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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4. 2021

얘들아, 고구마 캐러 가자

농촌봉사활동

3학년이 떠나는 인문체험학습의 이름은 농촌봉사활동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문어체로 썼을 때 농촌봉사활동이라 읽는 것이고, 이 여행을 말로 길게 풀어 쓴다면 정말 다른 지역의 농촌으로 향해 수확 작업을 함께하는 '수확 원정대'의 일정이나 마찬가지다. 

농촌봉사활동을 앞두고는 몇 군데의 후보 장소를 정하고 투표를 진행하게 된다. 투표 시기가 다가오면 아이들은 꼭 발령을 받는 일꾼의 마음가짐으로 어디가 후보 장소로 올라올지 미리 예측해 보곤 한다. 작년엔 땅콩 농장을 갔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마 그 전 해는 포도 농장을 갔다고 했지. 우린 어디로 가게 될까? 

어떻게 보면 '어디를 가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수확하게 되느냐' 일지도 모르겠다. 농촌봉사활동 장소가 확정되면 3학년 사이에 발 빠르게 정보가 퍼져 나가곤 한다.


"이번에 우리 어디 간대?"

"어, 고구마 캐러 간대."


비록 가장 중심이 되는 일정은 수확을 돕는 작업이긴 하지만, 당연히 3박 4일 동안 고구마만 줄곧 캐다 오는 것은 아니다. 농촌봉사활동에서는 농번기 수확을 돕는 작업과 더불어 각 학년마다 주제를 정해 탐구활동을 병행하기도 한다. 이번 해의 주제는 '농촌과 창업'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농촌봉사활동을 떠나기 전 조별로 모여 농촌을 거점으로 한 창업 아이템을 구상하는 프로젝트를 거쳐야 했다. 

그런데 회의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어쩐지 진행하면 할수록 방향이 점점 이상하게 틀어지는 것도 같았다. 누군가 야심차게 내놓은 '농촌 환경을 활용한 여가 시설'이라는 아이디어는 여러 명의 입을 거치고 나자 '여행 프로그램'이 되었고, 그 상태로 몇 번의 토의를 거치고 나니 다시 '테마 여행 기획 전문 플래너'로 변질되어 있었다.

"근데 얘들아, 여행 플래너가 농촌을 기반으로 한 창업이 맞아?" 

그럼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농촌에서 못 할 것도 없지."

틀린 말은 아닌데, 왜인지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다른 조 아이들도 생각하는 건 모두 똑같다. 직접 찍은 사진으로 제작한 엽서 판매, 장소 대관 사업, 호텔 개장.......  야망이 가득 드러난, 그렇지만 농촌과 한참 떨어져 있는 종목들로 이루어진 보고서를 받고 나면 선생님들은 이마를 짚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농촌에서 할 수만 있다면 농촌 창업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애초에 슬로건도 '농촌에서 실리콘밸리를 꿈꾸자' 였는걸요?


농촌봉사활동을 위해 아이들은 미리 소위 말하는 '몸뻬바지'를 단체로 구매해서 맞추어 입고 목장갑을 하나씩장만한다. 완벽한 의상 세트를 갖추기 위해 밀짚모자를 함께 구매하는 아이들도 있다. 출발하는 날 아침이면 '수확 복장'을 챙겨 준비를 마치고 관광버스에 몸을 싣게 된다. 목적지인 농장까지 이동하는 동안 아이들은 버스 안에서 온갖 게임을 하기도 하고, 삼삼오오 떠들기도 하고, 그러다 제 풀에 피곤함이 몰려와 잠시 잠을 청하기도 한다. 이 순간만큼은 평범하게 수학여행을 떠나는 다른 학교 아이들과 한없이 비슷한 셈이다. 물론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여정의 끝에 호미질과 새참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좀 차이가 나지만.


첫째 날은 본격적으로 몸을 쓰기 전, 주로 농산물과 연관된 지역 사업의 거점 시설을 방문하는 활동이 주를 이룬다. 이를테면 해당 지역의 로컬 푸드 관련 시설을 방문 견학하고 로컬 푸드에 관한 강의도 들으며 농작물을 통한 사업의 현황과 농촌의 경제에 관해 배우는 것이다. 농촌을 기반으로 발전하고 있는 사업의 이야기를 접하면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진지한 눈빛으로 임하고, 동시에 지난날의 회의를 돌이켜 보기도 한다. 

'농촌 창업은 이런 걸 말하는 거였구나.' 

실제 로컬 푸드를 시식해 보는 것 역시 프로그램의 일부인데, 아이들은 좋은 명분을 가지고 마음껏 로컬 푸드로 뷔페식 식사를 할 수 있는 이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식사 이후엔 해당 지역에서 새롭게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는 신품종 농산물을 알아보고 농가에 직접 방문하여 이런저런 소개를 듣는 자리도 마련되어 있다. 강의를 듣고 시설 견학을 마친 후 숙소로 돌아오면, 본격적으로 조별 활동을 진행할 차례가 된다. 조별로 모여 '농촌에서의 창업 가능성과 아이템'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수확의 기쁨

다음날이 밝으면 본격적으로 농사에 투입된다. 밀짚모자를 쓰고, 통풍이 잘 되는 옷을 입고, 고무장화를 신고, 목장갑을 끼고 호미를 든 채 수확해야 할 농작물이 한가득 기다리고 있는 넓디넓은 밭으로 향한다. 작업에 앞서 선생님과 농부 분들이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시범을 보여 주시므로, 이를 유심히 살펴본 뒤 그대로 작업을 따라하면 된다. 시범 작업을 볼 때는 예상했던 것보다 손쉬운 듯한 과정에 '아 뭐야, 괜히 겁먹었네' 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도 있지만, 막상 흙과 본격적으로 씨름을 시작하다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처음에는 의욕이 넘쳐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열심히 손과 발을 놀리던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면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표정에 웃음기가 사라지곤 한다. 중구난방으로 판을 벌여 놓다가는 얼마 못 가 두 배로 힘들어진다는 자명하고도 단순한 사실을 깨닫게 되면, 비로소 아이들은 체계를 갖추어 전문적으로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흙을 미리 파헤쳐 놓는 담당, 고구마를 끌어올려 상처가 나지 않게 캐는 담당, 캐낸 고구마를 옮기는 담당, 상자 포장 담당, 운송 담당 등으로 암묵적인 작업 분배 시스템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컨베이어 벨트가 만들어진 역사적 과정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머리 위에 뜬 해의 위치가 바뀌고 시간이 많이 지나면, 익숙한 가요를 노동요로 바꾸어 부르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기도 한다. 해가 저만치로 저물어 갈 무렵이 되면 모두가 힘들었던 그날의 작업을 마무리하고 저녁 노을을 뒤로 한 채 논길을 가로질러 '퇴근'을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일을 모두 마친 뒤 찾아오는 저녁식사 시간은 하루 중 가장 후련하고 편안한 시간처럼 느껴지곤 한다.


내가 먹는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요

이따금씩 우리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 산악등반 때처럼 냄비에 물을 넣고 밥을 짓는 종류의 요리가 아니라, 식혜나 두부 등의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고 함께 만들어 보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부분은 음식 조리 과정 전체 중 일부에 해당하는, 말하자면 재료를 몇 번 나르고 주걱으로 몇 번 휘저어 보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손이 닿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음식에 조금 더 정이 들곤 한다. 만들어진 음식은 오롯이 우리의 입으로 들어갈 예정이기 때문에 정말 '내가 먹는다는 생각으로' 요리에 임해야 한다. 실제로 농촌봉사활동 후 친구들 몇몇을 붙잡고 소감을 물어보면, "식혜가 진짜 맛있더라." "OO이가 만든 두부가 예술이었어." 처럼 봉사와는 관련없는 음식 이야기가 속출하기도 한다.


캠프파이어와 뜨끈한 온돌방에서 보내는 밤

일과가 끝나면 숙소로 향한다. 순서를 정해 하루 종일 땀을 흘려 찝찝했던 몸을 개운하게 씻고, 따끈한 온돌방에 너나할 것 없이 드러누워 간식을 먹고 수다를 떨기도 하며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숙소에 넓은 마당과 평상이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몇몇 친구들이 평상으로 나가 하늘의 별을 구경하기도 한다. 평상에 누워 있다 보면 쌀쌀한 밤 공기를 가로지르며 산책을 하는 다른 친구들 여럿이 왕왕 눈에 띈다. 


운이 좋다면, 마지막 날 밤 모두가 모여 캠프파이어를 하게 될 수도 있다. 다함께 넓은 들이나 마당 등의 공간으로 향해 가운데에 커다란 모닥불을 지펴 놓고 둥글게 앉아 밤하늘로 피어오르는 불똥을 구경한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3학년끼리 함께하는 시간인 만큼, 간혹 불을 한참 바라보고 있자면 누군가 대뜸 친구들에게 감성에 젖은 멘트를 날리기도 한다. 이후 분위기가 제법 무르익으면 누군가의 주도로 즉석 노래 자랑이 펼쳐지는데, 먼저 노래를 부르겠다고 나선 아이들과 친구들에게 지목당해 슬금슬금 나온 아이들이 돌아가며 노래를 한 곡씩 부르다 보면 캠프파이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있곤 하다. 


농촌 창업 발표와 마무리

마지막 일정은 그동안 조원들과 함께 구상했던 농촌 창업 아이템을 모두의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다. 각 조가 미리 준비해 둔 발표 자료를 가지고 자신의 조에서 기획한 사업안을 설명하면 선생님들과 친구들 몇몇의 짤막한 의견과 피드백이 그 뒤를 잇따른다. 개중에는 참신함으로 호평을 듣는 조도 있고, 생각지 못했던 허점을 지적당하는 조도 있곤 하다. 모두가 발표를 끝마치면 마침내 3박 4일 간의 농촌봉사활동 일정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조금은 힘들지만 개운한 몸을 이끌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주말을 즐긴 뒤 학교로 다시 돌아오면 된다. 앞으로 한동안은 식탁에 고구마가 올라온다면 바로 며칠 전에 흙투성이가 되어 가며 열심히 캐냈던 고구마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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