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국제시간여행자연합 ITA
오월까지의 시간은 비교적 평온하게 흘러갔다.
벚꽃이 한 차례 피었다 졌고, 그 뒤를 이어 라일락이 피었다가 짙은 향기를 남기고 시들었다.
굵직한 사건이 없어 큰 작전도 없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간만의 평화를 조용히 만끽했다.
다만 그 평화는 기간제 평화였다.
사월 초파일이 되면, 예견된 참사가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었으니까.
“몇 시일까? 낮일까, 밤일까?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낮일 확률이 높겠지?”
다현은 내 안락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손끝으로 의자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세 곳 중에 대체 어디일까…… 청연사? 범운사? 아니면 영은사?”
그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듯 들렸지만, 속에 희미한 불안감을 감추고 있었다. 천천히 흔들리던 다현의 안락의자가 멎었다.
“설마 세 군데 전부 당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다현을 돌아보며 답했다. “나한테 물어봐도 나는 모르지.”
그제야 다현은 생각하기를 멈추고 맞은편에 앉은 내게 시선을 주었다. 평소답지 않게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는 다현을 보며 나는 안심시키듯 말했다.
“벌써부터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어차피 내일이면 다 알게 될 텐데 뭐.”
지금은 5월의 첫째 주 화요일 밤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들릴 듯 말 듯한 날숨을 내쉰 후 다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지.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응. 그런 건 내일 생각하고 오늘은 일찍 자.”
나는 다현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다현이 나를 보며 희미하게 마주 웃었다.
“그래야겠다. 내일부터는 다시 바빠지겠네. 너는 언제 잘 거야?”
“너 나가면 슬슬 자려고 했지. 내일은 좀 일찍부터 깨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아, 미안. 내가 방해했네. 나는 이제 갈 테니까 너도 얼른 자.”
옷자락을 갈무리한 다현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다현을 따라 나가며 배웅하려는데, 저만치에서 갑작스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쾅, 쿠당탕.
계단을 쿵쿵대며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대로 지나치겠지 싶던 그 다급한 발걸음 소리는 내 방문 앞에서 별안간 멈추었다.
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활짝 열렸다.
“언니!”
문을 열어젖힌 효신이 다현을 보고는 냅다 외쳤다.
한 박자 늦게 다현의 뒤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효신이 덧붙였다. “뭐야, 오빠도 같이 있었네?”
“효신아. 여기 내 방이야.”
내 조용한 목소리는 효신에게 가볍게 무시당했다.
“둘 다 얼른 내려와 봐. 나머지는 다 모여 있어.”
서두르라는 듯 손짓하는 효신을 우리는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몸을 홱 돌려 앞서가던 효신이 우리를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빨리 따라와. 영은사에서 불이 났어.”
나와 다현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불이 났다고? 지금?”
“그렇다니까! 절 전체가 싹 불타서 난리도 아니야.”
나와 다현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눈을 마주친 우리는 곧장 효신을 따라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
- 속보입니다. 종로구 무악동에 있는 사찰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화재의 진원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고의에 의한 방화로 추정되며……
- 거센 바람에 의해 화재 진압에 어려움이 있는 상황……
- 사찰에 상주하고 있던 스님 12명과 사찰을 방문한 불교 신자 및 관광객 6명이 중상을 입은 채 구조되었으며, 나머지 인원 18명은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소방 당국은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뉴스 채널을 넘기는 족족 화염에 휩싸인 사찰의 모습이 등장했다. 계단을 막 뛰어내려온 다현이 다급히 물었다.
“그래서 셋 중에 어디야?”
뉴스에 집중하고 있던 연수 형이 답했다. “영은사. 인왕산 남쪽에 있던 곳.”
우르릉 소리를 내며 나무로 된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곱게 칠해진 단청이 제 색을 잃은 채 바닥으로 떨어져 부서졌다.
뉴스 속보 화면의 아래쪽에 띄워져 있던 자막이 바뀌었다.
영은사 화재 사망 3명… 소방당국 여전히 진화 시도 중
“벌써 나왔어, 사망자가. 화재가 시작된 게 20분 전쯤이랬는데.”
턱을 괸 채 심각한 눈빛으로 화면을 응시하던 연수 형이 조용히 내뱉었다. 우리 모두는 TV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왜 지금 일이 터진 거예요? 분명 부처님 오신 날일 거랬잖아요.”
효신이 의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우리라고 한들 답을 알 리 없었다.
말없이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해솔이 천천히 덧붙였다.
“...... 왜 지금이지? 상식적으로도 부처님 오신 날 당일에 일을 저지르는 게 더 맞는데. 그날이 사람도 훨씬 더 많을 거고, 이목도 주목될 테니까.”
범행 시각이 앞당겨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튀어오르는 불티를 눈에 담으며 나는 생각했다.
원래부터 전날 밤에 불을 지르려는 계획이었을까? 영은사가 부처님 오신 날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하도록. 아예 미리 초토화시킬 수 있도록.
아니면 누군가 언질을 준 걸까? 너희를 추적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계획을 짐작하고 있으니, 거사를 앞당기라고.
언질을 대체 누가 줄 수 있단 말인가. 인왕산 근처 사찰이 불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건 오직 우리뿐인데.
두 갈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미허가 타임워커가 있거나,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거나.
집중하고 있던 사이 자막이 또 다시 바뀌었다.
영은사 화재 사망자 6명 확인… 12명 여전히 소재 불명
“남은 열두 명도 사실상 사망인 걸까요?”
해솔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묻자 연수 형이 답했다.
“그럴 확률이 높다고 봐야지.”
긴 숨을 내쉰 연수 형이 몸을 일으켰다. “오늘 잠은 다 잤네. 우리 커피믹스 어디다 뒀더라?”
-
화재가 진압된 것은 아침 아홉 시가 다 되어서였다. 유서 깊은 고풍스러움을 자랑하던 영은사 일대는 모조리 새까맣게 타서 알아볼 수 없게 변해 버렸다. 오색 단청이, 엄숙하던 처마가, 위엄을 드러내며 서 있던 올곧은 기둥이 너나할 것 없이 재가 되어 내려앉았다.
당연히 영은사는 부처님 오신 날을 제대로 맞이할 수 없었다.
부처님 오신 날의 동이 트기도 전에 참사가 벌어지니, 서울 시내의 다른 사찰도 덩달아 분위기를 살폈다. 많은 행사와 법회가 비공개로 치러지거나 전면 취소되었다.
“석가모니가 초파일이 되어도 세상에 오지 못할 거라더니. 이런 걸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나.”
해솔이 동요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밤을 꼴딱 샌 채 살짝 붉어진 눈으로 뉴스 기사를 연신 검색하던 다현이 거들었다.
“생각해 보면 영은사일 가능성이 제일 크긴 했네. 인왕산 끝자락에 코를 박은 채 엎어질 거라고 했으니까. 통상적으로 북쪽을 위로 보니까, 위에서부터 내려와 고꾸라진다면 남쪽이겠지.”
때마침 화장실 문이 열렸다. 막 세수를 마치고 나오던 연수 형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물었다.
“아직 알림 온 거 없어? 구제 대상 건 선정 알림 안 왔어?”
“아직이요. …… 이 양반은 뭐 하는 건지 모르겠네. 일이 터지자마자 전폭적으로 지원해 줄 것처럼 호언장담을 하더니.” 태블릿을 두드린 해솔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 양반’이란 물론 리 치앙 씨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 양반은 좀 희한한 징크스가 있더라. 우리가 욕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그제서야 일을 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말이 딱 맞아.”
연수 형의 말이 해솔이 픽 웃음을 뱉었다. “성격만 놓고 보면 호랑이 같긴 하죠.”
“어?” 효신의 목소리가 모두의 귀를 파고들었다.
자기 태블릿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며, 효신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호랑이, 진짜 왔는데요. 방금 알림 하나 떴어요.”
우리는 얼른 걸음을 옮겨 효신의 태블릿 가까이 모여들었다.
ITA 최고위원회에서 알립니다. 지난밤 23시 12분 경 대한민국의 서울특별시에서 발생한 ‘대한불교 조계종 영은사 방화 사건’을 구제 대상 건으로 선정합니다. 현재 사전 조사관이 파견되었으며, 사전 조사가 마무리되면 작전 수행을 위한 지침서가 배포될 예정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자기 얘기 하는 거 어떻게 알았지? 진짜 도청장치라도 심어 뒀나?” 연수 형이 젖은 머리의 물기를 털어냈다.
“그럼 잠깐 쉬고 다시 모일까요. 조사관 돌아오려면 서너 시간은 걸릴 테니까. 잠을 못 잤더니 죽을 거 같아요 지금.” 해솔이 피곤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효신이 손을 들어 해솔을 막았다. “아니, 오빠. 잠깐만 있어 봐.”
막 일어나려던 해솔도,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연수 형도 그 말에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태블릿에서 눈을 뗀 효신이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수신함에 방금 들어온 문서가 하나 있어. 지침서는 아닌데.”
“지침서가 아닌 문서가 들어왔다고?” 연수 형이 효신의 곁으로 성큼 다가섰다.
효신이 얼떨떨하다는 투로 말했다. “어…… 지침서는 안 나와 있는데 배정 인원이 미리 정해져 있어.”
“누군데?”
“‘대한불교 조계종 영은사 방화 사건’ 작전의 참여 인원을 다음과 같이 배정한다. …… 요원 서해솔, 박세민.”
해솔과 내가 순식간에 바위처럼 굳어 버렸다. 난감하다는 듯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효신이 태블릿을 연수 형에게 떠넘겼다.
“오빠가 대신 읽어 줘요.”
연수 형이 나와 해솔의 눈치를 번갈아 보더니, 태블릿을 받아들고 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열심히 눈을 굴리는 연수 형의 표정만으로는 문서의 내용을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몇 년처럼 느껴지는 몇 분이 지난 후, 연수 형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일단 간략하게 사건 배경을 먼저 설명할게.”
표정이 사라진 해솔과 내가 연수 형을 빤히 응시했다. 우리 사이에 낀 효신과 다현이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태블릿을 한 손에 든 채 연수 형이 설명을 시작했다.
“뉴스에도 나왔듯이 사건은 밤 11시 12분쯤 발생했어. 작전을 수행하려면 사건이 발생한 시간대로 가서 현장을 살펴야 하잖아? 그런데 사건이 발생한 시간대가 늦은 밤이고, 그 시간에 외부인이 사찰로 진입하면 의심을 살 거 아냐. 그래서 밤에 사찰 내부를 돌아다녀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을 방안을 준비했다고 했어.”
“사찰 내부를 돌아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방안……?” 내가 중얼거렸다.
해솔이 팔짱을 낀 채 툭 내뱉었다.
“그게 뭔데요? 뭐 템플스테이 이런 건 아닐 거 아냐.”
연수 형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 왜 말이 없어요, 형?”
연수 형의 침묵이 길어지자 해솔이 물었다.
“형?”
해솔의 재촉에 그제야 연수 형이 입을 열었다. “본부가 책임질 테니까 걱정 말고 몸만 가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덤덤하던 해솔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당혹이 스몄다. “뭐? 템플스테이가 맞다고?”
연수 형은 다시 대답 대신 옅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템플스테이라고? 진짜?”
마음이 급해지면 무의식적으로 반말을 하는 버릇이 튀어나온 걸 보니 해솔도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이었다.
연수 형이 타이르듯 말했다. “신청도, 결제도, 교통편도 전부 본부에서 준비해 줄 테니까 마음 놓고 있으래. 여기 그렇게 적혀 있어.”
정말 템플스테이를 가라고? 내 속을 읽기라도 한 듯 해솔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꺼냈다.
“농담이지? 설마 본부 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게 이딴……. 이런 뜻이었어?”
“템플스테이 1박이 5만원에서 7만원 사이인데, 부처님 오신 날 전날은 신청 인원이 많아서 7만원 대일 거래. 전액 지원해줄 테니 걱정 말고 가라고-.”
“아니, 밤에 몰래 들어가면 되잖아! 굳이 템플스테이를 해야 돼?” 해솔이 머리에 양손을 얹은 채 외쳤다.
연수 형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사찰 정문이 10시면 잠긴대. 야밤에 몰래 담 넘어서 들어갔다가 오만 사람들 다 불러모을래? 아니면 아늑한 절간 아랫목에 드러누워 있다가 여유 있게 둘러볼래?”
“........”
하, 하고 해솔이 맥 풀린 웃음을 내뱉었다.
“인왕산 근처가 공기도 좋고 물도 맑대. 이왕 가는 거 힐링하다 오래. ……. 여기 그렇게 적혀 있어.”
연수 형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왜 삼십 분째 그러고 있어?”
가만히 앉아 수신함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계속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는 나를 향해 효신이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저 웃어 보였다. 태연한 체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속으로는 초조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해솔이랑 같이 작전을 가라고? 나만 보면 그렇잖아도 쌀쌀맞은 애가 무슨 시베리아 북풍처럼 변하는데, 그런 애랑 단 둘이서?
그것도 그냥 작전이 아니라 템플스테이를?
속이 다시 더부룩해졌다. 머리가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했다. 물론 해솔은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탐탁지 않아 하고 있겠지만……
띠링.
무섭고도 반가운,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태블릿 화면을 눌렀다.
본부 수신함에 새로운 문서가 도착했다. 조사관이 파견된 지 정확히 다섯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내가 모두에게 들릴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외쳤다.
“지침서 떴어요.”
곧이어 방문에서, 위층에서 하나둘 얼굴들이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효신과 연수 형이 순서대로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다현이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가장 늦게 도착한 것은 느지막이 걸음을 뗀 해솔이었다. 서늘한 얼굴로 발을 질질 끄는 모양새가 누가 봐도 작전을 나가기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다현이 가까이 앉은 사람에게만 느껴질 정도의 은은한 조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어디 한 번 보자. 우리가 알면서도 막지 못한 사고는 어떤 사고인지.”
나는 문서를 눌렀다. 그리고,
“음?”
의아한 목소리가 절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내게 이목을 집중하고 있던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효신이 나를 재촉했다. 나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바보처럼 느껴지는 얼굴로 문서를 계속 새로고침했다.
암만 봐도 내가 본 문서는 조금 이상했다. 내 눈이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 이거 지침서 맞나? 뭔가 이상한데.”
확신 없는 내 목소리에 다현이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는데?”
나는 고개를 들어 모두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아니, 지침서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야. 리 치앙 아저씨가 나한테 냅다 말을 걸고 있어.”
지침서, 아니 지침서 비스무리한 수상한 문서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
나다, 리 치앙. 인사는 생략하지.
지침서가 조작되었을 수도 있다고 너희가 하도 의심하는 통에 이번에는 내가 직접 쓴다.
다른 사람 손 안 타는 걸 확인했으니 안심하고, 혹시라도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면 내게 직접 문의하는 게 좋겠군. 잘 외운 다음 문서는 흔적 없이 파기하도록.
이번 작전에는 해솔, 세민 두 사람이 배정되었다고 들었다. 어린 시절에 할머니 따라 절 좀 다녔다더니 그게 이렇게 풀리는 날도 오는군. (내가 배정한 게 아니니 화는 다른 데 가서 내도록 해.)
작전의 목표는 하나다. 불을 낸 자식이 누구인지 찾아내.
화재를 막고 당장의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정신이 팔릴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누가 불을 냈는지 알아내는 게 먼저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면 더 과거로 가서 그놈을 잡아낼 수 있고, 결국 화재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로 되돌릴 수 있으니까. 순서를 헷갈리지 말라고.
아마 뉴스든 뭐든 찾아봤으면 알겠지만, 그날 화재가 발생한 영은사에서 자력으로 탈출했거나 성공적으로 구조된 사람은 총 18명이다. 사찰에 상주하고 있던 스님 12명, 사찰을 방문한 불교 신자 및 관광객 6명. 나머지는 전원 사망했지.
그럼 범인은 이 18명 안에 있을 확률이 높겠지? 너희가 보기에도.
범인이 불을 지른 다음 얼빠진 채로 구경이나 하다가 죽었을 가능성은 없으니 말이야. 누구보다 빨리 몸을 피했겠지.
문제는 이 18명 중 대체 누가 범인이냐 하는 것인데,
아무래도 스님들보다는 그날을 기해 절에 유입된 외부인 중 범인이 있으리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게다가 불이 처음 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절 안쪽의 ‘약사전’이라는 전각인데, 이 전각은 스님들이 머무는 공간과는 완전히 정반대편이야. 절의 양쪽 끝과 끝이라고.
그럼 그날 절에 머물고 있던 외부인 6명 중 범인이 있을 것이라고 추론해 보는 것이 가능하지.
6명이면 해봄직하지 않나? 예성1동 성당 때에 비해 용의자 풀이 대폭 줄어든 셈인데.
이 양반이 또 자기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네, 하고 꿍얼거리고 있을까 봐 얼른 덧붙이자면, 외부인은 6명이었지만 실질적인 수사 대상은 2명뿐이야.
왜냐하면 그 6명 중 3명은 어린애들이거든. 인근의 불교 어린이집에서 신청형 현장체험학습을 나온 7세 반 인원 3명이지.
그럼 어린애들을 뺀 나머지 2명 중 1명이 누구인지도 짐작이 가겠지? 바로 그 애들을 통솔하고 있던 어린이집 교사야. 만 25세 여성이라더군. 자신이 맡은 어린이들과 같은 숙소를 썼고, 밤 10시 이후로는 숙소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목격되지 않았다고.
그래서 우리는 나머지 1명에 집중하고 있네. 그가 누구냐 하면, 혼자 템플 스테이를 신청해서 영은사에 머물고 있던 30대 남성이야.
직업은 경찰이라더군. 신기하지 않나?
또는, 수상하지 않나?
그게 너희를 템플 스테이 명목으로 영은사에 집어넣으려는 이유야.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너희는 그 경찰과 같은 숙소에 배정될 테니,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든 친한 척하며 그 방에 방문하든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을 좀 파 봐. 현 시점에서 가장 범인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니.
다시 한 번 명확히 정리해 줄 테니 아래 순서를 따라 작전을 수행하도록.
1. 사건 당일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의 시간대로 진입해라. 너희 이름으로 신청된 템플 스테이는 저녁에 시작해서 다음날 저녁까지 절에 머물도록 되어 있는 1박 2일 프로그램이니까. 일찍 도착해서 조금 더 여유를 두고 절 내부를 탐색하는 것도 좋겠지.
2. 말했듯 방화는 밤 11시 12분 경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니 밤 11시 2분에 맞추어 발송되도록 예약 문자를 걸어. 수신인은 119로 해서. 인근의 가장 가까운 소방서에서 영은사까지 대략 10분에서 15분 정도가 걸리니, 불이 시작되는 시간에 적절히 맞추어 소방차가 절 앞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3. 방화 시간이 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서 어떤 새X…… 아니, 어떤 놈이 불을 질렀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너희의 임무다. 범인을 찾지 못하고 화재가 시작되어 불이 번져 나가면 일단은 후퇴해. 현재로 귀환하든, 방화가 시작되기 이전의 시간대로 도망치든. 앞서 말했듯 화재를 막는 것은 일단 이번 작전에서는 최우선 목표가 아니니, 살아남는 게 먼저다.
4. 너희와 같은 숙소에 배정될 30대 경찰 남성을 예의주시해라. 무슨 핑계를 대서든 그의 방에 들어가서 친목을 도모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그가 방 밖으로 나와서 무엇을 하는지 몰래 감시라도 해.
5. 그럴 가능성은 우선 낮게 보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남성이 범인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 수도 있을 테지.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절에 머물고 있던 다른 사람들 - 스님들, 불교 어린이집의 교사와 아이들 - 에게로 수사망을 넓히도록.
그러나 절 내부를 탐색하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수사를 중지하고 현재로 즉시 귀환해라.
‘무언가 이상하다’ 라는 것은 절 내부의 환경이 통상적인 불교 사찰과는 조금 다르다거나, 불교의 상징이 아닌 것이 존재한다거나 하는 경우를 말한다. 아래에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도록 하지.
- 불상의 눈이 위를 쳐다보고 있을 경우 즉시 그 전각을 떠나라.
불상의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거나, 살짝 내리깐 채 아래를 응시하고 있거나 또는 눈을 감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눈동자가 위를 향하고 있는 불상은 들어 본 적도, 마주쳐 본 적도 없다.
- 불상의 수인(손의 모양)이 이상할 경우 마찬가지로 즉시 그 전각을 떠나라.
불상은 그것이 어떤 부처를 표현한 것인지에 따라 주로 취하는 수인이 다르다. 하지만 불상의 손이 듣도 보도 못한 괴이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불상이 취할 수 있는 올바른 수인이 아니라는 예감이 강렬하게 들 경우 (잘못된 수인의 경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반드시 찾아들 것이다) 즉시 그 자리를 피해라.
- 부처나 보살이 잘못된 물건이나 동식물과 함께 놓여 있을 경우 의심해라.
문수보살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 은 왼손에 연꽃을 들고 사자에 올라탄 모습이어야 한다. 손에 든 꽃이 연꽃이 아닌 다른 꽃이거나, 올라탄 동물이 사자로 보이지 않을 경우 의심해라.
보현보살 (실천행을 상징하는 보살) 은 연꽃 모양의 단인 연화대에 올라 있거나 코끼리를 탄 모습이어야 한다. 보현보살이 코끼리를 짓눌러 사로잡고 있다거나, 타고 있는 동물이 코끼리가 아닌 살쾡이 따위의 동물일 경우 전각을 떠나라.
약사여래 (병을 고쳐 주는 부처) 의 손에는 약병이 들려 있어야 한다. 약사여래의 손에 약병이 아닌 다른 물건이 들려 있다면 자리를 떠라. 만일 그것이 가위, 칼, 내지는 다른 쇠붙이 따위일 경우 당장 그 자리를 벗어나 현재로 도망쳐라. 병을 고치는 부처의 손에 사람을 해하는 물건을 대신 쥐어 놓았으니 아주 악질이다. 이것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도망쳐라.
- 탱화가 온통 검은색일 경우 즉시 도망쳐라.
검은색만을 사용하여 그린 탱화는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있을 수가 없다. 위에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그 정도로 명백히 눈에 띄며 악의가 드러나는 변형을 가했는데도 아무도 막거나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에서 너희가 그 사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런 류의 탱화가 확인되는 순간 지체 말고 다른 시간대로 도망쳐라.
- 보살이 가운데에 있으며 부처가 그 양 옆을 지키고 있을 경우 즉시 작전을 포기하고 귀환해라.
부처 상과 보살의 상을 함께 협시할 경우 그것은 대개 중앙에 부처 상이 있고, 그 옆을 보살 상이 지키는 형태여야 맞다. 반대로 보살을 부처가 지킨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상징을 거꾸로 돌려 놓는 것은 그 종교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성당에서 십자가가 거꾸로 걸려 있다고 상상해 봐라. 사이비가 이런 행위를 대놓고 벌이고 있는데도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이미 사찰에 침투한 지 오래되었거나, 어쩌면 사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실은 전부 한패일 가능성마저 존재한다. 당장 작전을 포기하고 현실로 도망쳐 와라. 그런 상황에서는 너희가 손을 쓰기는커녕 도리어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할 수도 있으니.
내가 당부하고 싶은 사항은 우선 이 정도다. 다른 놈이 중간에 끼어들 수 없도록 내가 직접 작성해서 바로 송부하는 문서이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이상한 부분이 있거나 훼손된 부분이 있을 경우 연락하도록.
무운을 빈다. 현재에서 다시 만나지.
너희의 시간에 행운이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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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하면 옆방에 냅다 들어가서 모르는 남자를 대뜸 심문해 봐라 이거야? 내가, 경찰을?”
지침서 같지 않은 지침서를 끝까지 훑어내린 해솔이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연수 형이 태연히 끼어들었다. “심문해 보라는 것까지는 아니고. 적당히 친한 척 하면서 정보 좀 캐 보라는 뜻이겠지.”
“그니까 그냥 심문이 아니고 유도신문이다?”
해솔이 냉소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무슨 수로 그 사람이랑 친해져? 한밤중에 냅다 남의 방문 열고 들어가면 누구든 참도 좋아하겠다.”
잠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효신이 손가락을 맞부딪히며 해솔에게 말했다.
“오빠, 사주 볼 줄 안다고 해. 절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그런 데도 관심 좀 있지 않나? 재미로 사주풀이 해 줄 수 있는데 들어 볼 생각 있냐고 물어봐.”
다현이 거들었다. “오, 그거 괜찮은데.”
이번에는 연수 형이 책상을 짚고 상반신을 해솔 쪽으로 휙 들이대며 말했다.
“아니다, 해솔아. 너 귀신 본다고 해. 내가 귀신 볼 줄 아는데 당신 옆에 계속 따라다니는 귀신이 있는 것 같다 하면서 말 걸어 봐.”
다현이 또 다시 거들었다. “오, 해솔아 그거 괜찮다. 귀신 보인다고 해. 너 안색 정도면 충분히 믿어 줄 거 같아.”
그렇지 않아도 하얀 편인 해솔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건 해솔이 화가 났을 때의 신호라는 걸 우리 모두는 알았다.
이젠 완전히 싸늘하기 짝이 없어진 목소리로 해솔이 내뱉었다.
“그니까 부처님 오신 날 전날에, 인왕산으로 템플 스테이를 하러 들어가서, 사주 보는 사람 흉내를 내거나 귀신 보는 척을 하라 이거지. X나 끝내주는 계획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