며 모든 인간은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나는 선생님이란 직업을 가지지 못한 죄로 이렇게 여행이 끝나자마자 지옥의 낭떠러지를 구르게 된 게 아닐까?  

@Sevilla, Spain _weekdaytraveler

그녀는 스스로의 삶에 매우 만족했다. (그럴 만하다. 천국에 살고 있으니까) 매년 2주에서 한 달 정도의 여행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8개월 넘게 여행 중이고 앞으로 쭉 여행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나의 말은 미안하지만 틀렸다고도 했다. 모든 여행은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다고. 끝이 없는 여행은 있을 수 없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여행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일이라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동의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가능하면 여행이 끝나지 않았으면 바랐던 쪽이니까.   

@Vienna, Austria _weekdaytraveler

어느 정신 나간 부자가 몰래 내 통장에 동그라미가 아홉 개쯤 붙은 금액을 송금해 놓고 평생을 모르고 산다면, 우연히 찍어 넣은 로또 번호가 신의 생년월일과 같아 1등에 당첨된다면, 내가 쓴 책이 밀리언셀러가 되거나 심심해서 올린 동영상 조회수가 천만이 넘어 가만히 있어도 돈이 저절로 날 따라온다면, 행여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당연히 평생 여행이나 하며 살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여행만 할 작정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여행이 영원한 삶은 절대 지루할 리가 없다. 장담한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애당초 실현될 수가 없기에, 우리의 여행은 언젠가, 끝이 나야만 한다. 역시, 선생님이 되어 내내 천국에 머무는 건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게 아니다. 여행은 끝났고 나는 마침내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Broom, Australia _weekdaytraveler

정말 중요한 건 여행 이후의 삶이라고들 한다. 나 역시 여행이 끝나면 여행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질 줄만 알았다. 우리 모두 그런 걸 기대하고 긴 여행을 떠나는 거니까. 하지만 여행이 항상 인스타그램 피드처럼 화려하지 않듯, 여행 후의 삶도 누군가의 성공 스토리처럼 그렇게 멋지지만은 않다. 여행으로 유명해져서 계속 여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 의외의 재능을 발견해 전혀 다른 진로의 직업을 선택하게 된 사람, 과감하게 사업에 도전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한 나라로 이민을 가거나 유학을 떠나는 사람. 그중 어느 것에도 포함되지 않는 나는 여행으로 삶이 바뀌었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우물쭈물거리며 고개만 돌리고 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는 선배의 말에 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여행을 떠나기만 하면 인생이라는 양동이가 한 번에 뒤집어져 경기 역전에 성공할 것 같지만, 삶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여행의 끝은 지옥의 문에 더 가까운 법이니까.  

@Las vegas, US _weekdaytraveler

_ 그래서, 아직도 세상이 망하지 않았다고요? 내 여행이 끝났는데도, 이 글을 다 썼는데도, 여전히 세상이 멀쩡하다고요? 그럼 전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죠? 


여행을 다녀온 여행자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 화려한 여행 사진을 남기고 모두들 어디로 가버렸을까? 여행이 끝나도 아물지 않는 이 고민을 다들 무얼 하며 견디고 있는 걸까? 사실 모두들 일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나만 이리 사는 걸까? 나는 오늘도 견디고 있다. 여행이 끝난 뒤 나의 일상에서, 나의 삶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다시 무감각한 생활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여행 전과는 다른 하루를 만들기 위해 (별 성과는 없지만) 애쓰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어느 날 우연히 엄청난 인생의 깨달음을 얻게 되지도 않았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행이 끝나고 진짜 삶이 달라지려면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이다. 큰일이다. 그리고 당장 다음 달에는 친구의 결혼식 있다. 망했다. 여행이 끝나서, 비로소 인생이 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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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고 글을 쓰며 도처에서 사는 걸 배우고 있다. 여행에세이 <여행을 떠나야해, 서른이 되었을땐>,  <배낭없이 배낭여행>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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