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에는 책들이 어지러이 쌓여 있다. 한 달에 두세 권의 책을 구입하길 지난 10년간 꾸준히 해왔으니 못해도 3백 권 정도의 책이 방안에 있는 셈이다. 게다가 대학생 때 쓰던 몇 권의 전공 서적과 교육 프로그램의 교재, 누나가 결혼하며 나갈 때 챙겨가지 않은 두꺼운 각종 법서까지 있어 책은 책장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책상 위까지 점거한 상태다.
그간 게으른 심성 탓에 책들의 세력 확장을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몇 달 후에는 이사를 할 예정이다 보니 더 관망할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이번 주말, 드디어 미루고 미뤘던 책 정리를 했다. 내게 정리란 곧 버림이기에 책장에 꽂혀 있고 책상에 널브러진 모든 책을 방바닥에 쌓아두고는 간직할 책과 버릴 책으로 구분했다. 여러 번 읽은 책, 중간중간 좋은 문장이 있어 페이지 하단 모서리를 자주 접은 책, 읽으면서 느낀 것이 많았던 책은 도로 책장에 꽂아두었고 보다 만 책, 다시는 안 볼 것 같은 책은 중고서점에 팔았다. 인터넷 중고서점에 신청했을 때 매입 불가라고 뜨는 책은 폐지로 버리고. 그렇게 책 하나하나를 구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게 맞는 책을 고르는 방법에 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 마음속 질문과 연결된 책 >
스스로 씨름하고 있는 물음이 없다면, 아무리 유명하고 좋은 책을 읽는다 해도 답을 얻을 수 없다. 책 속에 고정된 답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 <매니큐어 하는 남자>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글귀를 접했을 때,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책을 꾸준히 읽긴 하지만, 무언가 나아지고 발전한다는 느낌이 부족했는데 그 감정이 어디서 시작된 건지 그 힌트를 알게 된 것 같았다.
그 후로는 책을 주문할 때, 내가 요즘 무엇이 궁금한지, 어떤 질문에 관한 답을 바라면서 이 책을 구입하는지 따져본 다음 책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모든 책을 그렇게 꼼꼼하게 선택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책을 고르는 과정에 더 신경을 썼다. 창의성을 키우고 싶은 방법을 찾고 싶어 도서 목록을 뒤지다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라는 책을 구매했고, 내가 회사 일로 만드는 SNS 콘텐츠가 재밌길 바라는 마음에 <웃음의 과학>이란 책을 주문했다. 알 수 없는 우울감과 무기력함이 평소보다 길게 이어질 때, 과학적인 해결책을 알고 싶어 <우울할 땐 뇌과학>이란 책도 구매했고. 그렇게 고른 책들은 이번 ‘책 심판의 날’에 살아남는 비중이 높았다. 아무래도 남의 추천보다는 내 마음속 추천을 따르는 것이 내게 잘 어울리는 책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 오랫동안 한 분야에서 일한 사람이 쓴 단 한 권의 책 >
책을 읽다 보면 시답지 않은 글, 뻔한 말을 길게 늘여 쓴 책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래도 그런 부실한 식사 같은 독서 중간중간에 성찬을 만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책이 종종 있는데, 한 분야에서 꾸준히 경험과 통찰력을 쌓아온 사람이 그 분야에 관해 쓴 책은 그럴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히트 작곡가로서의 자리를 꾸준히 지키고 있는 김도훈 작곡가가 쓴 <김도훈 작곡법>, 카피라이터로서 오랫동안 일해 온 정철이 쓴 <카피책>, 디자이너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온 이랑주 대표가 쓴 <좋아 보이는 것들의 비밀>을 읽는 내내 책의 내용이 아주 단단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오랫동안 한 분야에서 일해왔기에 쌓아 온 경험과 에피소드가 풍성했고, 오랜 고민 끝에 펼쳐놓은 생각들도 그만큼 깊이가 있었다. 게다가 이런 유의 책은 낯선 분야를 경험하는 재미와 정보도 있으면서 동시에 이들이 가진 올바른 삶의 태도도 배울 수 있기에 의미 있는 독서 경험으로 남는 경우가 많았다.
< 책 추천은 서울대보다 트위터 >
꽤 오랜 기간 고전을 읽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렸다. 그래도 평균보다 조금은 더 많이 읽는 사람으로서 가볍고 편한 책만 읽을 게 아니라 벽돌 책, 정통파 고전 몇 권 정도는 섭렵해야만 어디 가서 취미란에 독서라고 적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서울대 권장 도서 100선, 교수들이 추천하는 고전 목록 같은 걸 보고 책을 주문하곤 했었다. 허나 그런 시도는 보통 실패로 끝이 났다. 긴 소설보다는 짧은 에세이를 선호하고 공감대가 낮은 과거나 미래 이야기보다는 현재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내게 고전의 벽은 높았다. 이번에도 그렇게 구매한 고전이 구매할 때의 깨끗한 모습 그대로 책장 속에서 발굴되었고 버려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대부분의 고전은 중고서점에서 매입해준다는 것 정도랄까.
추천받아 구매한 책 중에 괜찮은 것들은 대부분 트위터에서 나왔다. 트위터로 독서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사람들과 작가 몇 명을 팔로우하고 있는데, 그들이 정말 재밌다며 꼭 읽어보라고 권하는 책은 내게도 좋았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아무튼 택시>, <검사내전> 같은 책들 모두 트위터로 알게 된 것들이다. 트위터 덕분에 새로운 장르의 책을 많이 접할 수 있었고 그 경험이 쌓여 내가 호흡이 짧은 에세이를 좋아한다는 것과 고전 소설보다는 현대 소설을 편해한다는 걸 터득할 수 있었다.
지금 집에는 중고서점으로 보낼 택배 11박스가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다. 집안 가득 쌓여 있는 상자를 보면서 ‘이렇게 많은 책을 사고 읽었는데 왜 그간 나는 별로 성숙하지 못한 거지?’ 하는 자괴감이 갑자기 몰려든다. 그래도 앞으로 책을 고를 때 조금 더 내게 맞는, 지금의 내게 필요한 책을 고른다면 그래도 무작정 책을 읽던 시간보다는 조금 더 유익할 수 있지 않겠냐며 스스로 위로해본다. 그나저나 책을 팔면 30만 원 정도는 생길 것 같은데 무얼 하면 좋을까? 여행을 가야 하나? 아니면 평소 가고 싶었던 한우 오마카세 집을 방문해야 하나? 책을 팔아 생긴 돈을 어떻게 써야 재밌고 좋은 추억으로 남을지 즐거운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