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음 같은 우리가 포틀랜드에 모인 이유
포틀랜드는 적어도 반년은 비가 내리는 도시다. 특히 12월부터 5월까지는 거의 매일 비가 내린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니다. 12월의 마지막, 우리는 그렇게 비 내리는 포틀랜드에 도착했다.
도착한 포틀랜드는 비가 쏟아지는 쌀쌀한 날씨에도 꽤 따뜻하게 느껴졌다. 공항을 가득 채운 낮은 조도의 감색 조명 덕인지, 촌스럽지만 직접 만들어 정감 있는 환영 문구와 알록달록한 풍성을 한 아름 든 채 사랑하는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들 덕인지, 마음의 온도는 한껏 높았다. 두꺼운 점퍼와 털모자, 비바람에도 끄떡없을 워커를 단단히 고쳐 신는 포틀랜드 사람들 틈에 섞여 우리도 버스에 올랐다.
K와 나는 시내의 한 정류장에 내려 느긋하게 도심을 걸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찬 비를 맞으며 걷다, 한 상점 유리창에 붙은 새해 인사를 보았다. "New year, New president" 상점 앞을 지나는 사람들 대부분 무심한 듯하면서도, 농담 섞인 문구를 보며 함께 웃어준다.
미국에서 가장 자유롭고, 그 무엇으로부터도 안전하다는 도시다웠다. 상점 앞에서 K와 한참 그 문구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우리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어왔다. 지나가던 아저씨가 갑자기 K의 재킷이 마음에 든다며 말을 거는 것이다.
_ hey, I like your jacket!
우리는 잔뜩 쫄아선, 설마 이 옷을 달라는 건가 싶어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그런데 아저씨가 입은 재킷의 로고가 어딘지 익숙했다. 이 아저씨, 파타고니아 덕후구나! 덕후는 덕후를 알아보는 법. 파타고니아를 입은 세 사람은 한참을 길 위에서 수다를 떨었다.
아저씨는 시내 파타고니아 매장의 위치부터 본인이 즐겨 찾는다는 카페의 메뉴까지 알려주고서야 자리를 떴다. 아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길가에 세워진 커다란 간판의 문구가 떠올랐다. <Keep Portland Weird> 포틀랜드, 확실히 이상한 사람들의 도시다. 사랑스럽고 이상한 사람들의 도시.
매일 비만 내리는 흐린 날씨에, 유명한 랜드마크도 없지만, 그럼에도 포틀랜드가 좋은 건 이상한 사람들 덕분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파타고니아의 리사이클 원단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이 골목 끝에 슈퍼마켓에선 주변 농장에서 유기농으로 수확한 싱싱한 먹거리들을 원하는 만큼만 살 수 있다고, 더 좋은 건 불필요한 포장이 없는 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고서점에서 저녁을 보내고, 쉬는 날이면 가족, 친구들과 캠핑을 떠나 소박한 식탁을 차리는 킨포크 라이프의 사람들, 소규모 양조장에서 나온 수백 가지 종류의 맥주를 마시며 실험 정신 강한 로컬 아티스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가 숙소에서 만난 포틀랜드의 친구들 역시 사랑스럽지만 어딘가 이상한 녀석들이었다.
숙소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교외의 한적한 2층 집이었다. 오래되고 낡은 주택이었지만 노란 페인트가 칠해진 거실과 소박한 주방이 꽤 마음에 들었다.
2층 집에는 집주인 할머니와 3명의 하우스 메이트가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와 마주 보는 작은 방을 쓰는 코린, 2층 전체를 빌려 살고 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커플 마크, 올리버와 인사를 나누었다.
짙은 갈색과 초록색 눈을 동시에 빛내는 코린은 포틀랜드에 살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노래를 부르거나, 인생을 바꾸거나’ 되도록이면 둘 다 이루기 위해 아주 멀리서 포틀랜드까지 이사를 왔다고, 어떤 일을 하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디에서 그 일을 해낼 지도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_ 노래를 부르거나, 인생을 바꾸거나.
노래 가사 같은 코린의 말을 몇 번 되뇌다, 꼭 그 문장을 노래 가사로 쓰라고 말했다. 그 애는 살짝 웃으며 그러마 했다.
주인 할머니는 우리 동네에선 새해가 될 때 호박 파이를 만들어 먹는다며, 직접 구운 파이를 한 조각씩 나누어 주셨다. 호박죽처럼 부드러운 크림이 올라간 파이는 여태까지 먹었던 모든 파이 중 가장 담백하고 훌륭한 맛이었다. 호박 파이를 먹으며 코린이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조용히, 숨을 죽여 그의 노래를 들었다.
*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여행이 나한테 이럴 수가] 출간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