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학년은 도보여행 어디로 가기로 했어?"
여느 때처럼 하루를 마치고 잠에 들기 전, 같은 방을 쓰는 3학년 언니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2학년이 되면 도보여행을 떠난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자세한 사항에 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아직 안 정해진 것 같은데. 도보여행 장소도 우리가 정해?"
내가 되묻자 언니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당연하지. 장소랑 코스도 너희가 정하고, 메뉴도 너희가 정하고, 조도 너희가 정해. 너희가 직접 손을 안 대는 게 없을걸?"
2학년은 인문체험학습 기간에 도보여행이라는 이름의 여정을 떠난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많은 프로그램의 이름은 제법 직관적이라 이름만 듣고도 그 내용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데, 도보여행도 마찬가지로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실제가 잘 부합하는 편이다. 얼핏 국토대장정을 연상케 하는 도보여행은, 말 그대로 각종 장비와 짐을 챙겨 여러 지역에 걸쳐 도보로 이동하는 짧은 여행이다. 3학년 선배들이 입이 닳도록 '3년 살면서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라고 도보여행을 칭찬하는 것을 줄곧 들어 왔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10월에 접어들자 구름을 탄 것마냥 잔뜩 들뜨기 시작했다. 3박 4일 동안 여행하게 된다니, 장소는 어디로 정하게 될까? 하다 못해 식사 메뉴 정하는 것도 재미있겠지?
그러나 도보여행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 학사 일정 상 변동이 생겼다는 공지를 듣는 순간, 우리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대지미술과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지겠구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학사 일정에 변동이 생김에 따라 기존에 3박 4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도보여행이 대폭 축소된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오갈 수 있는 거리의 여행지를 찾다 보니 고를 수 있는 장소도 제한적이었고, 결국 코스는 선생님들의 결정에 의해 '지리산 둘레길'로 확정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긴 말조차 하지 않고 오직 한 음절로 된 단어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또?"
재작년에도 지리산, 몇 달 전에도 지리산, 그런데 이번에도 지리산 둘레길이라니. 새로운 장소에 대한 설렘은 진작 내다 버린 우리는 재빨리 구름에서 뛰어내려 현실로 돌아와 다른 세부사항들을 정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남은 권한 내지 자율성은 두어 가지였다. 첫째는 조 배정이고, 둘째는 메뉴 선정이었다.
조를 짤 때 고려되는 요소는 산악등반 때와 비슷하다. 조 배정의 책무를 맡은 친구들은 체력과 요리 실력이라는 두 가지 추를 열심히 비교해 가며, 마치 축구 선수를 한 팀에서 다른 팀으로 이적시키듯 서로 다른 아이들 간에 트레이드를 시도한다. 한편 식사 메뉴 선정에 있어서는 산악등반보다 도보여행의 조건이 조금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산 위로 재료를 가져가는 것보다 재료를 들고 평지를 걸어가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에 고를 수 있는 메뉴의 범위가 넓어지는 덕이기도 하고, 두 번의 산악등반을 거치며 많은 아이들이 요리에 제법 자신이 생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맘때쯤이면 눈대중으로도 물을 정확히 맞춰 고슬고슬한 밥을 지어내는 인간 쿠쿠가 우리 학년에도 한두 명씩 생기곤 한다. 조별로 머리를 맞대고 각 날짜마다 아침, 점심, 저녁을 어떻게 해 먹을지를 고민하면 도보여행을 위한 의견 조율은 비로소 끝이 난다.
지리산과 그 인근에는 알 수 없는 친숙함이 느껴졌기 때문에, 우리는 도보여행이 그다지 새로울 것이라는 기대는 일절 하지 않고 있었다. 말하자면 지리산 둘레길은 십 년을 함께 산 가족 같은 느낌으로 드러누워서 '어, 왔어?' 라고 말하며 우리를 맞을 것만 같았다는 뜻이다.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지리산 둘레길까지 가는 길 역시 산악등반을 떠나는 그날의 기억과 한없이 비슷했기 때문에 이런 권태로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런데 막상 도보여행 코스의 시작점에 발을 딛자 생전 처음 보는 낯선 풍경과 전혀 색다른 느낌이 우리를 둘러쌌다. 지리산과 지리산 둘레길은 사뭇 다른 것이다. 예상 밖의 신선함에 기대감이 조금 상승한 채로 우리는 도보여행의 첫 걸음을 떼었다.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낭만과 달리 도보여행에서 '걷는' 시간에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 산악등반과 마찬가지로 이동 중 사고의 위험이 있고, 도보 이동의 특성상 언제 어떤 변수가 생길지 단언할 수 없는 까닭이다. 모두가 일렬로 서서 때로는 도로 가장자리를 걷고 때로는 흙길 위를 가로지르며 행군에 행군을 거듭한다. 이동 과정에 있어서는 항상 도보여행 전 미리 정해 둔 신호 체계를 엄격히 지켜야 한다. 선두에 선 조장은 전방의 위험 요소를 잘 파악하고 안전과 관련된 구호를 제때 외쳐 주어야 하며, 모든 조원은 구호를 잘 이해했다는 신호를 보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 과정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선생님들의 엄격한 질책이 뒤따르게 된다.
단순히 걷는 것뿐이니 그다지 힘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몇 킬로미터에 걸쳐 짐을 지고 이동하는 일은 상당한 체력을 요하는 일이다. 때문에 몇몇은 행군이 거듭되면 굉장히 힘들어하고 어쩌다 한 번씩 가벼운 부상을 입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럴 때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평소에 조금 데면데면한 사이의 친구였더라도 너나할 것 없이 다가가 응급처치를 돕고 격려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새삼 같은 학년 친구들이 훌쩍 컸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순간이다.
머리 위에 높이 걸린 해는 슬슬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표다. 점심을 제때 먹고 싶다면 늑장을 부리지 말고, 미리 봐 둔 취사가 가능한 야외 공간에 도달할 때까지 열심히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모든 조가 한자리에 모이면 점심시간이 시작되는데, 이때 누가 일러 주지 않았는데도 일사분란하게 자리를 잡고 밥을 지을 만반의 준비를 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설거지도 어줍잖게 하던 우리가 이렇게나 체계적일 수 있다니.
각 조의 인간 쿠쿠들이 밥을 담당하면 나머지는 국을 끓이고 반찬을 준비하며 점심상을 차린다. 극한의 편리성을 추구하는 조에서는 간단히 라면을 끓이기도 하는데, 바깥에서 심지어 배고픈 상태로 맡는 라면 냄새는 너무나도 매혹적이기 때문에 늘 다른 조에서 하이에나들이 몰려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라면을 끓이는 조에서는 편히 밥을 먹을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변변찮은 테이블도, 앉을 의자도 없기 때문에 길바닥에 주저앉아 밥그릇을 꼭 쥔 채로 식사를 해야 할 때가 부지기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장소에 아무렇게나 앉아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먹는 밥은 단순히 맛있다는 단어 그 이상의 울림을 준다.
단지 걷고, 먹고, 다시 걷는 것만이 도보여행의 코스는 아니다. 코스 중간중간 근처의 유적지나 관광지를 방문하는 것 역시 도보여행의 묘미 중 하나다. 이때에는 종종 조별로 자유 탐방 시간이 주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단풍이 한창 들 시기의 멋진 풍광을 마음껏 즐길 수도 있다.
주변을 배회하다 보면 당연히 다른 관광객들이나 행인들과 마주치는 일이 잦다. 그런데 우리와 마주치는 행인들은 멀리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가 우리에게 점점 가까워짐과 동시에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곤 한다. 분명 멀리서 봤을 때는 등산복 차림에 형광 조끼를 입고 우르르 단풍 사진을 찍는 게 영락없는 중년 산악회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웬 중학생들이 있으니 어찌 보면 의아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형형색색의 등산복 차림을 하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중학생들의 대화 내용을 들으면 행인들의 혼란스러운 표정은 더욱 짙어진다.
"이맘때 단풍이 멋지네." "그래도 세석에서 보는 철쭉이 좀 더 절경이지." "으어, 좋다."
도보여행 마지막 날의 저녁식사는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가장 호화로운 메뉴를 선택하여 요리하곤 한다. 예상과 달리 축소된 일정에 지정된 코스를 걸어야만 했던 우리를 위해, 마지막 날 선생님들께서는 요리 경연 대회라는 작은 이벤트를 열었다. 조별로 가장 자신있는 요리를 해낸 뒤 선생님들과 다른 조 아이들에게 평가를 받아 우승 팀을 가리는 방식이었다. 우승 팀에게는 부상으로 아이스크림을 제공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각 조의 요리 담당 아이들은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고, 덕분에 상대편에서 뭘 만드나 하고 기웃거리다 문전박대를 당하는 산업 스파이나, 다른 조에 가서 자신 조의 재료와 물물교환을 제안하는 행상인들 등 다양한 군상이 이곳저곳을 활보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눈앞에는 졸졸 물이 흐르는 계곡을, 머리 위로는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을 두고 보내는 저녁은 다른 때보다 더 특별하게 여겨진다. 여러 조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메뉴를 토대로 뷔페가 열리고, 우승 팀을 발표하고, 마지막 날 특식으로 준비된 피자와 치킨도 나누어 먹고, 같은 조 친구들에게 롤링페이퍼를 쓰고, 숙소로 들어가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다 잠들면 비로소 도보여행의 끝이 찾아온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기분이 이상해지기도 한다. 어쩐지 이날의 밤을 계속해서 기억하게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아이들이 모두 잠든 이곳의 밤 위에 덧칠해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