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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4. 2021

깜빠니아가 뭐예요?

"ALT + F4"

컴퓨터를 종료할 것인지 묻는 창을 띄우는 단축키다. 이 단축키는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외운 단축키이며, 동시에 앞으로도 결코 잊어버릴 일이 없을 것 같은 단축키이기도 하다. 왜냐고? 학생회에서 내 머릿속에 때려박다시피 한 하나의 짧은 영상 탓이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전체모임에서 학생회 임원 언니 중 한 명이 대뜸 손을 들고 말했다. "중학교 학생회에서 이번 달 깜빠니아 영상을 제작했는데, 지금 상영해도 될까요?"

깜빠니아? 생전 처음 듣는 단어에 우리는 수행평가의 이름인가, 교내에서 단편 영화제라도 하나, 라며 온갖 짐작을 해 보았다. 이윽고 강당의 불이 꺼지며 스크린 한가득 영상이 띄워지기 시작했다.

장엄한 배경음악, 어두운 화면. 얼핏 스릴러 영화의 오프닝이 아닌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배경이 우리 학교 전산실이었다. 한 남자가 켜지지 않는 컴퓨터 앞에서 초조하게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과 "ALT + F4" 라는 글자만이 적힌 어두운 화면이 긴박한 음악과 함께 연신 오버랩되었다. 남자가 쓰러지고, 화면에는 "ALT + F4" 라는 글자만이 남았다.


우리 모두는 대체 방금 우리가 뭘 본 건가 싶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쓰러진 남자는 학생회 임원 중 하나인 3학년 선배였다. 영상의 골자인 즉슨, "전산실의 컴퓨터를 사용하고 나면 꼭 ALT + F4 를 눌러 컴퓨터를 완전히 종료해라" 라는 것이었다. 그냥 한 마디 말로 공지하고 넘어가도 될 것을 저렇게 강렬하고 충격적인 영상으로 담아내어 모두의 머릿속에 박아넣다니. 그날 우리는 학생회에서 제작한 공익 광고 한 편을 본 셈이었다.


학생회에서 매달 진행하는 공익 광고 캠페인을 '깜빠니아'라고 부른다는 사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어째서 깜빠니아인지는 모른다. 캠페인의 발음을 되는 대로 바꾸어 적은 게 아니겠냐는 말도 있었고, 영어가 아닌 다른 외국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심지어는 깜빠니아가 북한의 표준어라는 추측도 있었다. 그 이름이 어디서 비롯되었던 간에, 아무튼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무수히 많은 깜빠니아 영상을 보며 자랐다. 어떤 것은 아침드라마 같았고, 어떤 것은 다큐멘터리 같았으며, 또 어떤 것은 콩트 같았고 훗날 우리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안내 영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원조 게임 패러디 영상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우리가 직접 깜빠니아를 만들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깜빠니아는 주로 그 시기 학교에서 떠오르는 화두를 다룬다. 예를 들어 도서관 앞 로비에서 시끄럽게 이야기하는 학생들이 많아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오고 간다든지, 아이들이 전산실을 사용하고 뒷정리를 잘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주제가 확정되고 나면 학생회 회의를 빙자한 예능국 PD 회의가 개최된다. 임원들은 한자리에 모여 어떻게 깜빠니아 영상 시나리오를 짤 것인지 의견을 내는데, 이때 참신하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면 아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그걸 아이디어랍시고 내냐'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기 마련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선택한 주제는 식기당번이었다. 자신이 식기당번으로 참여하는 날짜를 미리 숙지하지 않는 학생들이 많아 학생회에서 일일이 찾아가 데려와야만 한다며, 이래서야 우리가 추노꾼과 다를 게 뭐냐는 한 임원의 한탄 아닌 한탄에서 비롯된 주제였다. 일단 한 번 주제가 선정되면 아이디어는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식기당번 아이들을 찾느라 밥을 먹지 못하는 학생회 임원들의 일상을 처량한 다큐멘터리로 담자', '최근 유행하는 광고 영상을 그대로 따라하자', '이왕 추노꾼이라는 말이 나온 거, 그걸 컨셉으로 잡자'....... 무수한 아이디어들이 오가는 가운데 최종적으로 결정된 안은 '식기당번에 제때 오지 않는 아이들을 추적하는 시사 교양 프로그램을 찍자'는 것이었다. 

시나리오 작성은 학생회 임원 중 누군가가 맡는다. 촬영 장비 대여 및 촬영도 학생회 임원 중 누군가가 맡게 된다. 출연진 역시 학생회 임원 안에서 결정된다. 그럼 영상 편집은 누가 할까? 그것도 학생회 임원이 한다. 결국 깜빠니아도 노동의 연장선인 셈이다. 시나리오 작가는 어떤 역할에 누구를 투입할 것인지 결정할 권한을 지니고 있는데, 간혹 몸을 날려 열연해야 하는 역할이나 낯부끄러운 대사를 해야 하는 역할을 맡은 아이들은 클레임을 걸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묵살된다. 학교 곳곳에서 촬영을 진행하다 보면 구경을 오는 아이들이 여럿 생겨나는데, 감독 역할을 맡은 아이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그 구경꾼들 사이에서 보조 출연자를 아무나 데려오곤 한다. 


촬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매달 있는 '전체 모임' 시간에 전교생의 앞에서 깜빠니아 영상이 상영된다. 영상을 본 아이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흘러나오면 비로소 임무를 훌륭히 완수한 셈이다. 영상이 끝나고 박수가 나오면, 학생회 임원 아이들은 미소를 띤 채 함께 박수를 치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아, 다음엔 뭐 만들어야 하지. 벌써 걱정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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