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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정훈 Jul 25. 2021

서울 집의 역사

내가 살아온 작은 집

  스무 살, 서울로 상경했을 때 첫 집은 대학 기숙사였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2평 남짓한 공간에 옷장, 침대, 책상이 2개씩 데칼코마니로 찍은 듯 배치되어 있었다. 침대와 침대 사이 공간은 두 사람이 함께 서 있기엔 좁아서 서로 스쳐 지나가야 할 때는 몸을 옆으로 틀어야 했던 기억이 난다. 이곳에서 별다른 추억이 있진 않다. 공대생이었던 룸메이트는 과제가 많은 건지, 노느라 바쁜 건지 아니면 내가 편치 않은 건지 자주 방을 비웠고 나 역시도 가족이 아닌 낯선 사람과 한 공간에서 지내는 건 퍽 불편한 일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대학에 입학은 했지만,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없는 시절. 나는 이곳에서 주로 낮잠을 자며 땡땡이를 쳤다. 당연히 학점도 엉망이었다. 1학기를 보내고 여름방학 동안 고향에 내려가서 지내던 나는 2학기를 준비하다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보통 기숙사에서 1년을 지내길래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학점이 2.5점을 넘지 못해 기숙사에 살 자격이 사라진 것이었다. 약간의 부끄러운 마음으로 안암동에서 자취하던 친누나에게 갔다.      




  누나와 새롭게 구한 집은 안암동 번화가 이면 도로에 자리 잡고 있는 빌라였다. 1층에는 슈퍼마켓, 음식점 따위가 있었고 우리 집은 3층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조그만 주방이 있었고 주방의 좌측에는 3~4평은 될 것 같은 방이, 우측에는 그보다 절반 정도 사이즈의 방이 있었다. 나는 큰 방을, 누나는 작은 방을 쓰기로 했다. 큰 방은 번화가의 소음이 잘 전달되는 위치였는데, 당시 공부를 하던 누나의 수면에 방해가 될 수 있어 내린 결정이었다. 나야 베개에 머리를 대기만 하면 잠이 드는 스타일이니 소음이 수면에 방해가 되는 일은 별로 없었고, 가끔씩 고대생들이 다 같이 모여 응원가를 외치거나 축제가 있어 왁자지껄한 날에도 내가 청춘의 현장에 함께 머무는 것 같아 소음이 그리 거슬리진 않았다. 


  안암동에는 입대 전까지 1년 정도 살았다. 여전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해야 할 것도 별로 없던 시절, 나는 주로 술을 마시며 청춘을 낭비했다. 저녁에 술을 진탕 마시고 다음 날 골골  대다가 저녁이면 또다시 술 약속을 잡는 소모적인 하루하루를 이어나갔다. 이때의 젊음과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가끔 이 시절의 한량함이 그립다는 생각도 종종 하게 된다.      




  제대하고는 서둘러 복학했다. 전역 일자가 9월 12일이었는데, 내게는 15일의 말년 휴가가 남아 있었다. 나는 말년 휴가를 나가 남들이 신청을 하고 남은 자리 중에 구미가 당기는 걸 골라 수강 신청을 했고, 아직 군인 티를 벗지 못한 까까머리로 학교에 다녔다. 이때 살던 집은 시험에 합격한 누나가 연수를 받는 기간 동안 지내려고 계약한 낙성대역 인근의 원룸이었다. 한 명은 침대에서, 또 다른 한 명은 바닥에서 이불을 깔고 자는 생활을 한 달 남짓 하다 누나의 발령에 맞춰 경복궁역 인근에 전셋집을 구했다. 전세 5천만 원짜리 낡고 좁은 빌라였다. 


  열 평도 되지 않는 공간에 방이 세 개나 있었으니 각각의 방은 참 조그마했다. 누나가 가장 큰 방을 쓰고 나는 작은 방 A에 책상과 옷장을 두고 작은 방 B에 침대를 두고 생활했다. 이 좁은 집에서 사색을 하겠다며 1인용 리클라이너를 큰돈 주고 사서 들여놓았는데 소파를 두기엔 방이 너무 좁았다. 어쩔 수 없이 붙박이장을 부수고 그 안에 있던 옷을 다른 방으로 옮겨야만 했다. 이곳에서는 5년 정도 살았고 그사이 나는 대학 졸업을 하고 취업을 했다.      




  작고 좁은 집에 살다 보면 가끔 마음이 답답해질 때가 있다. 그때는 회사 일도 잘 풀리지 않고 몇몇 인간관계 때문에 속도 상했을 때라 이 작은 집에서의 생활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내가 번 돈을 조금 보태 옆 동네에 약간 더 넓은 평수의 빌라로 이사 갔다. 누나는 당시 남자친구가 없었음에도 결혼을 하면 금방 나갈 거라면서 전세금을 보태지 않았다. 1억 6천만 원. 서울에서 처음 억대급 전셋집을 구한 셈이었고, 집은 이전보다 두 배쯤 커졌다. 


  이곳에 막 이사를 왔을 때, 서촌이란 동네가 조금씩 뜨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곳에 살면서 젠트리피케이션과 유행의 흥망성쇠를 목도했다. 건물 1층에 있던 세탁소와 우유 대리점이 카페로 바뀌고 식당으로 바뀌었고 주말에는 이 동네를 찾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났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인산인해를 이루던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었고 동네는 썰렁해졌다. 곳곳에는 임대 문의 스티커가 붙어 있게 되었고, 식당이 나간 자리에는 조그만 공방이 들어오고 세탁소가 생겼다. 그동안 나도 하나둘 나이를 먹어 이십 대가 삼십 대가 되었고 회사를 한 번 옮겼으며 누나는 결혼을 했다.     




  지난 거주의 역사를 되짚어본 건 요즘 새로 살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빌라가 아닌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알아보는 중인데, 지금 살고 있는 낡은 빌라보다 더 낡고 평수도 비슷한 아파트의 전세가 4억이 넘는 걸 보며 답답해하고 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하게 되는 정부를 향해 욕도 하게 되고 그간 사치를 부리지 않았음에도 별로 모이지 않은 통장 잔액을 보며 한탄도 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스무 살 기숙사에서 시작했던 찌질한 삶이 집을 따라 조금씩 나아졌다는 생각도 든다. 조금씩 넓어진 평수만큼 삶의 여유도 조금씩 생기고 마음에도 넉넉함이 조금씩은 자리를 잡아간 것 같다. 새로 구할 집에서도 지금보다 더 넉넉하고 나은 생활이 기다리고 있길 바라본다. 그나저나 다음 정부에서는 제발 집값 좀 잡아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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