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중심이라고 불리우는 도서관의 용도는 실로 다양하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할 수 있는 장소인 것은 당연하고, 행사가 있을 때는 콘서트장이 되었다가, 각종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할 때는 경기가 벌어지는 콜로세움이 되고, 이곳에서 합창 연습을 하기도 하며, 발표 무대가 되기도 하고 토론의 장이 되기도 하고 전시회가 열리기도 하고....... 사람이었다면 분명 지갑에 무수히 많은 명함을 넣고 다녔을 우리의 도서관은 매년 가을이 되면 또 다른 명함 하나를 지니게 된다. '토론 카페 개최 장소'가 그것이다.
한책읽기
매년 도서관이 주체가 되어 한 해 동안 진행하는 장기 프로젝트가 있다. 그 이름하여 '한책읽기'다. 매년 책 한 권을 선정하여 전교생과 선생님들, 그리고 참여를 원하는 학부모님들이 해당 책을 읽은 후 함께 다양한 후속 행사에 참여하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호흡이 굉장히 길기 때문에 마치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진행하는 긴 마라톤과도 같은 느낌이다. 한책읽기를 앞두고 도서관 연구원님들은 인문, 사회, 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기 위해 많은 조사를 한 후 전교생이 모인 앞에서 '올해의 선정 도서'를 발표한다.
"올해 한책읽기 도서는 '서양철학사' 입니다."
그럼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저마다 생각한다. '음, 올해는 철학에 빠삭하다 못해 질릴 지경이 되겠군.'
아무튼 간에, 그날은 일 년의 마라톤을 시작하는 신호총이 쏘아 올려진 것이다. 이제 저마다의 속도로 그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하면 된다. 당분간 아침 독서 시간에 그 책을 읽는 아이들, 도서관에서 그 책을 읽는 선배들, 쉬는시간에 짬을 내어 커피를 마시며 그 책을 읽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학교 곳곳에서 심심찮게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의 모든 사람이 같은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서너 달이 지난 시점이면 '저자와의 만남' 시간을 가지게 된다. 책의 저자를 초빙하여 강연을 듣고 자유롭게 질문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초청 강연 당일이 되면 도서관은 거대한 대학 강의실로 거듭나고, 전교생이 가운데 홀을 중심으로 모여 작가가 들려주는 책 너머 이야기를 듣고 열심히 질문을 던진다. 강연이 끝나면 책에 사인을 받아 '친필사인 단행본'을 얻을 수도 있고, 제비를 뽑아 당첨되면 저자의 다른 책을 선물로 받게 될 수도 있다. 텍스트로만 접하던 이야기를 실제 저자의 입을 통해 실감나게 듣게 되는 이 '저자와의 만남' 시간은, 마라톤 중반부쯤 나누어 주는 시원한 음료수와도 같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모든 사람들이 책을 거의 다 읽어 갈 즈음이면, '토론 카페'라는 큰 행사가 개최된다. 먼저 학생들을 대상으로 '부스 개설' 신청을 받는데, 토론 카페 당일 토론 부스를 열고 싶은 학생들은 2인 1조로 팀을 이루어 신청하면 된다. 토론 부스 운영 팀은 한책읽기 대상 도서의 내용과 관련된 주제를 선정하고 여러 가지 토론 논제를 준비해 두어야 하는 것이 과제다.
토론 카페 행사 당일이 되면 도서관과 강당에 다양한 토론 부스가 개설되어, 저마다 큰 우드락 보드로 꾸며진 간판을 내걸고 학생들을 맞이한다. 부스 운영 팀이 선택한 주제가 곧 해당 토론 카페 부스의 이름이 되기 때문에 부스 리스트를 살펴보면 마치 방송사의 드라마 편성표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를테면 '데카르트가 오늘날의 학교를 본다면?' '니체의 아카이브' '에피쿠로스가 우리에게 말한다' 등 수많은 철학 관련 카페가 생겨나는 셈이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토론 카페 운영 시간이 시작되면,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부스의 간판과 주제를 눈여겨보고 '여기다!' 싶은 부스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간단한 다과와 함께 토론을 진행하게 된다. 토론장에서는 소속과 학년에 관계없이 모두 존칭을 쓰며, 운영진의 진행에 따라 해당 주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필요에 따라 타인의 의견에 코멘트를 붙이는 등 토론을 이어 간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알림 종이 울리면, 해당 토론 세션이 끝난 것이다. 그럼 모두 그 부스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다른 카페 부스로 옮겨 가야 한다.
토론 카페의 모든 세션이 종료되면 전교생이 다시금 도서관의 둥근 홀로 모이고, 각 운영팀은 그간의 토론에서 나온 의견을 큰 보드에 정리하여 모두의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을 가진다. 발표가 끝나면 토론 부스에서 발표 자료로 활용한 큰 보드가 도서관에 일렬로 전시되곤 하는데, 간혹 자신은 간식에 정신이 팔려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한 의견이 대문짝만하게 도서관에 전시되어 수치스럽다는 학생들의 익명 증언이 속출하는 웃지 못할 일도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