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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끝났는데 세상이 멀쩡해요
by 주오일여행자 Sep 06. 2018

09 노래를 부르거나
인생을 바꾸거나

우리가 포틀랜드에 모인 이유

자동차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밤새 뒤척였던 흔적이 남은 침대 시트를 단정히 정리한다. 바닥에 떨어진 베개는 탁탁- 털어 원래 자리에 올려둔다. <We’re all guests of mother nature> 문 앞에 붙은 문구가 일렁이던 마음을 잠잠하게 만든다. 우리 모두, 대자연의 손님이다. 잠시 이 땅을 다녀가는 삶이라는 여행, 우리는 언제나 지구의 손님일 뿐이다. 그러니 이 행성을 여행하는 동안은, 작고 예의 바른 손님이 되어야겠다. 자연을 착실히 존중하고, 살뜰히 배려하며 여행하는 손님이 되자 마음먹으며, 마지막 시동을 건다. 

@Las Vegas, US _weekdaytraveler

맑았던 하늘은 세인트 조지에 가까워지자 끄물끄물 흐려졌다. 곧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신들의 치맛자락 같은 짙은 비구름과 물안개가 자욱해졌다. 신의 입김처럼 후- 불어 올랐다, 사뿐히 사라지는 비구름 사이를 천천히 달렸다. 태초에 비가 있었다. 지구를 온통 뒤덮을 만큼 거대한 구름에서 수백만 년 동안 끝없이 비가 내렸다. 대지의 구릉과 거대한 협곡을 모두 채워 바다를 이룰 만큼 엄청난 비였다. 그 비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땅을 적셨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그 비가 그친 후에야 비로소 이 땅에 가장 처음의 생명이 탄생했다는 건 안다. 나무 한 그루도, 사슴 한 마리도, 이 땅의 거대한 협곡과 웅장한 절벽도, 태초의 비가 아니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 

@Grand Canyon National Park, US _weekdaytraveler

결국 어떤 생명도, 어떠한 삶도 엄청난 비를 맞지 않고는 제대로 시작될 수 없는 게 아닐까? 지금 내리는 이 비가 내 삶을 새로 시작하기 위한 최초의 비였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멸망한 내 안에 어떤 생명이라도 태어난다면, 여행이 끝난 폐허 위에서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좋겠다. 지구를 만들었던 최초의 비처럼. 차가운 비를 헤치며 ‘이제 어디로 가고 싶냐고’ K가 물었다. 축축하게 날리는 빗속에서 떠올린 최초의 비, 그 빗소리가 여전히 나를 울렸다. 


나_ 비가 내리는 곳으로 가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최초의 비가 되는, 그런 비를 흠뻑 맞을 수 있는 곳. 

K_ 그렇다면, 역시 포틀랜드에 가야겠지? 동선 한 번 엉망진창이네, 우리 인생처럼. (웃음) 

@Portland, US _weekdaytraveler

포틀랜드는 1년 중 적어도 반년은 비가 내리는 도시다. 특히 12월부터 5월까지는 거의 매일 비가 내린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니다. 12월의 마지막, 우리는 그렇게 비 내리는 포틀랜드에 도착했다. 도착한 포틀랜드는 비가 쏟아지는 쌀쌀한 날씨에도 꽤 따뜻하게 느껴졌다. 공항을 가득 채운 낮은 조도의 감색 조명 덕인지, 촌스럽지만 직접 만들어 정감 있는 환영 문구와 알록달록한 풍성을 한 아름 든 채 사랑하는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들 덕인지, 마음의 온도는 한껏 높았다. 두꺼운 점퍼와 털모자, 비바람에도 끄떡없을 워커를 단단히 고쳐 신는 포틀랜드 사람들 틈에 섞여 우리도 버스에 올랐다.

@Seattle, US _weekdaytraveler

K와 나는 시내의 한 정류장에 내려 느긋하게 도심을 걸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찬 비를 맞으며 걷다, 한 상점 유리창에 붙은 새해 인사를 보았다. <New year, New president>. 상점 앞을 지나는 사람들 대부분 무심한 듯하면서도, 농담 섞인 문구를 보며 함께 웃어준다. 미국에서 가장 자유롭고, 그 무엇으로부터도 안전하다는 도시다웠다. 상점 앞에서 K와 한참 그 문구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우리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어왔다. 지나가던 아저씨가 갑자기 K의 재킷이 마음에 든다며 말을 거는 것이다. "hey, I like your jacket!"

@Portland, US _weekdaytraveler

우리는 잔뜩 쫄아선, 설마 이 옷을 달라는 건가 싶어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그런데 아저씨가 입은 재킷의 로고가 어딘지 익숙했다. 이 아저씨, 파타고니아 덕후구나! 덕후는 덕후를 알아보는 법. 파타고니아를 입은 세 사람은 한참을 길 위에서 수다를 떨었다. 아저씨는 시내 파타고니아 매장의 위치부터 본인이 즐겨 찾는다는 카페의 메뉴까지 알려주고서야 자리를 떴다. 아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길가에 세워진 커다란 간판의 문구가 떠올랐다. <Keep Portland Weird> 포틀랜드, 확실히 이상한 사람들의 도시다. 사랑스럽고 이상한 사람들의 도시. 

@Portland, US _weekdaytraveler

매일 비만 내리는 흐린 날씨에, 유명한 랜드마크도 없지만, 그럼에도 포틀랜드가 좋은 건 이상한 사람들 덕분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파타고니아의 리사이클 원단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이 골목 끝에 슈퍼마켓에선 주변 농장에서 유기농으로 수확한 싱싱한 먹거리들을 원하는 만큼만 살 수 있다고, 더 좋은 건 불필요한 포장이 없는 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고서점에서 저녁을 보내고, 쉬는 날이면 가족, 친구들과 캠핑을 떠나 소박한 식탁을 차리는 킨포크 라이프의 사람들, 소규모 양조장에서 나온 수백 가지 종류의 맥주를 마시며 실험 정신 강한 로컬 아티스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 말이다.  

@Portland, US _weekdaytraveler

우리가 숙소에서 만난 포틀랜드의 친구들 역시 사랑스럽지만 어딘가 이상한 녀석들이었다. 숙소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교외의 한적한 2층 집이었다. 오래되고 낡은 주택이었지만 노란 페인트가 칠해진 거실과 소박한 주방이 꽤 마음에 들었다. 2층 집에는 집주인 할머니와 3명의 하우스 메이트가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와 마주 보는 작은 방을 쓰는 코린, 2층 전체를 빌려 살고 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커플 마크, 올리버와 인사를 나누었다. 집 안은 연말 파티 준비로 분주했다. 옆집 할머니와 그녀의 개 한 마리까지 총출동이었다. 우리도 곧장 파티 준비를 거들기 시작했다. 코린은 주방 한쪽에 준비해 온 간단한 음식과 맥주를 먹기 좋게 준비하고 있었다.

@Portland, US _weekdaytraveler

짙은 갈색과 초록색 눈을 동시에 빛내는 코린은 포틀랜드에 살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노래를 부르거나, 인생을 바꾸거나’ 되도록이면 둘 다 이루기 위해 아주 멀리서 포틀랜드까지 이사를 왔다고, 어떤 일을 하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디에서 그 일을 해낼 지도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코린은 자신에게 맞는 도시를 찾아 이미 여러 도시를 떠돌았다. 미시간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포틀랜드에 오기까지, 음악을 좇아, 새로운 삶을 찾아 많은 도시를 유랑했다. 그 모습이 우리와 꼭 닮았다. '노래를 부르거나, 인생을 바꾸거나.' 노래 가사 같은 코린의 말을 몇 번 되뇌다, 꼭 그 문장을 노래 가사로 쓰라고 말했다. 그 애는 살짝 웃으며 그러마 했다.  

@Seattle, US _weekdaytraveler

마크는 여러 사람이 복작거리는 주방에, 손바닥만 한 드론을 띄워 올리버만 방해하는 중이다. 올리버는 그런 마크를 보고 웃으며, 요즘은 스타트렉이 아니라 드론에 빠졌다며 마크를 나무랐다. 마크와 올리버는 프로그래머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스타트렉 덕후, 마크는 불과 얼마 전까지 소방관이었고, 올리버는 지질학을 전공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새로운 시대에 맞춰 혁신하지 못하는 조직에 문제의식을 가졌던 마크는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지질학을 전공하던 올리버는 라스베이거스에서 피닉스로 이어지는 길 위에 직접 서보고 싶어 학교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각자가 가진 재산을 탈탈 털어 노란색 스쿨버스를 샀고, 그 버스를 집으로 개조해 미국 전역을 이동하며 살고 있다. 

@Portland, US _weekdaytraveler

_ 잠깐 하루 쉬기엔 월마트 주차장이 최고지. 상주 중인 가드를 만나기도 하는데, 그럴 땐 ‘오, 여기서 밤새는 거 아니에요. 잠깐 쉬는 거예요. 졸음운전 방지, 유노?’라고 하면 해결. 하하. 버스에서 사는 건 그 자체로 무척 자유로운 삶이야. 하지만 쉽지 않아. 누군가에게는 이상하게만 보이는 삶이지

그러니까 우린, 앨버트로스 같은 거야. 땅에 있으면 커다란 날개를 질질 끄느라 멍청해 보인다고 비웃음을 사고, 날아오르기 위해 죽을힘을 써야 하니 괜한 걱정을 사기도 하지. 하지만 한번 날아오르면 누구보다 멀리, 그리고 오래 날아가잖아. 남들이 어찌 살던 좀 내버려둬야 해. 남이 누굴 사랑하던 말던, 누가 고기를 먹던 말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버스에 살던 말던 말던, 그냥 좀, 내버려둬야 한다고. 

@Portland, US _weekdaytraveler

주인 할머니는 우리 동네에선 새해가 될 때 호박 파이를 만들어 먹는다며, 직접 구운 파이를 한 조각씩 나누어 주셨다. 호박죽처럼 부드러운 크림이 올라간 파이는 여태까지 먹었던 모든 파이 중 가장 담백하고 훌륭한 맛이었다. 호박 파이를 먹으며 코린이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기타 선율을 들으며 우리는 묵묵히 맥주를 마셨다. 이 맥주 한 잔을 위해, 코린의 노래 한 곡을 위해 4천 마일을 날아온 것처럼. 우리가 정말 앨버트로스인지 확인하기 위해 가파른 절벽 위에 선 것처럼

@Portland, US _weekdaytraveler

코린의 연주가 끝날 때쯤 우리는 서로의 새해 바람을 나누었다. 코린은 포틀랜드에 사는 뮤지션이 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당장은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마크와 올리버는 몇 달 더 포틀랜드에 머물다 새로운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시애틀에서 66번 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끝없이 달려보고 싶다고 했다. 친구들은 우리의 새해 바람이 무엇인지 물었다.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벌어 적당히 쓰고, 덜 사고 더 만들고, 일하는 만큼 여행하며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거나, 인생을 바꾸거나' 하는 게 별 거 아닌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Portland, US _weekdaytraveler

밤이 깊도록 비는 그치지 않았다. 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거실 소파에 둘러앉아 남은 맥주를 몽땅 마셨다. 포틀랜드에 모여,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를 견디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 최초의 비를 맞고 있는 게 아닐까?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우리는 무엇이 될까? 결국 우리 자신이 되는 게 아닐까? 패티 스미스의 글이 떠오른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우린 뭐가 될까? 철없는 우리가 자신을 향해 항상 던지는 질문들이었다. 그리고 철없는 대답 또한 알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되었다.’ 

@Joshua Tree National Park, US _weekdaytraveler

노래를 부르며 인생을 바꾸기 위해 도시를 유랑하는 코린, 집을 팔아 산 스쿨버스에서 여행하며 살아가는 마크와 올리버, 돌아가는 길을 몰라 여행을 멈출 수 없는 나. 그래서 무엇이 될지, 이 삶은 어디로 가는지 끝없이 물었던 우리들은 결국 우리 자신이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을 향해 던지는 그 질문들 덕분에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오늘 밤, 여행을 끝낼 용기가,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생겼다. 이 비가 그치면,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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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고 글을 쓰며 도처에서 사는 걸 배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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