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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정훈 Aug 22. 2021

내 인생 보고서


  기획자로 일하다 보니 회사에서 보고서를 쓸 일이 참 많다. 커뮤니케이션 계획안부터 접점물 제작 계획, 오프라인 행사 운영안에 각종 검토서까지. 한 장짜리 짧은 보고서까지 포함하면 한 달에 2~3번 정도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으니 그간 쓴 보고서가 못해도 200~300개쯤은 될 것 같다. 거기에 최종, 최최종, 최최최종으로 이어지는 보고서의 세부 버전까지 모두 합산한다면 그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보고서의 끝판왕은 아무래도 매년 10~11월에 진행하는 사업계획이 아닐까 싶다. 한 달에서 한 달 반 남짓 이어지는 이 기간에는 시장 상황을 분석하고 우리 제품과 경쟁 제품의 현황을 정리한 다음 내년도에 추진할 구체적인 활동 계획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무척 지난하다. 준비하는 기간도 길고 정리해서 발표하는 PPT 슬라이드의 페이지 수도 많다. 보통 보고 과정에서 여러 번 까이기 때문에 보고의 횟수 또한 잦다. 사업계획을 마치고 나면 한 해가 시작되기도 전이건만 왠지 한 해의 절반 정도는 이미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업계획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현타가 찾아오기 마련이고 하기 싫은 마음과 반발심 때문에 마음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자꾸 일렁인다.  

  ‘아니 지금 내가 회사 사업계획을 세울 때인가? 내 인생 사업계획도 못 세웠는데?’

  ‘사실 잘 돼야 하는 건 회사보다 내 인생이 먼저 아니야?’

  ‘마케터로서 브랜드의 비전이니 미션이니 운운하기 전에 먼저 내 인생의 비전과 미션을 세워야 하는 거 아니냐고!’

  오만가지 생각과 하기 싫은 마음속에서 분명한 건 늘 회사 일에 임하는 치열하고 진지한 태도와 소극적인 인생 계획 사이에서 늘 아쉬움을 느꼈다는 것이다.      




  요즘 이사할 집을 알아보고 있다. 끌어모을 영혼마저 빈곤하여 매매는 생각지도 못하고 전셋집을 알아보고 있는데, 그마저도 매물이 적고 가격도 지난 몇 년 사이 두 배쯤은 올라 세상이 세입자의 약을 올리는 것 같다. 어쨌든 이번에 새로 이사할 집을 알아보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후보지를 엑셀로 정리를 해보았다. 보고서를 쓰듯이 표를 만들고 거기에 아파트 이름을 적고 보증금 액수, 위치, 면적, 방과 화장실의 개수, 입주 가능일, 준공연도를 적었다. 그 밑으론 호갱노노에서 입주민들의 리뷰로 확인한 거주지로서의 장점과 단점을 적었고, 네이버 부동산에 매물을 올린 공인중개사무소의 이름과 전화번호도 함께 기재해두었다. 


  집 여덟 곳을 이렇게 정리한 다음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잡고 하나씩 둘러보고 있다. 집이라는 게 실제로 보면 다른 인상을 받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매물간에 그룹화가 되고 우선순위가 잡힌다. 여덟 개의 집 중에서 얘네들은 지은 지 십 년 안팎이라 깨끗한 대신 전세금이 상대적으로 높고 회사와는 거리가 있는 매물이구나. 이 집들은 낡은 아파트지만 교통편이 괜찮구나. 전세금도 몇천만 원 정도 저렴한 편이고.


  회사 일로 보고서를 쓰다 보면 생각이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곤 한다. 보고를 준비하며 얻은 정보 중에 어떤 게 중요하고 어떤 게 중요하지 않은지 구분이 되고 무얼 보고서에 언급할지 정하게 된다. 현재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계획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그 계획별로 장단점이 무엇인지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결정할지 나름의 판단 기준도 세울 수 있게 되고. 


  집을 알아보며 엑셀로 그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도 똑같았다. 여러 매물을 본 다음 개중에 엑셀에 기입할만한 매물인지를 판단하며 내게 맞는 안을 추릴 수 있었고 후보 매물들의 세부 스펙을 표에 기입하며 자연스럽게 우선순위가 생겼다.  ‘이 집 근처에는 9호선 급행이 서고 주변 환경도 깨끗하면서 20~30년 된 다른 집보다는 외관도 내부도 깔끔한 편이니 1순위야. 전세금이 조금 높은 편이지만 이 정도까지는 대출받을 수 있을 거야.’ ‘이 집은 다른 매물보다 회사와의 거리가 멀어 아쉽지만 평수가 가장 넓고 구조와 인테리어가 빼어나니 여기를 2순위로 생각하자.’ 


  매물을 엑셀로 정리할 때 의도를 갖고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전셋집 후보를 찾고 표로 정리하고 그 안에서 결정을 내리는 과정은 회사에서 보고서를 만드는 그것과 똑같은 프로세스였다. 회사 일로 무수히 많은 보고서를 쓰며 ‘내 일도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했던 내가 드디어 회사 일이 아닌 내 일로 인생의 첫 번째 보고서를 만든 셈이었다.      




  회사뿐만 아니라 인생에도 보고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을 요식 행위이자 시간 낭비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수백 편의 보고서를 쓰며 느낀 건 그 과정은 생각을 정리하고 날카롭게 다듬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보고서를 쓰게 되면 느낌적인 느낌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방법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사안을 판단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이 프로세스를 내 인생에도 적용한다면 삶의 중요한 결정을 더 올바르게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사업계획 수립하듯 내 인생 계획을 보고서로 만들어 둔다면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이 더 탄탄해지지 않을까? 


  집을 알아보며 내 인생 첫 번째 보고서를 만들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고 나니 내 삶을 적극적으로 꾸려나가고 있다는 실감이 생긴다. 내 인생의 보고서를 쓰는 일을 앞으로도 자주 시도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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