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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4. 2021

3학년: 저희가 학교를 이끌라고요?

"이제 너희가 학교를 이끌어야 해."

"학교의 분위기가 너희에게 달렸."

선배들이 졸업을 앞둔 겨울이 되고부터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듣게 되었다. 매번 알았다고 착실히 대답은 했지만, 우리 모두는 당연히 3학년이니 행동과 마음가짐을 더욱 바르게 하라는 취지로 그런 말씀을 하시나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말이 진짜 '학교를 너희가 이끌어라' 라는 뜻리라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영상을 만들라는데?"

새롭게 진행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앞두고, 자원봉사를 맡게 된 작년 학생회 소속 2학년들이 호출되었다. 2학년 학생회 임원들이 한자리에 모이자마자 가장 먼저 전해들은 말은, 신입생들이 학교생활에 금방 적응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의 일과를 담은 안내 영상을 만들는 것이었다. 사실상 학교의 소개 영상이 우리의 손에 달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곧장 회의에 들어갔다. '어떻게 영상을 만들어야 좋을까?'

그러나 우리의 학교에서 '영상을 만들어라'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정말 곧이곧대로 '교육적이며 유익하고 정적인 영상을 만들' 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학생은 없다. 어떤 종류의 의뢰가 들어오든 간에, 이곳에는 예능국 PD들밖에는 없는 셈이다. 선생님들도 애초에 그런 정적인 영상을 기대하고 임무를 맡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쪽의 요구가 모두 맞아떨어진다고도 볼 수 있다. 당연히 우리 회의의 결과물도 다큐멘터리보다는 예능에 가까운 형태로 맺어졌다.

그렇게 오리엔테이션 당일, 신입생 아이들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유명 게임의 타이틀이 대문짝만하게 적힌 게임 패러디 영상을 보게 되었다. 후배들에게 학교의 첫인상은 정말 다가도 모를 곳처럼 여겨질 터였다. 어찌되었건, 우리의 임무는 그렇게 끝이 나나 싶었다.


"신입생 맞이 행사를 기획하라는데?"

입학식 전, 작년에 학생회 소속이었던 임원들이 다시 한 번 호출되었다. 어김없이 가장 처음 들은 말은 이이었다. 신입생들과 2, 3학년이 한데 모여 즐길 수 있는 신입생 맞이 행사를 기획해 와라.

신입생 맞이 행사라고?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곰곰이 되새겨 보니 원래 신입생들의 긴장을 풀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학생회에서 여러 게임을 도맡아 진행하는 경우가 있었음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아학생회가 꾸려지지 않아 기획과 진행을 맡을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작년 학생회 맡았던 2학년들이 그 공석을 메우게 된 것이었다. 속된 말로 '땜빵' 역할을 맡게 된 셈이었지만, 아이들의 경험은 어디 가지 않는다. 보고 듣고 배웠던 바를 살려 기가 막히게 매끄러운 진행과 행사 멘트로 문제 없이 신입생 맞이 행사를 마친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때는 몰랐다. 이게 시작이라고는.



당신의 후보에게 투표하세요


새 봄이 시작되면 학생회장 선거 기간이 다가온다. 우리의 학교에서는 학생회에서 자율적으로 꾸려 가는 일이 비중이 학교 측에서 기획하고 제시하는 일의 비중만큼이나 크기 때문에, 학생회는 단지 사무적인 역할을 맡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실상 그 한 해 동안 학교의 문화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따라서 학생회 내각의 구심점인 학생회장단 선거는 여러 면에서 흡사 대선을 방불케 한다. 


그 해 회장단 후보로 누가 나올 것인가는 아이들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다. 대체로 학생회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 출사표를 던지고, 경험이 없더라도 인망이 높은 아이들이 출마 선언을 하기도 한다.

선거는 러닝메이트 방식을 채택한다. 각 개인이 출마하는 것이 아니라, 회장 후보와 부회장 후보가 한 팀을 이루어 출마를 하고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팀에 투표를 하는 식이다. '회장 선거'가 아니라 '회장단 선거'인 이유도 이와 같다. 2인 1조 출마이기 때문에 력을 많이 쌓고 대외적 이미지가 좋은 후보가 팀에 속해 있으면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입후보 마지막 날까지 많은 아이들이 선거 나갈까 말까를 수십 번씩 고민하곤 한다. 입후보 절차가 마무리되고 후보 팀이 확정되면, 학교는 춘추전국시대처럼 변한다.


각 후보 팀에서는 선거운동본부를 꾸린다. 선본 구성의 핵심은 이른바 '책사'를 데려오는 일인데, 입담이 좋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잘 내는 아이들이 가장 최우선으로 캐스팅된다. 유능한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그 친구의 교실에 갔다가, 기숙사 방에 찾아갔다가, 다시 그 다음날 교실을 찾아가는 삼고초려 감행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인재 영입의 열기가 뜨거운 데 비해 그런 유능한 인재들을 데리고 할 수 있는 행동에는 제약이 따른다. 허용된 선거운동은 오직 포스터와 공약 선전뿐이기 때문이다. 학교 곳곳에서 기호 1번! 기호 1번! 을 외치거나 시끌벅적한 선거 노래를 틀고 피켓을 흔들며 돌아다니거나 하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오직 공약과 이미지로 승부야 한다.


그래서일까? 각 팀에서 선보이는 선거 운동 포스터 정말 창의력 경진대회 수준이다. 신의 팀을 어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보니 포스터에는 각종 패러디와 개그 코드가 난무하는 것은 물론이요, 보는 사람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하는 미학적 요소가 드러나 있기도 하고 입체형 포스터처럼 시선을 사로잡는 독특한 형식을 띤 것도 많다.

발표 및 공청회 역시 유권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인 까닭에, 발표에 임하는 회장단 후보들은 마치 전국 프레젠테이션 대회 참석한 것과도 같은 전문성을 보인다. 학생들은 자신의 일 년 생활과 직결되는 공약을 아주 예리하게 하나씩 찬찬히 뜯어 보기 때문에, 공약 설계와 예상 질의응답에 있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발표와 공청회까지 끝나면 비로소 선거가 진행된다. 학교 곳곳에 선거 천막이 설치되고, 아이들은 선거인단 명부에 이름을 적은 뒤 한 명씩 투표소로 들어가 원하는 선거본부 위에 도장을 찍는다.

가슴 졸이는 개표가 끝나면 비로소 당선인이 확정되고, 그 한 해를 이끌어 갈 학생회가 꾸려지기 시작한다. 이때 어떤 성향의 임원들이 선발되는지에 따라 앞으로 일 년간의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행동파 임원들이 득세하면 그 해는 온갖 게임과 행사, 몸을 쓰는 이벤트 등이 수도 없이 개최되는 한 해가 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지성파 임원들이 득세하면 문예 행사, 토론 행사, 각종 민원 창구의 개설 등 학술적이고 행정적인 번영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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