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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위나 Jun 21. 2020

시아버지와 배추된장국

며느리가 끓인 배춧국이 가장 맛있다고 하신다





알배기 배추 한 통을 샀다. 샛노랗고 단단한 게 이이상 좋을 수가 없다.

부서지지 않게 한꺼풀 한꺼풀씩 벗긴다. 두 겹씩 포개어 길게 2등분해서 자르고 각각 비스듬히 한두 번 잘라주면 배추의 하얀 줄기 부분과 노란 잎 부분이 골고루 나뉜다. 배추를 다듬고 씻고 하는 동안 불 위에는 멸치 육수가 끓고 있다.



"이런 개새&★ "

"저런 병~같은 새%#"

운전하시던 아버님이 툭툭 내뱉으신다. 조수석에 타고 계시던 어머님이 당황하신다.

"아이고, 새아기 앞에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애 놀라게.."

"저는 괜찮아요."

정말 난 괜찮았다.

결혼을 했고 남편의 고향인 시댁 가까이서 신혼을 시작했고  낯선 가족의 낯선 구성원으로 스미는 무렵 시아버지의 운전 중 걸쭉한 입담은 어릴 적 남동생과 사촌오빠들, 동네 골목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욕지거리를 떠오르게 했다. 아버님은 무법천지의 자동차를 향해 그렇게 욕을 내뱉으시면서도 운전만은 안전과 양보운전 자체였다.

내 세 아이들의 등교를 마다하지 않고 오랜 시간 책임져 주신 수고로움은 이미 예견된 것 같다.

결혼해서 처음 맞이하는 김장날에 아버님은 기분이 퍽 좋아보였다. 어린아이 같은 흥분은 평범한 사람이김장김치에 보쌈을 먹고자 하는 기대감이겠지만, 다름 아닌 배추를 들통에 끓는, 당신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배추된장국에 대한 애정때문이었다.

아버님의 걸쭉한 입담(누군가를 향해 욕을 하시는 적은 거의 없다)과는 달리 고기, 생선, 술을 가까이하지 않는 소박하고 담백한 입맛 결혼, 시댁이라는 환경 속에서 맞이한 새로운 음식문화였다.






잘라 놓은 배추를 한두 번 헹구어낸다. 때마침 불 위 냄비에서는 멸치 육수가 모락모락 김내고 있다. 냉동실에 보관해둔 된장을 꺼내 육수에 풀어 넣고 어놓은 배추를 한아름 투하한다. 여기에 다진 마늘, 고춧가루까지..

자, 이제 남은 것은 시간이. 나의 국과 찌개에 대한 신념은 오래도록 푸욱 끓이는 것이다. 미역국, 북엇국, 감자찌개, 된장찌개, 곰탕, 갈비탕, 그 외 등등..  초보 주부이자 초보 요리 시절, 갖은 양념과 조미료(?)등등을 동원해 아무리 맛을 내려해20프로 부족한 맛은 늘 나를 당황시켰고, 미해결의 문제는 20분의 마법으로 풀리게 되었다. 요리를 다 마쳤다고 생각되는 시점부터 가스레인지의 불을 좀 더 켜 두면 되는 것이었다. 성급하지 않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시간의 끈을 놓지 고..

배추된장국은 특히 더 오래 끓인다. 오랜 시간 무르게 익은 배추와 된장이 어우러진 이 배추된장국을 아버지는 "내 곰국"이라고 부르신다. 이렇게 시간을 들여서 끓이는 배춧국 무엇보다 좋아하는 반면 한국인의 평균 속도 '8282'보다 더 빠른 속도(9292정도?)를 추구하시는 아버지의 급한 성격은 아이러니하다.



아버지할 일있을  최대한 서둘러 빨리 끝내셔야 직성이 풀리신다. 뭔가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을 참지 못하셔서  운전하실 때 신호대기 중 앞차가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빨리 출발 안 한다고 뭐라 하시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실 때도 안절부절 못하신다. 아버발신의 핸드폰이 울려서 받으면 끊어지기 일쑤이다. 전화 신호음마저 길게  기다리신다. 이러 시아버지일진대 내가 생각하기에도 미스터리한 일이 있다. 지적장애인 내 둘째 아이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중반까지의 기간 동안 등교시키고 방과 후 복지관 데리고 다니신 것이다.

세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으로서 시아버지의 도움을 그저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연로하신 아버지를 되돌아보면 단순한 도움 정도로만 여길게 아니었다. 아이와 상호작용을 하려면 많은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하다. 부모인 나조차도 힘이 들 때가 많은데 불같은 성격의 아버지는 얼마나 험난한 길을 지나오셨을까 하는 생각에 그 길을 오로지 손주를 비롯한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달려오셨을 거라고 우매한 며느리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깨닫게 된다.

연년생 남자아이들 어릴 때 시어머니께서 도와주셨다. 나는 독박 살림은 해봤지만 독박 육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시댁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아이들 육아는 공동육아나 다름없었다. 결혼한 지 20년이나 지났고 현재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힘들었던 시간이 많았을 수도 있지만 지금 현재, 아이들은 잘 자랐고 모든게 감사한 마음뿐이다. 아이를 함께 키우면서 의견 충돌이 있거나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 옅어지고 희미해진 배경에는 아이들이 클수록, 내가 나이가 들수록, 시부모님이 연로해질수록 뿌리 깊어지고 줄기는 더욱더 곧고 굵어진 가족이라는 나무가 있었다.




된장국 냄새가 집안에 구수하게 퍼진다. 배추는 익은 듯 하지만 흰 부분이 아직 싱싱하다. 배추가 숨이 죽어 된장과 같은 빛이 돌 때까지 좀 더 끓여야 한다. 쫑쫑 썬 파와 잘게 썰어둔 청양고추를 투하한다.  이때 설탕 조금을 넣는다. 된장의 텁텁하고 알싸한 맛을 줄이고  감칠맛을 더해준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며느리가 끓인 배춧국이 제일 맛있다고 하신다.

연세가 들수록 미각이 둔해지신 건지 아니면 반대로 더 예민해지신 건지 갈수록 가리는 음식이 많아지고 맛에 대한 까다로움이 짙어져(이건 짜고 저건 맵고...) 시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시는 게 아니시다. 두 분음식으로 티격태격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결국 '며느리가 끓인 배춧국이 제일 맛있다'는 아버지 말 한마디에 틈만 나면 알배기 배추를 사들이는 팔불 며느리가 되고 만다.




배추가 무르게 익었다. 파와 청양고추가 풍미를 더해 나도 모르게 밥 생각이 절로 난다.

시댁에 가져다 드릴 국 커다란 통에 퍼담는다. 바닥에 남은 자투리 국 그릇에 마저  담는다.

한 숟갈과 배추 된장국을 입에 넣고 오물거려본다. 달달하고 부드러운 배추 건더기가  구수하고 깊은 된장 맛에 어우러진다. 아버흡족한 미소가 떠오른다. 

이제 좀 천천히 드셨으면 하는 마음 건강하게 우리와 함께 오래도록 같이 계셨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나 또한 언제까지나 배추된장국을 끓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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