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면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 커다랗게 숫자 66이 쓰여있다. 새로운 삶을 찾아 황무지로 떠나던 이주민들과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를 찾아 무작정 여행을 떠났던 예술가들이 태어난 이천 마일의 길, 루트 66이다.
존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에서 이 길을 마더 로드 Mother road라 불렀다. 세상의 모든 길이 이 도로에서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여행이 이 길 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삶의 벼랑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영혼들의 고향, 여기 루트 66에서.
66번 도로의 일부 구간은 아직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캘리포니아 주를 떠나며 우리도 빼놓지 않고 66번 도로를 달렸다. 덜컹거리는 좁은 도로 위를 달리며 여전히 황무지인 누군가의 마음을 기억해본다. 창문을 열고 얼마쯤 달리다, K에게 말했다.
앞으로 누군가 고향을 묻거든, 모하비 사막의 66번 도로 어디쯤이라 대답하겠다고. 그리고 부탁했다. 언젠가 우리가 다른 길을 가거든, 네게 남은 내 영혼의 조각들은 모두 여기에 버려달라고. K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거야말로 최근 들어 내가 한 생각 중 가장 쓸모 있는 거라고.
로드트립의 최종 목적지, 그랜드 캐년을 향해 달렸다.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이 가까워질수록 창 밖의 풍경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온통 붉은 모래뿐이었던 황야를 지나, 노랗게 펼쳐진 평지의 양 떼를 몰아, 점점 우거지는 푸른 수풀을 건너, 마침내 아직 녹지 못한 눈이 쌓인 풍경을 만나게 되었다.
도착한 숙소의 마당에는 미처 자리를 뜨지 못한 눈송이들이 서늘한 처마 밑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마음에 쏙 드는 자리였다. 숙소 직원은 시설에 대한 몇 가지 주의사항과 근처에 둘러볼 만한 장소들을 추천해주었다. 그리고 시계를 보더니, 아직 늦지 않았으니 바로 일몰을 보러 가야 한다고 우리를 재촉했다.
일몰 보기가 좋다는 지점까지 서둘러 차를 몰았다. 주차장을 나와 조금 걸어 도착한 포인트에서 우리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 단층에 20억 년에 걸친 역동적인 지각 활동이 새겨져 있다는 것, 콜로라도 강의 급류가 만들어 낸 대협곡이 장장 400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협곡의 깊이가 무려 1,500미터에 달한다는 설명이 그저 무색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장대함이었으니까. 과연 ‘그랜드-캐년’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았으니까.
20억 년의 시간이 보기 좋은 주름처럼 새겨진, 위엄 있고 엄숙한 행성의 맨 얼굴이었다. 지구 상 어디에서도 감히 본 적이 없는 누군가 얼굴이었다. 조용히 저무는 햇볕이 행성의 나이테마다, 지구의 주름마다 차곡차곡 스몄다. 지구에 살고 있다면, 이 행성에 태어났다면, 반드시 한 번은 보아야 하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자, 이 거대한 자연의 일부인 것만으로도 하찮던 내 삶이 꽤 괜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내 존재의 이유로 삼아도 제법 근사할 것 같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언어로 감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이 풍경을,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온갖 시간의 굴곡과 비정의 협곡을 함께 넘어온 누군가, 멋진 주름이 살아온 역사를 증명하는 누군가와 말이다. 문득 할머니의 주름이 떠올랐다.
계단 모양의 단층에 차곡차곡 쌓인 세월이 꼭 지구의 주름처럼 보였기 때문일까? 켜켜이 쌓인 주름, 고된 세월이 담긴 단단한 표정. 그랜드 캐년과 할머니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여행 중 처음으로,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할머니와 함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담기지 않는 곳까지 뻗어나간 거대한 협곡 위에서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_ 여보세요?
나_ 할머니! 나야! 내 목소리 들려요?
*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여행이 나한테 이럴 수가] 출간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