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초파일, 인왕산

시리즈: 국제시간여행자연합 ITA

by 그린

“테러가 한 번 더 있을 것 같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찬물을 뿌린 듯 조용해진 공기를 처음으로 뒤흔든 것은 연수 형의 침착한 목소리였다.


다현이 덤덤히 답했다. “성당에서 그 여자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려요. 암만 생각해도 하나가 더 있을 거 같아요.”


“아, 불길한 소리 하지 마! 얼른 취소해!” 효신이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그 여자가 한 어떤 말이 걸리는데?” 연수 형이 효신의 손을 잡아 내리며 다현을 향해 조곤조곤 물었다.


“.......” 잠시 말이 없던 다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한켠에 놓인 커다란 TV를 향해 다가갔다.


“태블릿 켜서 아무나 본부 서버에 연결 좀 해 줘요. 우리 작전 영상 아직 남아 있죠? 그 여자 체포된 이후에 과거가 또 바뀌지는 않았으니까.”


해솔은 눈치껏 태블릿을 켜 TV와 연결했다. 곧이어 본부 서버에 저장되어 있는 작전 당시의 기록 영상이 큰 TV 화면 가득 재생되기 시작했다.


다현이 손짓했다. “더 뒤로 가 봐. 그 여자 제압당한 이후로.”


해솔이 영상을 뒤로 넘기자 다현이 옷에 달고 있던 기록 장치로 촬영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바닥에 짓눌린 채 일갈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화면을 타고 흘러나왔다.


“지금이라도 유아실 문을 열어……. 너희가 속죄할 길은 그것뿐이다. 모든 과업은 순수한 피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단 말이다.”


“더 뒤로.”


“여기서 우리를 모조리 죽인다 한들 내 뒤를 이어 나의 형제들이, 또 나의 자매들이 성전을 이룰 것이다.”


“그래, 거기.” 다현의 눈빛이 변했다. “다들 여기서부터 잘 들어 봐.”


여자의 부르튼 입술 사이로 뱀의 것과도 같은 쇳소리가 쉭쉭 흘러나왔다.


“건방진 아이야, 너희가 뱀의 머리를 밟은 모습으로 성모상을 백날 만든다 하여 정녕 성모가 뱀의 머리를 밟게 되리라 생각하느냐? 아니다. 뱀은 밟히는 쪽이 아니라 기어올라 목을 조르는 쪽이다. 기어코 뱀이 세상을 집어삼킬 것이다. 석 씨는 초파일이 되어도 세상에 오지 못하고 인왕산 끝자락에 코를 박은 채 엎어질 것이다.”


다현이 태블릿을 확 낚아채 영상을 정지했다. “방금 들었지?”


우리를 슥 둘러본 다현이 말을 이었다. “‘석 씨는 초파일이 되어도 세상에 오지 못한다’잖아. 석 씨는 석가모니, 그러니까 부처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야. 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성모를 걸고 넘어졌듯이 부처를 함께 걸고 넘어지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단순한 도발이 아닌 것 같아.”


모두가 아무런 말 없이 다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다현이 말을 이었다.


“그냥 도발이라기엔 시간과 장소가 너무 명확해. 사월 초파일, 인왕산. 너희 사월 초파일이 언제인지 알아?”


다현은 본부 서버를 닫고 태블릿에 깔려 있는 캘린더 어플을 열었다. 삼월, 사월을 넘겨 오월의 달력을 띄운 다현이 말했다.


“해솔아, 너 어렸을 때 할머니 따라서 절 다녔다고 했지. 너는 알지? 초파일이 무슨 날인지.”


서늘한 눈빛을 한 채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해솔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음력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


다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처님 오신 날. 올해는 5월 첫째 주 수요일이지.”


우리를 찬찬히 둘러본 다현이 힘주어 내뱉었다.


“부처님 오신 날에 뭔가 일을 터뜨릴 것 같아. 높은 확률로 인왕산 또는 그 근처에서. 이번엔 성당이었으니, 다음엔 분명 사찰일 거고.”


의자에서 천천히 등을 뗀 연수 형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효신아. 거기 네 태블릿으로 서울 지도 좀 띄워 봐.”


-


인왕산 | 산

서울 종로구 무악동 산2-1

3호선 무악재역 1번 출구에서 871m


“그 반경으로 불교 사찰이 있는지 검색해 봐. 꼭 불교 사찰 아니더라도, 종교적 의미가 있는 유적이나 관광지 전부 포함해서.”


연수 형이 물었고, 효신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무언가를 분주히 찾는 듯한 손길이 몇 번 반복되었다. 연수 형이 다시 물었다.


“인왕산 근처에 사찰이 있어?”


“...... 네. 있어요.”


“이름이 뭐야, 그 절은?”


효신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음…… 그 절이 아니라 ‘절들’이에요. 인왕산 쪽에 절이 세 군데나 있어요.”


연수 형의 고운 미간에 실선이 생겼다. “화면 돌려 봐. 그 절들 어디 있어? 하나씩 표시해 봐.”


효신은 태블릿 화면을 모두가 볼 수 있게 돌린 뒤 손가락으로 지도의 한구석을 하나씩 가리켰다.


“인왕산 서쪽, 대한불교 천태종 청연사.”


효신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인왕산 동북쪽, 대한불교 조계종 범운사.”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인왕산 남쪽, 대한불교 조계종 영은사.”


지도에 그어진 가상의 선은 뒤집어진 삼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


한국 지부의 지부장실은 우리 지부 건물의 모든 방을 통틀어서 가장 세련된 곳이었다. 인근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통창, 매끈한 석재 바닥과 한눈에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가구들.


정작 그 공간을 부여받은 연수 형은 웬만해서는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덕분에 지부장실은 다른 국가의 지부나 연합본부의 손님들을 맞이할 때에만 응접실처럼 쓰이고 있었다. 외부 손님이 오는 날이면 먼지 쌓인 의자들과 크고 날렵한 대형 테이블들이 각을 맞추어 정돈되었다. 바로 지금처럼.


정중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리 치앙 씨가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로 올리며 입을 열었다.


“....... 지침서가 조작된 것 같다고.”


괜스레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리 치앙 씨는 성격이 화끈하고 불 같기로 유명한데다가 연합에 가지는 애착이 강했다. 연합 내부의 누군가를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들으면 크게 기분 나빠할지도 몰랐다.


제 나이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여유로움을 만면 가득 담은 연수 형이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조작이라기보다는, 중요한 정보가 누락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곤란하니까요. 조사관들도 사람인지라 모든 정보를 한번에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실제로 작전에 나가는 입장에서는 정보 하나하나가 귀중하다는 걸 아시잖아요.”


저럴 때 보면 아버지뻘의 남자를 어려워한다는 말도 다 거짓말 같았다. 옅은 미소를 띤 연수 형은 자신을 주시하는 리 치앙 씨의 빤한 시선을 태연히 받아냈다.


갑자기 소리지르시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감히 같은 연합 소속을 의심하느냐고 불같이 화내실 수도.


침묵이 길어지자 실체 없는 걱정이 앞섰다.


한참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연수 형을 응시하던 리 치앙 씨가 굳게 다물렸던 입술을 열었다.


“....... 이번 일은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 우리 조사관들이 허튼 짓을 할 리는 없지만, 조사관들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고의적으로 지침서를 바꾸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니.”


조사관의 실수일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는 걸 보니 대외적으로는 외부인의 소행으로 치부하려는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건 진상을 확인해 보겠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은 호의적인 반응이었으므로, 우리는 별다른 내색 없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리 치앙 씨가 뒤로 기대어 앉으며 말했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물어볼 사안이 두 개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얼른 끝내고 해산하자고, 난 오랜만에 명동에 가 볼 생각이니까.”


연수 형이 미소를 지었다. “여전하시네요. 매년 꼬박꼬박 오시면서 질리지 않으세요?”


리 치앙 씨가 답했다. “질리긴! 나는 서울 도심의 그 활기가 좋다고. 매일 보는 너희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한결 풀어진 것을 느낀 다현이 연수 형을 향해 눈짓했다. 이야기를 꺼내기엔 지금이 적시였다.


“그럼 놀러 가셔야 하니까 빨리 끝내죠. 여기 이것 좀 봐 주시겠어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서류를 꺼내 리 치앙 씨 앞으로 밀며 연수 형이 말했다.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리 치앙 씨가 서류를 팔락 넘겼다.


그것은 우리가 준비해 둔 녹취록이었다. 지난 작전에서 찍은 영상을 받아 적어 텍스트로 변환해 둔 것이었다.


“3페이지를 봐 주세요. 만물의 눈 소속 여자가 ‘성모와 뱀’을 언급하는 부분부터요.”


연수 형의 목소리가 나긋해졌다. 그 부드러운 태도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눈빛은, 꼭 기회를 노렸다가 순식간에 먹이를 낚아채려는 맹수를 닮아 있었다.


팔락, 팔락. 침 삼키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정적 사이로 리 치앙 씨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연수 형이 천천히 덧붙였다. “리 치앙 씨 눈에도 미심쩍은 부분이 보이시죠? 사월 초파일, 그러니까 부처님 오신 날에 부처가 인왕산에 엎어질 거라는 말이요. 꼭…….”


미세하게 움직이는 리 치앙 씨의 미간을 슬쩍 확인한 연수 형이 말을 맺었다.


“다음 테러를 예고한 것 같지 않나요?”


모두의 시선이 한데 모아졌다. 시선을 받는 주인공인 리 치앙 씨는 서류에 눈을 고정한 채 침묵을 지켰다. 다현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저번 예성1동 성당 테러는 성 발렌티노 축일에 천주교 신자들을 노린 테러였죠. 다음 테러는 부처님 오신 날에 불교 신자들을 노린 테러가 될 거예요.”


연수 형은 가지고 있던 또 다른 종이를 리 치앙 씨 앞으로 슥 밀었다. “인왕산 근처에 있는 사찰들과 각 사찰의 간략한 정보입니다. 인왕산 근처에는 총 세 곳의 사찰이 있고, 세 곳 모두 부처님 오신 날에 행사나 법회 등으로 외부인에게 전면 개방될 예정이라고 해요.”


다현이 쐐기를 박았다. “예성1동 성당 때는 그러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미리 알면 막을 수 있어요.”


다시금 정적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침 삼키는 소리에 더해 심장이 뛰는 소리마저 들린대도 믿을 완벽한 정적이었다.


비약이라고 생각할까? 반쯤 실성한 여자가 내뱉은 말을 쓸데없이 확대해석한다고 여길까?


막연한 문장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들릴 듯 말 듯한 침음성을 내뱉더니, 리 치앙 씨가 아주 느리게 입을 열었다.


“...... 아주 근거 없는 소리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군. 본부에서도 얼추 짐작하던 바가 있었으니.”


연수 형과 다현이 마주보며 눈을 빛냈다. 저건 분명히 긍정의 신호였다.


그러나 리 치앙 씨의 다음 말이 이어진 순간, 우리는 의아함에 휩싸여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생각은 포기하도록 해. 연합은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아무런 사전 행동도 취하지 않을 계획이니.”


리 치앙 씨가 결연한 눈으로 내뱉었다. 저런 눈빛을 할 때의 리 치앙 씨는 결코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음? 내 말이 알아듣기 어려웠나? 그럼 다시 말하지.”


리 치앙 씨는 체면치레를 하느라 놓아 두었던 찻잔을 느긋하게 집어들었다.


다 식어 버린 차를 홀짝이며 리 치앙 씨가 분명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는 개입하지 않아.”


“........ 왜죠?”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솟구쳤지만, 너무 많은 물음표가 목구멍을 틀어막는 바람에 정작 우리가 내뱉을 수 있던 말은 딱 그 멍청한 한 마디가 전부였다.


리 치앙 씨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변했다. 아시아 연합본부의 최고 직책을 괜히 꿰찬 게 아니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위압감을 내뿜는 눈빛을 하고서 리 치앙 씨가 말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왜 이 일에 개입하려는 거지? 아니, 질문을 바꾸지. 너희가 지금 뭘 할 수 있지?”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효신이 재빨리 받아쳤다. “뭘 할 수 있냐니요? 당연히 테러가 일어날 걸 미리 알면…….”


리 치앙 씨는 부드러운 눈으료 효신을 바라보며 말을 가로막았다. “알면?”


달각,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리 치앙 씨의 무감한 목소리가 드넓은 지부장실 안을 채웠다.


“부처님 오신 날, 인왕산 근처. 시기도 장소도 알았으니 이제 어쩔 텐가? 인왕산 근처에 사찰이 세 군데가 있다고 했지. 세 군데의 사찰을 모두 돌아볼 생각인가?”


“필요하다면 그래야죠.” 다현의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를 마주보는 리 치앙 씨의 시선에는 더더욱 흔들림이 없었다.


“돌아본 다음엔? 그 다음엔 어떡하려고? 한 군데도 아니고 무려 세 군데나 되는 사찰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누가 수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는지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감시할 건가? 아니면 당신네들이 테러의 표적이 되었으니 당장 행사를 취소하라고 사찰에 연락해 미친놈 취급이라도 받을 텐가? 그도 아니면 경찰에 신고라도 할 건가? 우리가 일어나지 않은 테러를 미리 알아차렸다고.”


다현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리 치앙 씨가 다현을 향해 물었다.


“다시 묻지. 이번 일에 개입하려는 목적이 뭔가?”


두 눈 가득 경계를 드리운 다현이 천천히 말했다. “사람들을 살려야죠.”


“아니지.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궁극적으로 그놈들을 잡아내야지. 그래야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그럼 그놈들을 잡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나?”


답변을 기다리듯 다현이 침묵을 지켰다. 리 치앙 씨는 찻잔의 손잡이를 톡 두드리며 내뱉었다.


“기다려야지.

일어나지 않은 일로는 꼬리를 잡힐 수 없지. 그러니 일어나지 않은 일의 범인을 어떻게 잡겠나?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로는 얼마든지 꼬리가 잡힐 수 있지.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이 남아 있을 테니 말이야. 그러니 일어나지 않은 일의 범인을 잡는 것보다, 이미 일어난 일의 범인을 잡는 게 오백 배는 더 쉽지.”


다현이 무감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일이 터질 때까지 기다리자고요?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더 적은 수의 사람들로 미끼를 놓고 기다리자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문제될 게 있나? 미끼가 죽지 않는다면.”


리 치앙 씨는 비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있었다. “피해자들은 죽지 않아.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 범인을 잡아내면, 그 사건도 결국엔 없던 일이 되니까.”


“....... 겪지 않아도 될 죽음을 겪는다는 건 똑같아요. 일어날 걸 뻔히 알면서도 가만히 있자고요?”


다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 치앙 씨의 단호한 목소리가 귀에 내리꽂혔다.


“미래를 모르는 우리가 얼마나 큰 힘이 있을 것 같나?”


그 말이 어찌나 울림이 컸던지, 한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해솔이 놀라서 조용히 눈을 들었다.


리 치앙 씨가 진중한 투로 거듭 물었다.


“우리가 지금껏 셀 수 없이 많은 참사를 막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사건이 발생한 과거로 가면, 우리는 ‘미래를 아는 사람들’ 이지. 우리의 힘은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미래를 몰라.”


그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기는 했다. 타임워커들은 미래로 잘 향하지 않았다. 미래는 현재에 절대적으로 종속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사소한 행동이라도 미래를 크게 바꿀 수 있었고, 미래는 우리가 관찰할 때마다 시시각각 달라졌다. 변하지 않는 미래라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과거는 아니었다. 과거는 우리가 손대지 않는 한 그 자리에 그대로 변함없이 자리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채로, 벌어지지 않은 일은 벌어지지 않은 채로.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리 치앙 씨가 똑같은 말을 했다. “우리가 암만 시간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한들, 우리는 미래를 확신할 수 없지. 하지만 과거는 달라. 우리는 과거를 확신할 수 있어. 그러니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막기보다는, 일이 일어나기까지 기다렸다가 우리가 모든 것을 확실히 알게 되면 그때 ‘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 일을 구제하자고 하는 것이지.”


리 치앙 씨는 말을 이었다.


“사건이 하나씩 터질 때마다 ‘만물의 눈’의 형체는 점점 뚜렷해지고 있지. 우리가 매 사건 속에서 그들을 마주하니까. 그럼 반대로, 사건이 터지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겠나? 한국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는 말이 있지 않나? 호랑이 굴이 어디인지 모르는데 호랑이를 어떻게 잡겠나?”


다현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네가 올곧은 성품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괜한 의무감은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군. 알면서도 막지 못한 게 아니라, 막기 위해 모르는 체하는 거니까.”


다현을 어르듯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리 치앙 씨가 덧붙였다.


“약속하지. 일단 사건이 발생하고 나면 연합본부 차원에서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만물의 눈’을 잡기 위해. 그리고 그 사건을 없었던 일로 되돌리기 위해.”


-


깊은 밤이었다. 지부의 건물 전체를 통틀어 깨어 있는 사람은 나와 다현, 그리고 연수 형밖에 없을 것이었다.

우리는 어둑한 스탠드 조명 하나만을 밝혀 둔 채 식탁에 마주 앉아 있었다. 다현의 앞에는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녹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그거 마시면 잠 더 안 오지 않아? 잠 안 와서 나왔다며.”


내가 묻자 다현은 찻잔 손잡이를 살며시 잡았다가 놓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렇게 된 거 그냥 밤 새려고.”


다시 정적이 흘렀다. 말없이 녹차에서 올라오는 한 줄기 김을 응시하는 다현을 바라보며, 연수 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마음은 알겠어. 네가 불안해하는 이유도 알겠고. ……. 그렇지만 들어 보니 리 치앙 씨 말도 맞는 것 같아.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우린 그걸 완전히 막을 방법을 몰라.”


다현은 조용히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한 모금을 넘기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 그 말이 맞는 거.”


그 목소리는 딱히 긍정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그대로 입을 다문 연수 형은 한동안 말없이 다현의 찻잔 안에서 찰랑이는 녹찻물의 표면을 응시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연수 형이 말했다.


“....... 어떤 일은 막지 않는 게 더 낫기도 해. 결과적으로는.”


찰나였지만 연수 형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치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다현이 무언가를 느꼈는지 초점 없던 눈을 들었다.


“알아. …… 나도 알아. 일이 일단 일어나야 더 빈틈없이 막을 수 있다는 거. 리 치앙 씨 말에 틀린 부분이 없다는 거.”


그런 다현을 보며 연수 형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다현은 짧은 숨을 내뱉은 뒤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러고는 다시 식탁 위로 손을 내렸다.


“나는 그냥……”


기약 없는 적막 끝에, 다현이 다시 말했다.


“나는, 알면서도 막지 못하는 게 정말 싫어. 그런 무력감이 싫어.”


그 말을 하는 다현은 계속해서 손끝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마치 불안해하는 사람처럼.


그건 맹세코 내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다현의 모습이었다. 침착함과 차분함을 빼면 남는 게 없는 사람이 그토록 동요하는 모습은.

그러니까 꼭, 깊이 묻어 두었던 트라우마를 누군가 건드리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은.


그날 새벽, 다현은 내 방의 문을 몰래 두드렸다. 5월 첫째 주 수요일 이후의 미래를 잠깐만 보고 올 수 있게 내 손을 한 번만 빌려 달라는 부탁을 들고서.


어둑한 방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정확히 삼 초가 지나자 둘이 서 있던 방 안에는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아침이 될 무렵 다현은 돌아왔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래는 알 수 없었다.


“미래가……. 계속 바뀌어. 어느 절이 당하는 건지 모르겠어.”


미래에서 귀환하자마자 다현이 맨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5월 첫째 주 목요일로 갔더니 청연사가 불탄 후였어. 그런데 그 다음날로 가니까 불에 탄 건 범운사가 되어 있었어. 이 주 뒤로 갔더니 그게 다시 영은사로 바뀌어 있었어…… 미래를 옮겨 다닐 때마다 피해를 입는 사찰이 바뀌어. 영은사였다가, 청연사였다가, 다시 범운사였다가. 절 두 곳에서 한꺼번에 불이 나기도 하고.”


그것이 가리키는 바는 명백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놈들은 계속 계획을 수정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느 절에서 테러를 벌일지 이리 재고 저리 따지면서.


그러니 일어나기 전에는 결코 막을 수 없었다. 사월 초파일에 예정된 비극은.


-


- 우리 타임워커들은 과거를 밥 먹듯이 오가지. 그러나 미래로는 잘 향하지 않는단다.


오래전 리 치앙 아저씨가 지금보다 더 어렸던 나를 앉혀 두고 가르쳐 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내 앞에 먹음직스러운 빵과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놓은 리 치앙 아저씨가 내게 말했다.


- 자, 봐라. 여기 빵과 주스가 있지. 둘 중에 뭘 먹겠다는 마음이 드니?


나는 잠시 고민하다 빵을 골랐다. 리 치앙 씨가 웃으며 말했다.


- 그래, 방금 너는 빵을 먹겠다고 결심했지. 그럼 여기서 3분 후의 미래로 가면 어떻게 될까?


- 제가 빵을 먹고 있겠죠?


- 그렇지. 미래의 너는 빵을 먹고 있겠지. 그런데 말이다, 안 그래 보이지만 사실 이 빵은 방금 내가 바닥에 떨어뜨렸다가 다시 주웠단다. 그럼 다시 묻지. 너는 둘 중에 뭘 먹겠다는 마음이 드니?


나는 리 치앙 씨가 너무도 당연한 것을 묻는다고 생각하며 대꾸했다.


- 주스요.


그럼 3분 후의 미래로 다시 가면 어떻게 될까?


- 제가 주스를 마시고 있겠죠.


- 바로 그거야. 10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3분 후의 미래가 바뀌어 버렸지.

내가 ‘이 빵은 땅에 떨어뜨린 빵이다’ 라고 말하기 직전에 다른 타임워커가 네 미래를 엿보았다면, 그 사람은 ‘네가 빵을 먹는 미래’를 봤다고 말하겠지.

하지만 내가 ‘이 빵은 땅에 떨어뜨린 빵이다’ 라고 말한 직후에 미래를 엿보고 온 타임워커는, ‘네가 주스를 먹는 미래’를 봤다고 할 거야. 맞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 치앙 씨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얼추 알 것도 같았다.


리 치앙 씨는 눈을 번뜩이며 내게 일렀다.


- 우리가 미래로 잘 가지 않는 이유를 알겠나? 미래는 너무 자주, 너무 쉽게 바뀌지. 네가 10초만에 마음을 바꿈으로써 네 미래가 바뀐 것처럼.

그래서 미래를 엿보는 것은 노력 대비 효과가 떨어져. 내가 엿보고 온 미래가 언제 바뀔지 모르거든.


- 그러니 이제는 잘 알아들었겠지? 미래는 현재에 귀속된다는 것을. 미래의 너는 현재의 네게 종속된다는 것을.

금,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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