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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4. 2021

톱질을 하고 물건을 파는 가을

새 학기의 모습

9월 첫째 주 월요일. 

새 학기를 맞아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한 학년 아래 후배였다. 후배에게 다가가 아는 척을 하자, 그 애는 눈에 띄게 놀라며 '언니가 왜 거기서 나와'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학교로 가는 길에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까지나 놀랄 일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있어 '학교로 가는 길'이라 함은 여러 행정구역을 가로지르는 일종의 국토 대장정과도 같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내가 후배를 만난 곳은 학교와 떨어져도 한참 떨어져 있는 고속도로의 휴게소였다. 비유하자면 부산에 살고 있는 옆집 친구를 여수에 놀러 갔다가 마주친 기분이랄까? 그 애의 놀란 토끼 눈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이면 전국 방방곳곳에서 아는 얼굴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비슷한 지역에서 출발하는 아이들 간에는 만남의 광장이 암묵적으로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기차를 주로 이용하는 아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환승의 중심지인 대전역과 서대전역은 그야말로 '만남의 성지'라고 했다. 저 멀리 왠지 모르게 친숙함이 느껴지는 뒷모습이 보이면 열에 아홉은 우리 학교 사람이 맞다나. 학교 바깥에도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닌 탓에 가끔 단체 메신저 채팅방에 핫라인으로 따끈따끈한 속보가 들어올 때도 있다. 

"지금 OO이랑 OO이랑 기차 같이 타고 있어. 둘이 안 친하다더니 뭐지?"  

"OO아, 방금 편의점에서 콜라 샀지? 나도 한 입만 주라."

"OO이 방금 서대전역 지난 KTX 2호차 탔지? 뒤 돌아봐봐."

가장 인상깊었던 속보는 이거였다. "OO이 터미널에서 가출청소년으로 오해받았어. 혹시 집 나왔냐고 물어보시던데." 

실제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간혹 어르신들이 집을 나왔느냐고 묻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지곤 한다. 평일 대낮에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중학생은 너무나 눈에 띄는 탓이다.

     

학교에서 두 번째로 맞게 된 가을은 어딘지 모르게 묘한 느낌을 준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보낸 시간과 앞으로 학교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같아지는 지점인 탓이다. 가을의 첫날이 지나고 나면 '앞으로 학교에서 살게 될 시간'의 영역에서 하루 어치의 모래알이 매일 조금씩 빠져나와 '지금껏 학교에서 살았던 시간'의 영역으로 흘러들어간다. 물론 학교에서 맞는 9월은 눈코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에 모래알이 움직이는 것을 느낄 만큼의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다.



가을 풍경


작년 가을엔 같은 반 친구들이 수업을 하다 말고 갑자기 창가로 몰려가 운동장을 구경하는 일이 잦았다. 뭘 그렇게 보고 있냐고 물으면 친구들이 일제히 한 곳을 가리켰는데, 그 자리엔 어김없이 한 손에 물뿌리개를 들고 모여 있는 2학년 선배들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선배들은 운동장에 물뿌리개로 물을 뿌려 거대한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대지미술을 체험하는 수업이라고 했다. 선배들이 종종걸음으로 옮겨 가는 자리마다 미스터리 서클 같은 문양이 남기도 했고, 칸딘스키 추상화 같은 난해한 선이 여럿 남기도 했다. 아래쪽에서 누군가 ‘야! 마르기 전에 찍어!’ 라고 외치면 2층 창가에서 다른 사람이 사진을 마구 찍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었다.

2학년이 되고 가을로 접어들자 우리들은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작년에 본 대지미술이 꽤 재미있어 보였는데, 이제 우리 차례겠지? 그러나 기대가 무색하게 미술 선생님의 입에서는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대지미술? 올해는 안 하기로 했는데?"


그리하여 올해의 1학년 후배들은 작년에 우리가 본 것과는 조금 다른 구경거리를 목도하게 되었다.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며 처연한 표정으로 나뭇잎, 꽃잎, 땅에 떨어진 열매를 줍는 선배들의 모습 말이다. 후배들이 곁을 지나치며 '그걸 주워서 어디다 쓸 건지' 물어보면 아이들은 이렇게 답하곤 했다. 

"내 그림에 붙이려고......." 

우리는 조금 다른 형태로 자연 친화적 미술을 구현하게 된 것이었다. 흙을 말려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학교 이곳저곳에서 주워 온 자연물로 그림을 장식하는 방식이었다.


한쪽에서 아이들이 뭔가를 열심히 주울 때, 다른 한쪽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목공실 앞이다. 목공실 앞뜰을 지나가다 보면 2학년들이 열심히 목재를 옮기고 톱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목공 수업'이 한창인 것이다. 

학년이 바뀌며 시간표에 '목공 수업'이 새롭게 추가되곤 한다. 한 학기 동안 나무로 된 가구 완제품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공 수업의 목표인데, 대망의 첫 목공 수업 시간에는 조별로 무엇을 만들 것인지를 정한다. 

다른 조의 포부는 거창했다. 이왕 만드는 거 아주 크고 아주 대단한 걸 만들어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반면 우리 조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는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고, 그리하여 모두가 '그네', '침대', '대형 피크닉 테이블'을 외칠 때 한없이 신중했던 우리 조는 홀로 '벤치'를 불렀다. 

무엇을 만들지를 정하고 나면 가장 먼저 도안을 그린다. 태어나 가구 설계라는 것을 처음 해 보는 아이들은 오직 단 하나의 사항에만 중점을 두어 도안을 그려내곤 한다. '제대로 설 수 있을 것인가?' 

일단 제대로 서기만 한다면 반은 성공한 것이라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이다. 

며칠에 걸쳐 설계 도안을 마무리짓고 나면 본격적으로 제작에 착수한다. 사전에 조를 배정해 주신 목공 선생님의 혜안은 이때 빛을 발하는데, 조마다 한 명씩 '힘 좀 쓰는 애'가 꼭 배정되어 있어 그 친구가 주도적으로 톱질을 맡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달려들어 목재에 사포질을 하고, 열심히 톱을 놀려 목재를 자르고,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기계로 단면을 부드럽게 만들고 나면 정말 말로만 떠들어 보았던 '그네', '침대', '피크닉 테이블', 그리고 '벤치'가 눈앞에 당당히 서서 그 위용을 뽐낸다. 페인트칠까지 끝마치면 비로소 학교 야외 곳곳에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든 가구가 놓이고 학교의 누구나 그 가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기숙사 앞 잔디밭에 놓인 벤치, 미술실 앞뜰에 자리한 테이블, 아이들이 순서를 정해 타고 있는 그네처럼 학교를 거닐다 우리가 직접 만든 가구가 눈에 들어올 때면 새삼스레 반가움과 뿌듯함이 밀려온다. 가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미세하게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가구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덧붙여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학교에 남아 있게 되곤 한다.  

 


바자회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저녁, 기숙사에서 조용히 자습을 하고 있었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며 사생장 언니가 커다란 망태를 들고 방으로 들이닥쳤다. 어째서 그런 산타클로스 비슷한 모양새로 돌아다니냐고 물었더니 언니 왈, '바자회 물품을 수합하고 있다' 고 했다.


바자회는 가을의 주요 행사 중 하나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무렵 학교에서는 인근의 지역 주민들에게 연탄을 배달하는 연탄봉사를 진행하는데, 이 연탄봉사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금 앞선 가을에 바자회가 열리곤 한다. 학생회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유의미한 수익을 남길 수 있을지를 세심하게 고민해야 하는 행사인 셈이다.

바자회를 앞둔 귀가 주가 되면 학생회에서는 바자회 기증 물품을 가져와 달라는 공지를 미리 전달한다. 그럼 아이들은 각자의 집으로 가서 '내가 사용하지는 않지만, 꽤 상태가 좋고 쓸만한 것'을 찾아 헤맨 끝에 저마다의 물건을 들고 학교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후 각 기숙사에서 사생장이 커다란 망태나 포대자루를 들고 돌아다니며 아이들이 가져온 물건을 수합하고 가격을 책정한다. 


바자회 당일이 되면 학교 곳곳에 좌판이 벌어진다. 기증 물품은 기증자를 알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실 물품이 일단 한 번 진열되고 나면 누가 어떤 물건을 가져왔겠거니 하는 것이 선명히 보이기 때문에 기증 물품에 익명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함께 부대껴 살며 서로가 어떤 스타일의 물건을 쓰는지 훤히 꿰고 있는 탓이다. 가끔 누가 기증했는지 모를 정말 황당한 물건들이 매대 한가운데에 떡하니 놓여 있을 때도 있는데, 오히려 그런 물건이 까다로운 아이들의 구매욕을 더 자극하기도 한다. 


이날은 바자회 물품 매대와 더불어 각종 간식 부스도 함께 열리기 때문에 사람이 말 그대로 '바글바글' 모인다. 음식 부스에서 먹을 걸 하나씩 사들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고픈 물건이 있는지 천천히 살펴보는 것이 바자회의 정석적인 코스다.


바자회에 몰리는 인파는 정말 많지만 애석하게도 그와 별개로 학생들의 안목은 꽤나 높기 때문에, 판매를 담당하는 학생회 임원들은 콧대 높은 고객들의 시선을 끌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이곤 한다. 주로 그 해의 학생회 임원 중 '아, 얘 입담 하나는 정말 인정해 줘야 한다' 소리를 듣는 사람이 총대를 메고, 이따금씩 학생회가 아님에도 화려한 입담을 자랑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를 눈여겨본 학생회 임원들에 의해 전문 판매원으로 초빙되기도 한다. 다년간의 경험을 자랑하는 학생회는 실로 다양한 판매 전략을 구사한다. 이따금씩 대형 할인마트에서의 행사처럼 "지금부터 딱 5분간! 모든 물건 반값 세일!" 을 외치기도 하고,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며 대화를 이끌다가 자연스럽게 물건을 추천하기도 하고, 가끔 특정 물건에 관심을 보일 것 같은 몇몇 아이들을 찾아가 은밀하게 어깨를 톡톡 친 뒤 "네가 갖고 싶어할 만한 물건이 있는데, 특별히 싸게 줄게"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모든 수익은 나눔을 위해 쓰이니 사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지갑을 열길 주저하지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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