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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4. 2021

졸업책 만들기

"그래도 3년을 살았는데, 졸업할 때 뭐라도 하나 손에 들고 나가야지 않겠니."

졸업이 몇 달 앞으로 다가오면 많은 과목의 선생님들은 곧 학교를 떠날 우리의 손에 기필코 무언가를 남겨 주고야 말겠다는 포부를 드러내신다. 자연히 수업도 '뭐 하나라도 더 남길 수 있는' 커리큘럼지향하게 되는데, 미술 시간에 자기 밥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기술가정 시간에 3년을 정리하는 인터뷰집을 만들기도 하고, 또 다른 수업에서는 인생의 계획을 정리한 포트폴리오를 만들기도 하는 식이다. 이렇게 무언가를 남기는 과정 중 가장 오랜 시간을 공들여야 하는 것으로는 단연 졸업논문을 꼽을 수 있다.



졸업논문


처음 논문을 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열에 아홉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선생님을 바라보곤 한다. 졸업 논문이라고 하셨나요? 저희가 대학원생인가요? 그저 보고서 두어 장을 쓰는 정도를 부풀려 말씀하셨겠거니 싶지만 졸업을 위해서 논문을 써야 한다는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다. 각자 원하는 주제를 선정하고 매 주마다 수업 시간을 할애해서 말 그대로 '논문'을 작성해야 한다.


비교적 방대한 양의 자료를 조사해야 하기 때문에 졸업 논문 프로젝트는 서로 연관 있는 주제를 택한 아이들끼리 팀을 지어, 팀별로 자료를 함께 조사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이맘때가 되면 수업이 한창 진행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3학년이 수업하는 교실만 텅텅 비어 있는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는데, 다들 컴퓨터 하나씩을 붙잡고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거나 같은 팀 친구들과 함께 도서관에서 발품을 파느라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슨 졸업 논문을 쓰냐, 하고 신세 한탄을 하던 아이들도 막상 실질적인 논문 작성 과정에 착수하면 놀라운 성취를 보여주곤 한다. 3년 동안 수도 없이 발표를 하고 글을 쓰며 '인문학' 타령을 들었던 것이 헛되지 않은 이다. 열여섯 살의 나이로 논문 작성 규정과 인용 양식 등을 익히는 것은, 길바닥에서 밥을 짓거나 지리산을 며칠씩 오르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실로 독특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들여쓰기 하나, 단어 하나, 주석 하나마다 온 신경을 집중해 퇴고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표지에 이름 석 자를 적어넣으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논문을 완성한 뒤에는 각 별로 논문의 내용을 흥미롭게 전달할 수 있는 영상 클립을 만들어야 한다. 익히 말했듯 이곳에는 영상을 만듦에 있어서 오직 '예능 PD의 마음으로 임하는 아이들' 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영상 촬영 기간이 되면 학교 곳곳에서 재미난 구경거리 발견할 수 있다.

더욱 훌륭한 유머 요소를 추구하는 팀이 많은 탓에, 이따금씩 도통 그 주제를 연상할 수 없는 의문의 촬영 현장이 목격되기도 한다.

"쟤네 조 주제가 세계의 식문화 아니었어?"

"맞아."

"그런데 왜 저렇게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거야?"


졸업 논문 프로젝트의 마무리는 모두의 앞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시간인데, 그 정체불명의 영상은 바로 이때 공개된다. 다른 친구들의 논문 발표를 듣고 있자면 처음에는 그 학술적 내용과 깊이에 새삼 감탄하게 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논문 소개 영상이 재생되면 기존에 지녔던 감탄의 느낌표는 어느새 무수한 물음표로 바뀌곤 한다. 분명 논문의 주제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같은 제목이 적혀 있기는 한데, 그 내용은 시사 교양 프로그램보다는 아이들이 직접 출연한 콩트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텍스트로 접하는 내용과 스크린에 띄워진 내용이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맞나 싶기도 하다. 뭐, 학업적 성취와 친구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것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으니 성공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졸업책


연말에 접어들자 우리 학년은 또 하나의 색다른 결정을 내렸다. 졸업 앨범 대신 졸업책을 만들어 보기로 한 것이다. 단순히 사진으로만 채워진 앨범보다는, 지난 삼 년을 언제고 다시 꺼내어 생생히 추억할 수 있 '우리 손으로 만든 기록'이 더 뜻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우리의 행보가 곧 아래 학년들에게 선례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은 졸업책의 내용을 보다 신중하게 구성하도록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둥글게 모여 앉아 몇 번이고 졸업책에 무엇을 넣으면 좋을지에 관해 논의를 거듭한 끝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골라냈다.

사진, 삼 년간의 생활을 담아낸 에세이, 그리고 부록으로 우리가 썼던 졸업 논문까지.



매거진 화보 촬영 같은 졸업사진

사진은 그 순간을 가장 함축적이고도 다채롭게 남길 수 있는 유일무이한 수단이다. 그러니 졸업책에 우리의 지난 순간을 담아낸 사진이 꼭 들어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우리가 졸업책에 넣을 사진은 두 종류였는데, 첫째는 삼 년 동안 찍었던 우리의 일상이 담긴 사진이었고 둘째는 '졸업사진' 이었다.

일상 사진이야 지금까지 찍어 둔 것들을 모아 오면 되니, 우리가 찍어야 할 것은 졸업사진만 남아 있 셈이었다. 그런데 막상 촬영 당일이 되고 학교에 임의로 설치된 스튜디오를 본 순간 우리 일제히 같은 생각을 떠올다.

이거, 졸업사진 촬영장이 아니라 어디 잡지사 화보 촬영장 같은데?


"너희 사진이 한 사람당 한 페이지에 통째로 실릴 거야."

과연 화보 촬영 같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우리의 졸업사진은 정면을 보고 은은하게 미소짓는 전형적인 바스트 샷 사진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정말 화보집을 촬영하듯 자유로운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 앞에 한참이나 서 있어야 했고, 그렇게 찍은 사진들은 정말 매거진처럼 한 사람당 여러 장의 페이지에 걸쳐 수록된다고 했다. 가장 자연스럽고 멋지게 나온 사진은 아예 자신 차례의 맨 앞 페이지에 대문짝만하게 실려 표지 역할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이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진이라는 큰 과업을 마쳤으니 이제 졸업책이 비로소 책이라 불릴 수 있게끔 하는 '글'을 쓸 차례다.

우리는 삼 년간 있었던 일들을 나누어 각자 하나씩 맡아 에세이를 작성하기로 했다. 하루나들이, 산악등반, 도서관에서의 하룻밤을 비롯한 수많은 이름 중 마음에 드는 것 하나씩을 가져가면 되었다. 개인적인 감상을 토대로 글을 구상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보다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아내기 위해 직접 주변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진행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 그 글을 한데 모아 편집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글솜씨가 좋은 몇몇 아이들이 편집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머지않아 잡지사의 근무 환경과 똑같은 광경이 곳곳에서 벌어지곤 했다. 약속한 시간까지 원고를 넘겨받지 못하면 편집자가 빨리 퇴고하라고 부탁하고, 글을 제때 쓰지 않은 아이는 미안하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하며 어떻게든 유예 기간을 얻어내고, 그렇게 말을 해 놓고 또 기간을 맞추지 못해서 다시 편집자가 원고 담당을 닦달하고, 이미 퇴고를 마친 아이들은 여유롭게 이 광경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음에는 이래서야 제대로 수합이나 될까 싶었던 졸업책이지만, 차츰 아이들이 손수 정성스레 적어내려간 원고가 하나둘씩 쌓이고 엮이면 눈 깜짝할 사이에 책의 구색이 갖추어져 있다.


매일 글을 쓰고 사진을 고르다 보면 졸업책의 내용도 나날이 조금씩 채워진다. 최종 원고가 완성되면 전문 업체에 맡기고 기다리면 된다. 졸업식 당일이 되면 놀라우리만치 멋진 외관을 한 채 탄생한 졸업책을 한 권씩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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