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에 순환기 내과 장겨울 선생이 다녀갔다. 숨이 찬 건 어떤지, 열이 나는 건 어떤지 물었다. 나는 많이 좋아졌다고 답했다. 그녀는 X-레이 사진으로 보이는 폐렴의 모습이 일반적이지 않다며 여러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면역 체계에서 발생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 말도 다시 꺼냈다. 만약 문제가 거기에 있다면 이번 일은 우연이 아닌 필연, 일회성이 아닌 다회성의 가능성을 품게 된다. 부디 면역 체계의 문제가 아니길 바란다.
어제부터 항생제를 맞기 시작했고 하루 여섯 번 맞고 있다. 링거 형태로 들어가는데, 한 번 맞으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두 가지 항생제를 함께 사용하고 있고 한 항생제를 네 번 맞고 다른 항생제를 두 번 맞고 있다고 한다. 그간 아픈 적도 별로 없고 아파도 약을 잘 챙겨 먹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만큼 항생제에 덜 길들여진 깨끗한 몸인 만큼 항생제의 효과가 팍팍 나타났으면 좋겠다.
오후 네 시에 아버지가 또 다녀가셨다고 간호사에게 전해 들었다. 아버지가 어제도 오고 오늘도 온 셈이다. 어제는 엄마, 매형과 함께 차를 타고 오셨을 것이고 오늘은 기차를 타고 오셨을 것이다. 검소한 스타일이기 때문에 KTX가 아닌 무궁화를 탔을 것이다. 무궁화를 타고 2시간을 달려와 서울역에 도착한 다음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탄 끝에 여기에 당도했으리라.
황혼을 맞은 부부의 모습이 그렇듯 엄마는 잔소리를 자주 하고 아버지는 자주 혼이 난다. 오늘도 병원에 왔다는 걸 알게 되면 엄마는 왜 쓸데없이 병원을 찾아가냐며 타박했을 것이다. 간다고 면회가 되는 것도 아니요, 담당 교수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가서 간호사들 성가시게 만드냐고 이미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놨을 수도 있다. 아버지 입장에서도 무궁화를 타고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 병원에 도착한 다음 출입금지, 면회 금지 싸인이 붙은 중환자실 입구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게 무척 고되고 비효율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아버지 나름의 기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을 오가며 본인이 고생하고 정성을 다하면 우주의 기운이 아들의 회복에 도움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아버지 성정의 많은 부분을 물려받은 나 역시도 비슷하다. 맡은 일을 잘 해내기 위해 많이 고민하지만, 동시에 비효율적인 어떤 일에서도 공을 들이려고 노력한다. 퀵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샘플도 이왕이면 손수 전달하며 사소한 실수가 생기지 않게 방지하고, 메일 보내고 말 일도 일일이 전화하며 부탁하고 게 나름 공을 들이는 방법이다. 물론 좋은 아이디어와 전략이 더 중요하겠지만, 이런 비효율적인 노력과 태도가 함께 있을 때 결국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아버지와 나는 이런 우직함을 공유한다. 그래서 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낭비하는 아버지의 행동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간호사로부터 “아버님이 또 왔다 가셨네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조금 울었다.
어제 샤인 머스캣과 함께 받은 책은 최민석 작가의 <베를린 일기>와 수잔 케인이 쓴 <콰이어트>라는 책이다. 중고등학생일 적엔 책을 많이 읽진 않았다. 독서에 습관이 붙은 건 군대에서였다. 2년이라는 청춘을 고스란히 낭비해야 하는 그곳에서 무엇이라도 얻고 싶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시간 덕분이기도 했다. 독서는 지루한 일이지만 군대에서의 시간은 더 무료했으므로. 병영 도서관에 있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소설, 에세이, 인문학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었던 것 같다. 짬이 나면 책을 읽는 습관이 제대를 하고도 자연스럽게 이어져 한 달에 두 권 정도는 읽는 습관으로 굳어졌다.
독서의 시작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어서 그랬는지 내 독서는 약간 강박적인 구석이 있었다. 즐거움보다는 자기 계발을 위한 도구랄까? 책도 지식을 쌓기 위한 교양 책이나 자기 계발서를 많이 읽었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작가가 최민석 작가였는데, 그의 에세이를 읽어보니 너무 재미있었다. 키득키득 웃으며 책장을 넘길 때, 독서란 유희 행위란 걸 오랜만에 깨달았다.
책을 가장 몰입해서 본 건 고등학생 때 <엽기적인 그녀>를 읽었을 때이다. 만화방에 만화를 빌리러 갔던 나는 그날따라 만화가 아닌 소설책을 골라왔다. 자극적인 제목이 호기심 많은 사춘기 소년을 자극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소설은 각각 전반전, 후반전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하룻밤만에 첫 권을 다 읽었다. 서사와 전개가 흥미로웠고 이모티콘도 빈번하게 나와 읽기에 수월했다. 후반전을 읽고 싶단 생각에 쉽사리 잠 못 들던 그날 밤이 생각난다. 그때 느꼈던 책 읽기의 즐거움을 오랜만에 최민석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며 느꼈고 그 후로는 독서 생활이 강박과 유희 사이에서 균형을 조금은 찾았다고 생각한다.
<베를린 일기>는 최민석 작가가 파견 프로그램으로 방문했던 베를린에서 쓴 매일의 일기를 엮은 에세이다. 그의 호구 짓과 말장난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 동시에 그가 느꼈을 감정과 유대감에 공감하게 된다. 오랜만에 <베를린 일기>를 다시 읽다 문득 나도 지금 이 시간을 글로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를린에서의 시간만큼 매력적인 소재는 아니겠지만, 분명 지금은 일상적이고 흔한 순간이 아닌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서둘러 지난 경험을 메모장에 적어봤다. 지금의 글은 그렇게 남긴 메모를 바탕으로 살을 붙여 쓰고 있는 것이다. 입원 3일 차 저녁은 메모를 쓴다고 시간이 제법 잘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