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회사에서 막걸리 담당자로 역할이 바뀌었다. 나는 면담을 하는 자리에서 대표님께 물었다. 어떤 일에 힘을 쏟길 바라느냐고. 그는 내게 몇 가지 대답을 해줬는데 그중 첫 번째 답변은 이거였다.
“이번에 했던 막걸리 리뉴얼 프로젝트가 성공적이지 않았으니까 내년에 다시 한번 해보자.”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인생이 고단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 나는 보리수 밑에 앉아 참선을 하던 석가모니처럼 사무실 의자에 앉아 무수한 밤을 보내며 삶이란 피로한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리뉴얼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소비자 조사를 하고 내부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웠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리뉴얼 제품의 컨셉을 잡고 연구소와 디자인에 레시피와 패키지 개발을 의뢰했다. 협업의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새로운 술을 개발하는 동안 A라는 목표를 추구하면 B라는 문제가 생겼고 B라는 문제를 해결하면 C라는 문제가 생기거나 A라는 목표와 멀어졌다. 디자이너와의 커뮤니케이션은 더 삐걱거렸는데, 아무래도 원래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사람과 함께 일을 하니 그 과정이 순조로울리 없었다.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지만 그의 두통수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열 번 정도는 한 것 같다.
영업 파트에 리뉴얼 프로젝트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다고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영업이란 기본적으로 불평,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이라 비판을 위한 비판을 내놓는 경향이 있다. 마치 그렇게 흠집을 미리 내놓아야만 새로 나 온 제품이 잘 되지 않더라도 핑곗거리가 있다는 것처럼 밑밥을 잔뜩 깔아 놓는다. 이번에도 가격이 부담스럽다는 둥, 디자인이 밋밋하다는 둥, 색깔이 어떻다는 둥 우울한 말을 자주 늘어놓았고 일과 자아의 분리에 능숙하지 못한 나는 그 말이 곧 나에 대한 공격으로 느껴져서 종종 기분이 언짢아지곤 했다.
사람들과의 협업도 어려웠지만 더 고통스러웠던 건 내 마음속 의구심이었다. ‘내가 잡은 컨셉이 시장에서 외면을 받으면 어떡하지? 내가 방향을 잘못 잡은 게 아닐까? 내 판단 미스로 회사에서 매출이 가장 큰 브랜드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과 불안감이 주기적으로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간 담당했던 일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일이라서 그런지 평생 불면증이라고는 모르던 내가, 베개에 머리만 대던 잠들어 알람이 울릴 때까지 꿀잠을 잤던 내가 새벽 5시만 되던 눈이 떠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 새벽이면 틈틈이 일기를 썼다. 어느 자기계발서에 탁월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 아침 명상을 한다길래 따라 해 본 것이었다. 일기의 주제는 주로 ‘지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였다. 스무고개 하듯 자문자답 글을 적었다.
지금 뭐가 두려워?
오늘 디자인 보고가 잘 안 될까봐 겁이 나.
디자인 보고가 잘 안 된다는 건 정확히 어떤 뜻이야?
음... 내가 피하고 싶은 디자인으로 최종 결정되는 거.
피하고 싶은 디자인은 왜 피하고 싶은데?
미니멀한 스타일로 디자인을 했는데, 로고가 너무 작아서 매대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아.
눈에 띄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데?
사람들이 새로운 제품을 보고도 그냥 휙휙 지나치겠지.
그 방향으로 결정되는 걸 피하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할 수 있을까?
음... 매대에 두었을 때 어떤지 사진 찍어둔 게 있으니까 그걸 보여주면 도움이 될 것 같아.
좋은 생각이다. 그런 노력을 했는데도 결정권자가 그 시안을 픽한다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
응 맞아. 그때는 받아들여야겠지.
이런 식으로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눈앞에서 바라봐 무척 거대하게 느껴지던 물건이 점점 뒤로 이동해 시야가 넓어지면서 원래의 크기를 가늠하게 되는 것처럼 커다랗게만 느껴졌던 감정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어깨와 마음의 짐도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마케터로서 어떤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도 이런 식으로 나와의 스무고개를 하고 나면 새로운 일을 벌일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실패와 낯섦에 관한 두려움은 한결 가벼워졌고 과감하게 계획안을 잡을 수 있었다.
지난 몇 달간 시간과 몸과 마음을 갈아 넣어 리뉴얼한 제품은 다행히도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순항 중이다. 그래서 요즘은 지난 몇 달 동안 봄날의 미세먼지처럼 내 주변에 항상 머물던 두려움, 불안감, 스트레스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잘 알고 있다. 머잖아 뿌연 먼지가 가득한 회색빛 하늘이 다시 찾아올 거라는 것을. 직장인의 삶이란 며칠 깨끗하다가도 금세 뿌옇게 되는 하늘과 비슷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점점 더 뿌연 하늘을 더 자주 마주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어진 일을 능숙하게 해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리뉴얼 프로젝트를 통해 두려움을 마주하는 자세만큼은 조금 배운 것 같다. 비록 쫄보의 천성을 타고났지만 그 본성 뒤에 숨지 않고 두려움을 마주 보고 피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계속 마음속에 품고 지낸다면 앞으로 만나게 될 더 큰 고난과 시련도 잘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 어려운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처럼 어려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귀한 교훈을 하나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