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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4. 2021

삼 년 마무리

졸업여행과 전야제

입시 결과가 발표되고, 저마다의 길을 찾아


겨울은 어김없이 작년과 똑같이 찾아오고, 이맘때 학교에 눈이 소복히 내려 쌓이는 것도 작년과 똑같지만, 딱 한 가지 지난 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학교 곳곳에 생겨난 빈자리일 것이다. 듬성듬성 비어 있는 교실과 마찬가지로 듬성듬성 비어 있는 기숙사의 방들을 보면 친구들이 하나둘씩 면접을 보러 학교를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교실 벽에 걸린 달력에서 날짜가 하나씩 지워지면 점차 많은 아이들이 저마다의 입시 결과를 받아들게 된다. 누군가 선발되면 누군가는 떨어지고 마는 것이 당연한지라, 원하던 고등학교에 합격하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희망했던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수도 제법 많다.

씁쓸하게도, 원하는 학교의 입시에서 고배를 마신 아이들의 선택지는 대폭 줄어든다. 대체로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지 않았던' 아이들이 다른 학교에 원서를 내고 입시를 치르 마련인데, 그 입시에서 떨어지면 이미 다른 비슷한 학교들도 모두 입학 선발 절차가 끝나 있어 사실상 남은 선택지가 일반 고등학교뿐이라는 아이러니가 존재하는 탓이다. 때문에 입학 선발에서 원하지 않는 결과를 받아든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막막해하기만 할 뿐이다. 더러 심하게는 일반 고등학교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일찌감치 겁을 먹기도 한다.

후배들의 눈에야 모든 3학년이 항상 태연자약해 보이지만, 사실 우리끼리는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 누가 지금 속이 말이 아닐지, 누가 사람 없는 자습실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지, 누가 졸업 이후 다가올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뜻이다. 더불어 아이들은 '잘 될 거야',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처럼 피상적인 위로의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어떻게 해야 더 단단하고 따뜻한 위로를 전할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다. 친구가 방에 없는 틈을 타 책상 위에 살며시 붙여 주고 오는 포스트잇 편지, 친구의 사물함에 몰래 남겨 놓고 가는 비타민제, 속이 조금이나마 풀릴 때까지 함께 학교 운동장을 걷고 걷고 또 걸어 주기....... 모두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위로를 하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계절이다.    



학교에서의 마지막 여유를 즐기는 방법


마지막 시험이 끝나면 몸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지만 마음은 쉽사리 딱 잘라 말할 수 없이 복잡해진다. 지난 삼 년간 집보다도 더 익숙해진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나 이상해지는 까닭이다. 학교를 좋아하는 아이들이건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이건 관계없이, 미운 정 고운 정 모두 붙일 대로 붙여 둔 곳을 한순간에 떠나는 것은 큰 변화인 셈이다. 게다가 이제부터 온전히 홀로 마주해야 할 학교 바깥 세상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도 싱숭생숭한 마음을 휘젓는 데에 한몫한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얼마 남지 않은 학교에서의 시간을 만끽하고는 한다. 친구들을 모아 운동장에서 뛰어놀기도 하고, 운동장을 마주보고 난 데크에 나란히 기대어 별을 구경하기도 하고, 우리가 우리 손으로 만들었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변을 바라보며 그 순간의 공기를 느껴 보기도 한다. 이 시기에 누군가 기숙사로 무언가 색다른 것 하나를 들고 오면 그것은 곧바로 대대적인 유행이 된다. 누군가 뜨개질거리를 들고 오면 그때부터 기숙사 곳곳에서 뜨개질 열풍이 불게 된다거나, 또 다른 누군가 캘리그래피 교재를 들고 오면 한 방에 우르르 모여 글씨를 멋들어지게 쓰는 연습을 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늦은 밤이면 아이들은 불 꺼진 방에 은은한 스탠드 하나만을 켜 둔 채 룸메이트 친구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한다. 대체로 이 무렵 불 꺼진 방에서 일렁이는 불빛과 함께 새어나오는 말소리는 졸업, 우리 학년 아이들, 지난 삼 년, 앞으로 다가올 일들에 관한 걱정 등을 담고 있곤 하다.  


모든 것이 차분하지만 또 동시에 모든 것이 갈팡질팡 혼란스럽기만 한 이 시기에, 행동파가 주류를 이루는 우리 학년에서는 어김없이 색다른 아이디어 하나가 튀어나왔다. 졸업을 앞두고 무언가 특별한 프로젝트를 기획해 보는 건 어떻냐는 의견이었다. 모두가 함께 참여하면서 졸업과 관련한 추억을 쌓을 수 있는 프로젝트가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우리는, 돌연 누군가 툭 내뱉은 말 한 마디에 이목을 집중하게 되었다. 

"졸업식 당일에 플래시몹을 해 보는 건 어때?"

결정은 만장일치로, 플래시몹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물론 선생님들과 다른 학년 아이들은 알지 못하는 우리만의 비밀이었다. 


그리하여 그 해 겨울은 실로 다채로운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친구들이 슬쩍 남겨 두고 간 포스트잇 편지들을 밤새워 읽고, 우리가 만든 그네 위에 올라타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을 구경하고, 보는 눈을 피해 몰래 플래시몹 동작을 연습하기도 하며 우리의 마지막 겨울이 조금씩 지나가고 있었다.   






"마지막 무대를 준비하시는 심정이 어떠십니까?"

"그동안 사랑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앞으로도 늘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12월이 막바지에 다다르면 3학년 아이들은 이렇게 인터뷰 행세를 하며 놀곤 한다. 다분히 장난기가 섞인 말이기는 하지만, '마지막 무대'라는 단어는 실제로도 많은 아이들이 기저에 공유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축제 준비 기간이 시작되면 3학년들은 은퇴 무대를 준비하는 가수의 심정으로 연습에 임하곤 한다. 이전에는 길게만 느껴졌던 준비 기간은 이상하게도 마지막 해가 되어서 그 어느 때보다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고, 눈을 잠시 감았다 뜨면 어느새 축제 당일이 되어 있다.

형형색색의 조명을 받으며 마지막 무대에 오르고, 친구들이 다른 무대를 선보일 때마다 목이 쉴 만큼 열심히 소리를 질러 주고, 3년 동안 함께했던 방과후학교 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다 보면 축제의 밤은 정말이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것만 같이 느껴진다. 


축제가 끝나고 겨울방학식이 찾아오면 친구들과는 다시 얼마간 떨어져 있어야 한다. 3학년들이 서로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2월의 한복판에 있을 졸업여행에서다. 



졸업여행


2월이 되면 졸업식과 종업식을 치르기 위해 학생들이 다시 일주일 정도 학교로 모이게 된다. 대대로 3학년들은 바로 이 일주일 간의 등교 직전 시기에 맞추어 졸업여행을 떠나는데, 일정이 이렇게 잡힌 것은 졸업여행을 마치고 모두 함께 학교로 되돌아오기 위해서라는 퍽 낭만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


학교에 입학한 후 줄곧 우리는 모든 것을 직접 해내곤 했다. 우리가 사용한 장소는 우리가 청소하고, 마찬가지로 우리가 먹을 콩은 우리가 털고, 일 년 동안 먹을 김장도 우리가 하고, 지리산에 올라서 먹는 밥도 우리가 정하고. 그러니 삼 년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졸업여행도 응당 우리의 손으로 정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물론 졸업여행은 우리가 지금까지 계획했던 수많은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여정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오롯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순전히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라는 점이 그렇다. 그래서 아이들은 지금껏 학교에서 떠날 수 없었던 '오직 마음 편히 노는 것이 목적인 여행'을 기획하고는 한다. 학교에 몸담은 기간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땀방울 없는 여행을 떠나게 되는 셈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함께해 왔던 시간보다 앞으로 만날 날이 훨씬 적어질지도 모르는 친구들. 다시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기 직전까지의 모든 순간을 함께할 수 없을 친구들. 졸업여행은 모두가 가진 그런 생각을 반영이라도 하듯, 매 순간마다 추억을 쌓기 위한 노력이 알알이 박혀 있다. 건드리면 순식간에 얼어붙을 것처럼 새파란 겨울 바다를 구경하고, 모래사장에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어 보고, 새까만 밤하늘을 마주보며 작은 불꽃을 피우고, 야외 테이블에 모여 바베큐 파티를 벌이기도 하고. 굳이 사진으로 인화해 보지 않아도 사진보다 더한 선명함으로 언제까지나 기억에 남아 있을 것만 같은 며칠은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간다. 



전야제


졸업여행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오면 학교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일주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일주일 동안에는 별다른 수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행사가 기획되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한없이 안녕한 학교의 모습 속에 몸을 담그고 흘러가듯 며칠을 보내곤 한다. 

졸업식 전날이 되면 '전야제'가 열린다. 1학년이 아니라 예비 신입생이라는 이름을 달고 만났던 아주 오래전 그때의 오리엔테이션처럼, 전야제는 3학년이라는 말보다 예비 졸업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게 되는 순간 비로소 맞이하게 되는 짧은 밤의 행사다. 전야제가 시작되면 그 언젠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올해의 후배들이 졸업하는 선배들을 위한 깜짝 공연과 선물을 준비해 찾아오기도 한다.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고, 함께 온몸에 물을 뒤집어쓰며 청소를 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지리산도 같이 올랐던 후배들이 손에 선물 하나씩을 쥐어 주며 앞으로도 잘 지내라는 인사를 건네면, 정말 우리가 졸업을 하긴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한순간에 밀려온다. 

친구들이 졸업을 기념해 만든 영상을 하나씩 보고 있노라면 곳곳에서 조용히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이곳에 처음 발을 들이고, 이곳에 익숙해지고, 이곳에 정을 붙이기까지는 세 해가 걸렸는데 이곳을 떠나는 데에는 단 하루의 유예 기간만이 주어지니 갑자기 생겨난 마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가면, 정말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졸업하는 날'이 밝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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