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작복작 여름 풍경
기말고사 기간의 3학년들은 모든 문장을 아, 로 시작해서 맥없는 온점으로 마무리를 짓기 일쑤다.
"아, 배고파."
"아, 진짜 피곤하다."
"아, 그만 하고 싶다."
수업과 수업 사이 찰나의 쉬는 시간에 3학년이 수업을 듣는 교실의 문을 열면 두 명 중 한 명 꼴로 책상에 엎드려 짠내 나는 잠을 청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학기가 마무리될 즈음이면 진로의 압박이 슬슬 다가오고, 자연히 성적에 신경을 쓰는 아이들이 많아지는 탓에 시험의 부담이 더욱 커지는 탓이다. 그런데 기말고사가 끝나면 아이들의 아, 로 시작하는 입버릇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 모습을 바꾼다.
"아, 심심하다."
"아, 오늘은 뭐 하지."
학교에서 두어 번쯤 여름을 맞이하고 나면, 방학을 앞두고 하릴없이 보내는 여유로운 시간에 무엇을 하면 좋을지 그 레퍼토리가 동이 나기 마련이다. 영화 보기? 더 이상 볼 영화가 없다. 데크에서 하늘 구경하며 햇볕 쬐기? 이십 분 정도만 그렇게 앉아 있어도 하품이 나온다. 책 읽기? 이미 도서관을 밥 먹듯 드나들며 질릴 대로 읽었다. 이렇듯 여유롭다 못해 권태로움에 흠뻑 젖어들 무렵이면, 시기 좋게 학교에서 새로운 이벤트를 들고 온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학교에는 이따금씩 전문 연극 팀 내지는 대학 연극영화과의 동아리 팀이 섭외되어 올 때가 있다. 학교로 연극 팀이 초청되어 연극을 감상할 수 있는 이 시간을 아이들은 '초청 연극제'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한다. 초청 연극제 당일이 되면 도서관의 은은한 조명은 연극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되고, 둥그런 도서관 홀의 구조는 완벽한 무대로 탈바꿈한다. 초청 연극 팀이 전교생의 앞에서 선보이는 연극은 대학로의 길거리를 가득 메운 로맨스, 코미디, 그 외 다양한 현대적 장르의 연극과는 결이 조금 다른 '희곡'이다. 인문학 수업 시간에 다루었던 고전 희곡을 눈앞에서 직접 감상하게 될 수도 있고, 평소 텍스트로만 접했던 이야기를 실감나는 연기로 다시 보게 될 수도 있는 시간이다. 배우들의 미세한 호흡 하나하나까지 선명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관람하는 연극은 그 몰입도가 실로 엄청나 마치 이야기 속에 내가 직접 들어가서 구경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학교 측에서 초청 연극제를 개최하듯, 학생회에서도 무료해하는 아이들을 위한 행사를 개최한다. 행동파 임원들이 주류를 이루는 학생회답게 회의에서 많은 이벤트 아이디어가 오가지만 늘 결론은 다음과 같은 세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애들이 뭘 가장 좋아할까?"
"맛있는 거."
"그럼 맛있는 걸 주자."
그래서 항상 여름맞이 학생회 행사는 '학생회 카페'다.
이때는 교실 여러 곳이 각각 하나의 상영관이 되어 서로 다른 장르의 영화를 상영한다. 상영관으로 쓰이지 않는 교실 중 가장 입지가 좋은 곳이 카페 본점으로 선정되고, 아이들은 운동장 쪽으로 난 창문 앞에 줄을 서서 메뉴를 주문할 수 있다. 바깥 음식이 귀한 이곳에서 아이들이 양껏 주전부리를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행사다.
우리의 행동파 학생회는 학생회 카페 오픈을 앞두고 학교 곳곳에 호기롭게 다음과 같은 안내문을 붙였다.
'학생회 카페 배달 개시'
그 이용 방법인즉슨 다음과 같았다. 학생회 카페를 방문해 원하는 음식을 주문하고 카운터를 담당하는 학생에게 배달지를 알려 준다. 이후 마음에 드는 상영관에 들어가 앉아 영화를 즐기다 보면, 학생회 카페 운영 부원이 코앞까지 음식을 가져다 준다.
누리는 입장에서 한없이 편안한 이 시스템은 사실 올해 처음으로 도입된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지금껏 단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색다른 아이디어를 낸 학생회 아이들은, 카페 오픈 후 1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비단 배달 시스템이 아니더라도 본래 학생회 카페의 업무는 눈코뜰 새 없이 바쁘기 마련이다.
카운터를 보는 아이들은 정말 문자 그대로 숨 쉴 틈이 없다. 끝없이 늘어선 줄에서 다음과 같은 말들이 조금의 여유도 두지 않고 마구 몰려들기 때문이다. 떡볶이 하나랑 어묵 두 개! 아 그런데 잔돈이 없는데 혹시 거슬러 줄 수 있나? 아 그런데 나 오백 원짜리는 있는데 혹시 이건 받고 나머지 거슬러 주면 안 되나? 여기 바로 위 교실로 배달해 줘! 나는 떡꼬치랑 아이스크림 하나! 혹시 운동장으로도 배달해 줘?
겨우겨우 한 명을 응대하면 그 빈자리를 또 다른 사람이 채우고, 그 사람을 응대하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탓에 카운터의 업무 강도는 당장이라도 파업을 선언하고픈 수준이다.
교실 깊숙한 곳에 기름을 마주본 채 쪼그려 앉아 있는 아이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주문이 쉴새없이 밀려드는 통에 손을 잠시라도 가만히 둘 수 없는 탓이다. 떡볶이 하나 떡꼬치 하나 있어요! 아 맞다 아이스크림도 하나 담아 달래요! 방금 들어온 주문 떡꼬치 하나를 떡볶이로 바꿀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 혹시 이미 그릇에 담았어? 떡볶이 하나 더 있어요....... 나의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남이 먹을 끼니를 챙기다 보면, 자영업자와 요식업계 아르바이트생의 고충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간혹 실험적인 메뉴가 도입되면 그 여파를 고스란히 짊어지는 것도 요리 담당의 몫이다. 카페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는 아이들은 교실 너머 안쪽에 초점이 나간 눈을 하고서 기계적으로 팔을 놀리는 요리 담당들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지만, 이따금씩 안쪽에서 이런 말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야, 이 여름에 호떡 팔자고 한 사람 나와 봐. 아니,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그냥 나와 봐."
"프렌치 토스트 얘기는 대체 누가 먼저 꺼냈어?"
물론 반쯤은 농담이지만, 또 반쯤은 진담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볶고 지지고 썰기를 반복하면서 호기롭게 새로운 메뉴를 도입했던 과거의 업을 속죄한다.
그러나 다른 담당들이 아무리 우는 소리를 해도 정작 정말 울고 싶은 팀은 당연히 배달 팀이다. 배달 팀에 배정된 아이들은 어찌나 많이 움직이는지 저러다 더위를 먹고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학생회 카페 본부에서 음식을 받아들고 1층 맨 끝 교실로 갔다가, 다시 학생회 카페 본부로 갔다가, 이번엔 다른 음식을 받아들고 2층 가운데 교실로 갔다가, 또 다시 학생회 카페 본부로 돌아가고, 이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아침에 처음 보았던 때에 비해 친구들의 낯빛이 잔뜩 수척하게 변해 있는 것을 보면 그제야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선배들이 안 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학생회 임원 아이들이 고생하는 만큼 다른 학생들이 더 편안하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학교에 입학한 이래 최고로 바빴던 여름의 일주일을 보내고 나면, 비로소 긴 여름방학의 시작이다. 커다란 캐리어와 온갖 그림으로 도배된 택배 상자를 낑낑대며 옮기는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학교는 다시금 고요한 잠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