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명문을 쓰는 건 재주 밖의 일이라지만 매일 있었던 일과 배운 것, 누군가에 대한 험담을 적었던 일기도 잘 써지지 않는다. 일상이 단조롭고 새로운 경험의 폭이 좁아 쓸 수 있는 글의 소재가 부족하다기보다 하얀 공백과 깜빡이는 커서를 마주하며 무언가를 써 내려갈 마음이 없는 상태에 가깝다.
일기란 걸 쓰기 시작한 게 2016년이었다. 호기롭게 365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붙이고 블로그 한편에 비공개 공간을 만들어 매일 하나씩 글을 올렸다. 퇴근하고 돌아와 시답잖은 이야기라도 한두 줄 적었다. 습관이 붙자 문장의 길이는 점점 길어졌고 글에 담긴 생각과 메시지도 제법 옹골차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일기가 아닌 글다운 글이 쓰고 싶어 A4 한 페이지 이상이라는 분량 목표를 정해두고 일주일에 한두 편씩 쓰는 거로 계획을 바꾸었다.
얼마 되지 않는 좋은 습관 중 하나였던 쓰는 행위가 올해부터는 잘 유지되지 않고 있다. 상반기엔 아주 바빴다. 작년 연말에 담당 업무가 바뀌면서 일의 부담이 이전보다 몇 배는 늘었다. 6시가 되면 땡 하고 퇴근하는, 한적한 동사무소의 9급 공무원 같은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늦은 밤에 퇴근하게 되니 집에 돌아와 노트북을 켜고 일기를 적을 시간도 에너지도 부족했다. 몸과 마음의 배터리가 떨어진 상태라 추가로 무슨 일을 벌일 수 없었다.
그래도 주말에는 무어라도 적어보려 노트북을 펼쳤지만, 어떤 날에는 주말에도 밀린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런 날에는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한다고 쓰기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고 쓰기는 일상과 점점 멀어져 갔다.
다행히 바빴던 일과는 6월 말을 기점으로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 이전처럼 밤늦게 퇴근하는 일이 사라졌고 7시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균형 잡힌 삶을 회복하였다. 문제가 있다면 일상을 되찾았음에도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적어도 1~2시간은 자리에 앉아 사색을 하고 책을 읽고 키보드를 두들겨 왔는데 자꾸만 침대와 한 몸을 이뤄 빈둥거리고만 싶다. ‘책을 읽고 사색을 하고 일기를 써야지’라는 생각이 머릿속 생각으로만 머물다 휘발된다.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뜨겁게 자리 잡고 있던 창작에 대한 열망이 어디로 사라졌나 곰곰이 따져보니 내게 있던 어떤 결핍이 조금 채워진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꾸준히 일기를 쓰고 글이란 걸 써보겠다고 폼을 잡던 때에는 회사 생활에서 느끼는 공백이 있었다. 손수 기획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걸 자주 경험하면서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고, 무얼 해도 나아지지 않는 브랜드의 모습을 보면서 무기력함도 많이 느꼈다. 어쩌면 내게 일기란 것은 그런 무력감의 반작용이자 성취감을 향한 갈망이었을지 모른다.
작년 연말부터 바빴던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는 마무리되었고 그 프로젝트의 결과로 출시된 제품이 시장에서 제법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 프로젝트에서 내가 한 일이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직접 끌고 나간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제품부터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곳곳에 내 손때와 의도가 묻어 있어서 그런지 성취감을 느낀다. 종종 만족스럽단 생각도 들고 가끔은 의기양양한 마음도 든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충만함이 반대로 쓰는 행위에 대한 열망을 줄이고 있는 것 같다.
결핍은 어떤 행동을 이끄는 중요한 동기 중 하나지만, 그것만으로는 지속하는 힘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결핍이란 금방 채워지는 것이니까. 그래서 요즘은 장인의 삶, 장인의 태도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 아흔 살이 넘는 첼리스트가 매일 세 시간씩 연습하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신의 분야에서 더 나아지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계속 도전하는 삶의 태도는 무엇이 만드는 것일까? 그게 유전자에 오롯이 새겨져 있어 타고나야만 하는 삶의 태도인지 정신력과 노력으로 체득하는 건지 알 순 없지만,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도 매일매일 쓰는 일에 힘을 쏟아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