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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위나 Aug 12. 2020

침대 밑의 시간



 

 한 집에서 오래 살고 있다.

 그동안 아이들이 70센티 이상 키가 컸고(여기서 태어난 셋째는 1미터 60센티 가까이...) 까치발로 서서 손이 닿던 스위치가 우습게 되었다.  머리에 닿을락 말락 했던 선반은 가슴 아래로 내려오고 "내가 몇 살 때 여기서.."라는 아이들의 성장과 밀접한 추억이 집안 곳곳에 있다. 오래 살던 집에서는 가끔 책장과 피아노를 옮기기도 했고 침대는 있다가 없다가 새로 들이기도 했다.

 어느 밤, 침대 옆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누워있는 이 순간은 하루 동안의 노곤함을 잊는 평화로운 시간이다. 누워있다가 고개를 슬며시 옆으로 돌려보았다. 침대 아래의 평화로운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침대 다리 사이로 텅 빈 침대 밑의 공간이 내 옆에 나란히 누워있다. 누구의 시선이 닿지 않던 곳, 떠들썩한 침대 밖의 시간들을 흡수해왔던 곳, 흡수한 시간들을 고요히 끌어안고 있었던 곳, 오랜 침묵으로 자리를 지켜왔 곳이 조용히 나에게 손짓을 한다.





 한참을 바라본다. 나와 가족들이 지내왔던 날들이 차곡차곡 쌓인 지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지구의 시간 그랜드캐년에 묻혀 있다면  우리 가족의 시간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의 그랜드 캐년..

 시간을 살짝 쓰다듬어 본다.  히코리 소나무 줄기 기둥 주름처럼 겹겹이 압축된 시간의 층이 손바닥에서 꿈틀거린다. 히말라야의 어느 장수촌에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앉아 있는 고령의 여인의 손등을 슬며시 잡고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있다. 시간의 감촉들이다.

 

 시간은 우리가 숨을 쉬고, 먹고 활동하는 에너지가 되어준다. 우리가 섭취하는 먹거리들은 시간이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는 시간의 창조물이다.

 열 달 시간을 머금은 쌀로 지은 밥, 계절이 담긴 과일들, 끊임없는 해와 비와 바람의 숨결을 먹고 자란 야채들, 바다의 물결을 품고 있는 해산물들, 들판의 침묵을 먹고 자란 육고기들.. 시간의 맛 쌉싸름하지만 담백하고 달고 시큼하면서도 짭조름하다. 오미(五味)가 다 들어있다.

 귀를 기울여 시간의 소리를 들어본다. 침대 밑의 공간은 침묵을 지켜왔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과거를 숨기고 지내온 이 공간의 비밀은 무얼까.. 누군가 속삭이는 것 같은 소리, 마치 공포 영화에 나올 법한 귀신들의 처절한 속삭임이 들리는 건 아닐까.. 지금은 찾기 힘들어진 테이프를 듣던 어린 시절, 나오던 음악이 끝이 나면 빈 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 아무것도 녹음되지 않은 공테이프를 착각으로 볼륨을 높이면 어떤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은 침묵의 소리, 비밀스러운 소리들이 숨겨 녹음되었을 거라는 상상에 계속 돌려 듣던 허공의 소리.. 침대 밑 시간들이 나에게 속삭인다. 어서 오라고.. 자기들의 시공으로 들어오라고..




  시간을 찾으러 잠을 밀쳐내고 주섬주섬 일어난다

 보이지 않는 투명의 과거들이 침대 밑에 있다면, 볼 수 있는 과거의 시간들은 장롱의 어느 구석 서랍에 있다. 그곳에는 과거의 사진들과, 과거의 글씨들, 그림들이 있다. 시간을 가둬둔 타입캡슐인 것이다. 아이들의 사진들그림글씨들이 침대 밑 공간처럼 깊은 시간을 품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과거의 자료들을 들여다보다가 누레진 가장자리를 발견한다. 시간의 색이 눈에 들어온다. 흰 종이가 세월에 태닝 된 누런 자국.. 

누렇고 눅눅한 종이들에서 축축한 냄새가 난다. 시간의 냄새가 나를 싼다.






내가, 아이들이, 남편이 쏘아 올린 총알처럼, 지금도 우리를 태우고 질주하는 기차처럼, 한번 지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시간들이지만 이곳에는 그들의 탄피가, 기적소리가 남아 있다.

서랍에서 꺼낸 타임캡슐을 침대 밑으로 옮긴다.

시간의 박물관을 차다. 

차례차례 전시된 과거의 유물들이 우리 가족의 역사를 말해준다.

내일 가족들과 함께 관람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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