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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오일여행자 Jul 10. 2018

지금은 밤이고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의 혼란한 별이니까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비 오는 캠핑장에서 단단히 자리를 정비하는 사람과 비 맞으며 술이나 마시는 사람. 대게 전자가 세상을 이끄는 편이고, 후자는 열차 꼬리칸에서 싸움이나 하는 축이다. 내일을 주시하며 사는 사람과 어제를 흘깃거리며 사는 사람 사이. 나는 어디 있냐고? 애석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후자다.

@Jeongseon, Korea _weekdaytraveler

그 여름 캠핑장에는 운무가 가득한 산 중턱부터 비가 내렸다. 멀리 내다 보이는 백운산 등성이 뒤로 이름이 없어 더 근사한 산맥들이 어깨를 걸고 파도 마냥 일렁였다. 부서지는 거품처럼 희끄무레하게 걸린 운무가 고요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날 밤 세상을 쓸어버리기로 작정한 것처럼 여름 비가 쏟아졌다. 비가 굵어질수록 캠핑장 안의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컴컴한 빗속에서 바람과 사투를 벌이며 텐트를 재정비하기 위함이다. 아이들은 엄마를 도와 자리 주변으로 좁게 배수로를 냈고, 몇 사람은 비바람에도 텐트가 흔들리지 않도록 같은 자리에 수십 번 망치질을 했다.

@Jeongseon, Korea _weekdaytraveler

나? 홀딱 젖은 텐트는 애초에 내팽개쳐 버렸다. 그리곤 빗소리가 듣기 좋다며 찢어진 우비를 뒤집어쓰고 자두를 넣은 뱅쇼를 마셨다.


통장을 탈탈 털어 다시 여행을 떠나는 마음 역시, 뱅쇼를 끓이던 그때와 같다. 지난 여행을 잊지 못한 채 과거만 흘깃거리며 사는 게 나니까. 애석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San francisco, US _weekdaytraveler

시차 적응 대실패로 K와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꼬박 하루를 깨어있었다. 24시간을 뜬 눈으로 지새운 채 워킹데드처럼 돌아다니는 데도 샌프란시스코는 화려하고 여유로웠다.


적당한 온도의 바닷바람과 언 몸을 녹이는 눈부신 12월의 햇살, 유유히 언덕을 흘러내리는 전차와 안갯속에서 위용을 드러내는 붉은 금문교,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항구의 바다사자와 풍요가 흘러넘치는 도심 속 스카이라인까지. 샌프란시스코는 완벽했다. 도시의 어떤 장면을 찍어도 곧 근사한 작품이 되었다. 발끝까지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모델을 찍는 기분이랄까.

@San francisco, US _weekdaytraveler

하지만 노랫소리로 가득 찬 버스가 노란 뮤니 앞에서 구걸하는 젊은이를 지나치던 순간, 여행은 순식간에 히치콕의 영화로 바뀌었다.


금문교를 건너며 탁 트인 풍경에 감명받는 대신 <현기증 Vertigo>의 주인공처럼 신경쇠약에 걸린 듯 어지러웠고, 노란 뮤니만 보면 머리에 꽃을 꽂으라는 <샌프란시스코 San Francisco>의 노래 대신 앨런 긴즈버그의 <울부짖음 Howl>이 귓가에 맴돌았다. 전쟁과 차별에 저항하며 시를 읊고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의 자리는 어쩐지 텅 비어있었다. 텅 자리에는 완벽한 도시의 프레임에 담길 수 없는 상처들만 무성했다.

@San francisco, US _weekdaytraveler

한참을 망설이다 ‘학교에 가고 싶다’는 대학생 앞에 섰다. 등록금을 구걸하는 친구의 허름한 차림새가 누군가에게 밤새 얻어터진 듯 기진맥진해 보였다. 주머니 속에 남은 돈 몇 달러를 만지작거리며 한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했다.


_ 너에게 돈을 주는 게, 진짜 너를 위한 건지 모르겠어.


*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여행이 나한테 이럴 수가] 출간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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