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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4. 2021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우리 학교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마법 아닌 마법이 있다. 매년 겨울, 기말고사가 끝나고 축제 준비에 돌입하는 시기가 되면 마치 누군가 미리 뿌릴 준비라도 하고 있던 것처럼 아주 많은 양의 눈이 펑펑 내려 쌓인다는 것이다. 시험만 끝나면 눈이 온다는 이 '기말고사 매직'은 온 사방이 하얗게 덮인 학교에서 새로운 추억을 쌓을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정말 마법 같기도 하다.



겨울맞이: 어떻게 하면 더 창의적으로 놀 수 있을까


눈이 오면 모두 동심을 되찾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기말고사 매직' 시즌이 되면 아이들은 밖으로 뛰어나가서 눈사람도 만들고, 이글루도 짓고 - 대개는 기초공사 단계에서 포기한다 - , 작은 옹벽을 쌓은 뒤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눈싸움을 가장한 눈 전쟁을 벌이곤 한다. 특히나 눈 구경이 좀처럼 힘든 지역이 고향인 아이들은 종아리께 올 정도로 수북히 쌓이는 눈을 보고 감격에 차오르기도 한다. 물론 비교적 눈이 많이 오는 지역에서 온 아이들은 대체 눈이 뭐가 신기하다는 건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눈이 내리는 날 모두가 마냥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야외청소 담당이라면, 눈이 하염없이 쌓여 갈수록 딱 그만큼의 걱정이 얼굴 위에 어린다. 무지막지하게 쌓인 양의 눈을 손수 치워야 하는 탓이다. 일단 한 번 눈이 왔다 하면 그날의 야외청소는 거대한 싸리빗자루와 초록색 넉가래를 하나씩 쥐고 연신 눈이 온 바닥을 긁어 대야 하는 셈이다. 일손이 부족할 때면 남자기숙사에서 한 덩치 하는 친구들이 동원되어 제설 작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바깥에 흰 눈이 흩날리고 있을 때, 뜨끈한 학교 건물 안에서는 또 다른 유희거리로 판이 벌어져 있기도 하다. 교실 뒤편 책장에 일 년 동안 고이 잠들어 있던 온갖 보드게임을 꺼낼 때가 온 것이다. 아이들은 교실 책상을 둥글게 배치하고 그 가운데 바닥에 주저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드게임을 하는데, 꺼낼 수 있는 보드게임이란 보드게임은 죄다 꺼내 더 이상 마땅한 게임이 남아나지 않으면 기숙사에서 하던 '몸으로 하는 게임'을 도입해 다함께 게임 삼매경에 빠지기도 한다. 이따금씩 아이들의 등쌀에 담임 선생님이 그 놀이 구역으로 등이 떠밀려와 같이 게임에 참여하기도 하는데, 모셔 올 땐 그렇게 사정을 했던 아이들이 막상 게임이 시작되면 칼 같기 짝이 없어진다. 

"선생님. 방금 틀리셨어요. 빠지셔야 해요."

"어, 선생님,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선생님 방금 목숨 한 개를 잃으셨어요. 카드 하나 저한테 주세요."

선생님이라고 해서 아이들이 특별히 봐 주는 것은 아니다. 승부사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다.


그 해 학교의 학사일정이 어떻게 되는지에 따라 드물게 크리스마스를 학교에서 보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외부와 고립된 채 학교 안에서 처량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한다니, 하며 풀이 죽어 있을 아이들을 위해 으레 학생회에서는 야심차게 기획한 '크리스마스 축제'를 열고는 한다. 이날 열리는 특별 공연에는 밴드 팀, 댄스 팀, 노래 팀 할 것 없이 모두가 산타 모자를 쓰고 무대에 올라 분위기를 띄운다. 그 밖에도 스피드 퀴즈 같은 예능 프로그램 느낌의 게임부터 수건돌리기처럼 정겨운 놀이에 이르기까지 각종 게임을 전교생이 함께하며 시간을 보낸다. 평소 학교 안에서 구경하기 힘든 호화로운 간식도 나누어 먹고, 창밖으로 눈이 내리는 것을 구경하며 축제를 즐기면 크리스마스가 별건가 싶다. 


이맘때 기숙사의 풍경도 참 볼만하다. 로비를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늘어서 있는 모든 방이 저마다 하나의 문화공간처럼 변해 마치 기숙사가 거대한 복합 여가 센터가 된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기숙사에 들어선 뒤 첫 번째 방의 문을 열어 보자.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 놓고 마구잡이로 몸을 흔들며 춤을 추고 있는 댄싱 클럽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너도 같이 출래? 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두 번째 방으로 향해 문을 열면, 그곳에는 보일러를 뜨끈뜨끈하게 틀어 놓고 바닥에 누워 수건으로 눈을 가린 채 등을 '지지고' 있는 찜질방이 차려져 있다. 두 번째 방을 뒤로하고 다시 다른 방들의 문을 열면 어떤 곳은 '마피아 게임'이 한창인 이탈리아 뒷골목이 되어 있기도 하고, 여럿이 매트를 깔고 생전 처음 보는 요가 동작을 하고 있는 요가 교실이 열려 있기도 하고, 모두가 말없이 코바늘을 놀리는 뜨개질 클럽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마치 복합문화공간에서 소식지를 날리듯, 하나의 방에서 무언가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면 다른 방들로 이 소식을 물어다 주는 아이들이 있다. 

"야, 7번 방에서 지금 캘리그래피 한대!" "3번 방에서 애들이 컬러링북 하고 있던데?"

그럴 때면 아이들이 하던 것을 멈추고 그 소식에 혹해 재빨리 그 방으로 달려가 보기도 한다. 


겨울방학을 며칠 앞두고 짐을 쌀 때가 되면 이런 도란도란한 풍경을 더 이상 구경할 수가 없다. 모두 자신의 캐비넷 안에 든 짐을 몽땅 챙겨 거대한 택배상자 안에 넣고, 그 위를 테이프로 칭칭 감아 밀봉한 뒤 집으로 부칠 준비를 하는 탓이다. 이렇게 '이사 철'이 되면 복합문화공간 같았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대신 기숙사에 새로운 문화가 생겨나 그 빈자리를 메우는데, 각 방을 돌아다니며 친구들의 택배 상자 위에 펜으로 흔적을 남기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남의 택배 상자 위에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가기도 하고, 상자 위에 빈 자리가 남지 않게 온갖 낙서와 그림을 꽉꽉 채우기도 하고, 롤링페이퍼를 방불케 하는 아주 길고 긴 편지를 적어 주기도 한다. 덕분에 분명 처음 배부받을 때는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모습이었던 아이들의 택배 상자는 저마다 다른 낙서와 글씨로 기가 막히게 '커스터마이징'되어 상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금방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짐을 챙길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우리의 방학식은 문화축제 다음날이니, 그날까지 사용해야 하는 몇 가지 생필품은 택배 상자에 넣어 버리면 안 된다. 그 사실을 잊고 간혹 칫솔이나 치약, 베개 등을 상자에 넣어 밀봉해 버린 아이들은 그날부로 기숙사 곳곳을 돌아다니며 동냥을 다녀야 한다. 


문화축제 날이 되면 작년에 졸업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다. 방학식 전야제의 느낌으로 축제를 한껏 즐기면, 두 번째 겨울방학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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