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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4. 2021

우리가 주도하는 봄

"우리 이쯤 되면 노동부로 부서 이름 바꿔야 해."

체육대회 준비가 한창일 때 행사기획부 부장을 맡은 친구가 남긴 명언이다. 비단 행사기획부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학생회의 모든 부서는 학생들을 대신해 '노동'을 담당하기 때문에 '학생의 대표'라는 수식어보다 '노동의 대표'라는 수식어가 더 적합한 것도 같다.

1학년으로 지내던 시절에는 각종 행사가 있는 날 아침에 바깥으로 나가면 학교 곳곳에 부스가 마련되어 있었고, 잠눈을 감았다 뜨면 어느새 운동장에 수많은 텐트가 줄지어 설치되어 있곤 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우리는 단 한 번도 '누가 이걸 했을까'라는 질문은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3학년이 되고 학생회에 몸을 담으면 그 답을 알게 된다. 누가 하긴? 우리가 하지.


한마음 체육대회를 앞두고 학교 어딘가에서는 비밀리에 삼자회담이 개최된다. 회장, 부회장, 그리고 행사기획부 부장이 한데 모여 체육대회 조 배정이라는 중대 과업을 이행하는 자리다. 주 목적은 각 팀의 우승 가능성이 비교적 균등해지도록 인원을 조정하는 것이다. 어느 한 팀에 운동 잘 하는 학생들이 너무 몰려 있으면 일부 인원을 이동시켜 소위 말하는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삼자회담 정상들의 일이다.

조 배정이 끝나면 전날에 있을 행사와 일정을 기획하고 공지해야 한다. 대개 체육대회 전날 행사는 그 해를 맡게 된 학생회 임원들의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말했듯 행동파 임원들이 득세하는 시기에는 온갖 활동적인 행사와 이벤트가 연이어 개최되고 지성파 임원들이 득세하면 비교적 조용한 편인데, 우리는 어느 모로 보나 행동파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길거리 공연, 학생회 카페, 전야제의 개최가 확정되었다.


기획이 끝나면 비로소 '노동'을 할 시간이다. 선생님과 학생회 임원들이 힘을 합쳐 각종 자재를 옮기고 천막을 설치하고 조리 도구를 비치하곤 한다. 학생회 내에서 힘 좀 쓴다 하는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남들의 두 배로 짐을 나르고 일을 하곤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말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체감하게 된다.

기간제 일꾼이나 다름없는 학생회 아이들 체육대회가 시작되면 다양한 분야로 전직한다. 길거리 공연 MC로 투입되는 아이도 있고, 학생회 카페에 들어가 수석 쉐프를 맡게 되는 아이도 있다. 학생회 각 부서의 부장들은 부원들을 함께 동원하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남들이 깔아 주었던 놀이판 위에 그저 몸을 던졌을 뿐이라면, 3학년이 되어 맞는 학교의 행사는 우리가 직접 땅을 다지고 판을 깔아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산악등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라는 우리만의 격언은 산악등반이 가까워 오면 다시 한 번 빛을 발한다. 3학년이 되어 떠나는 산악등반은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는 자리다. 더 이상 우리가 뒤를 따를 수 있는 선배가 없고, 오직 우리의 뒤를 따라오는 후배들만이 있을 뿐이다. 더 이상 내가 힘들다고 해서 내 짐 일부를 대신 들어 줄 사람은 없고, 내가 짐을 들어 주어야 할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책임감은 조별 모임을 갖고 역할을 배분할 때 가장 실감이 난다.

각 조에서 리더십이 있고 체력이 좋은 3학년이 조장을 맡게 된다. 그럼 나머지 3학년들은 부조장, 식사 담당 등의 주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이 조별 모임에서 3학년이 갖는 말의 무게는 실로 엄청나다. 1, 2학년들의 입장에서는 산악등반 경험이 가장 풍부한 3학년이 상황을 가장 잘 판단한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역할 배분을 할 때 1, 2학년 아이들은 당연히 3학년이 먼저 자신의 역할을 고른 이후 그 3학년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역할이 나누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누가 어떤 짐을 들 것인지를 정할 때도 당연히 3학년 선배들이 일러 주는 대로 짐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듯 내뱉은 말을 아이들 막중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무심코 '그런데 산에서 스파게티 할 때 조금 귀찮긴 하더라.' 라고 내뱉으면 그 말은 '지리산에서 스파게티는 기피해야 할 메뉴다', '스파게티는 절대 안 된다'라는 뜻으로 부풀려져 아이들의 귀에 들어가기 십상이다. 그러니 의견을 표현할 때 늘 신중해야 한다.

3학년들은 산악등반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인 물품을 하나씩 나눠 들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가장 무거운 쌀이라거나, 가방 안에 냄새가 잔뜩 배는 김치라거나, 그 밖의 각종 무거운 물품 그리고 조 전체를 위한 상비약 등 모두에게 필요한 짐이 우리의 손에 들리게 된다.


더 이상 우리보다 앞서 걷는 등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산에 오를 때면 3학년들은 자연히 친구들에게 의지하게 된다. 매 순간 상황을 유심히 살폈다가 구호를 외치고, 뒤를 따르는 후배들을 수시로 챙기는 친구들이 제법 든든하기도 하다.


지리산을 세 번쯤 오르다 보면 어느덧 산 곳곳에 눈에 익은 풍경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지난해에 다녀갔던 대피소이던, 언젠가 걸어 본 적이 있는 산길이던,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던 간에 친숙한 무언가를 만나게 되면 마냥 반갑다. 대피소에서의 하룻밤도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 정도쯤 되면 대피소에서 마주치는 다른 산악인들과 산을 주제로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대피소에 발을 들일 때는 반가움과 친숙함이 온 마음에 가득 들어찼던 반면, 대피소를 떠나는 날에는 조금 결이 다른 감정이 차오르곤 한다. 이제 다시 친구들과 함께 이곳을 올 일은 자주 없겠지, 어쩌면 앞으로 영영 오지 않게 될지도 모르고. 매번 힘들다 힘들다 노래를 불렀던 산악등반이지만 이번이 지나면 다시는 볼 수 없는 순간이라는 생각에 몇 번이고 다시금 뒤를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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