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배달하는 사람이 건강하다

아무튼, 걷기 #2

by 웰컴이안

매일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매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


회사 복지 중 하나로 매년 종합건강검진을 받는다. 전날 금식으로 굶주린 배를 달래며 아침 일찍 병원에 가서 이것저것 검사를 한다. 이제 요령이 생겨 위 내시경할 때는 수면주사를 맞지 않고 맨 정신으로 끄떡없이 내시경 호스를 목구멍 속으로 넘길 정도가 되었다. 건강검진을 받고 나면 얼마 후 내 건강에 대한 상세 검진결과서가 날아온다. 직장인이면 으레 갖고 있는 지방간 약간의 수치와 함께 체중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코멘트를 보며 뱃살을 쓰다듬게 된다. 스트레스를 줄여야 한다는 권고사항도 있어 가끔 땅기는 뒷목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위나 대장 어딘가에 조그마한 이상함이 있어 '추적관찰이 필요하다.'는 소견도 있다. 사실 추적관찰 하라는 말은 무시무시한 말이지만, 이게 매년 받다 보니 그러한 메시지에 좀 무뎌지기도 한다. 심지어 결과서가 오면 바쁘다는 핑계로 꼼꼼히 잘 읽지도 않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건강검진은 내 건강을 위해 정말 중요하다. 이렇듯 건강검진을 받고 나면 소견서에 뭐라도 한두 가지 정도 경고 메시지는 늘 있었다. 그게 아니면 추적관찰을 위해 추가 진료를 받으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몇 년 전 검진을 받고 나서 받은 검진결과서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조세형님, 올해 검진 시에는 진료가 필요한 소견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서 수십 번 건강검진을 받았지만 이렇게 담백한 소견서는 처음 받아보았다. 좋아한다는 사랑 고백도 아닌데 순간 잠깐 설레었다. 내가 이렇게 건강해졌나라는 생각도 잠시, 이 소견서를 받아보고 나서 지난 1년간 내 생활습관을 곰곰이 뒤돌아봤다. 다른 해와 달리 식습관을 체계적으로 확 변화시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간혹 마시던 음주습관 역시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체중이 살짝 줄어들긴 했지만 그게 다이내믹한 체형 변화를 가져올 정도도 아니었다. 이처럼 몇 가지를 따져 보았을 때 내 건강을 좋아지게 한 거라고는 '그것'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설마 그것이 나를 이렇게 무병장수 초급 입문반으로 이끌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걷기였다. 자, 1년쯤 전으로 돌아가 보자. 회사에서는 일정한 영어 말하기시험 등급이 필요하다. 업무에서 영어를 많이 사용한다기보다는 승진이나 평가를 위해 객관적인 지표가 있어야 하니 필요한 등급이다. 그걸 높이거나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지 위해 영어 말하기시험을 본다. 자기 생각을 술술 편하게 영어로 구사하는 사람이면 몰라도, 영어 말하기시험에 스트레스가 있는 대부분 사람은 어느 정도 짜인 사전대본(?)이 필요하다. 나 역시 영어 울렁증으로 인해 당연히 그 대본이 필요한 케이스이다. 가령 "당신은 휴일에 주로 뭘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시험장 컴퓨터에 연결된 마이크에 대고 "저는 휴일에 주로 제 반려견과 함께 공원을 산책합니다. 산책은 저에게 세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됩니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걸으면 스트레스를 풀어줘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어쩌고 저쩌고~" 식의 대본을 자연스럽게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비록 난 반려견도 없지만 영어시험 대비로 구입한 학습참고서에 잘 정리된 이런 스크립트 그대로를 일단 외운다. (너무 무식한 방법이라 놀리지 마라. 누군 이런 방법을 쓰고 싶어 쓰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스크립트를 토대로 여러 상황에 맞게 변형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가장 기초 뼈대가 되는 기본 스크립트는 입에 익숙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 암기교육 수업은 학교 졸업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구시렁거림도 잠시, 이런 영어시험 대비 암기에 좋은 방법인 내 목소리로 스크립트를 녹음해서 그걸 계속 듣는다. 듣고 나서는 입으로 따라 중얼거리는 거다. 시험 치르기 며칠 전부터 저녁에 이어폰을 끼고 걸으며 계속 영어공부(가 아닌 중얼거림 암기)를 했다.


그렇게 지낸 지 얼마 후, 대단한 결과를 얻었다. 영어시험을 잘 치렀다기보다 걷기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 것이다. 영어시험이 끝난 이후에도 저녁이면 매일 걷기를 했다. 매일 걷는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지만 그나마 현관에서 운동화 끈 묶고 나가는 가장 힘든 허들만 넘어서면 한걸음이 두 걸음 되고 두 걸음이 세 걸음 되며 걷게 된다.


앞서 말한 그 소견, '올해 검진에서는 진료가 필요한 그 어떤 소견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내용을 받기 1년쯤 전에 이처럼 걷기를 열심히 했다. 폭우나 폭설, 한여름 혹서기일 때만 빼고는 거의 매일을 걸었다. 컨디션 좋은 날은 10km, 적게는 3~4km라도 걸었다. 내 걸음걸이로는 1km를 9분~10분 정도로 걸었다. 보통 1시간은 걸었으니까 평균 5~6km 정도는 걸은 셈이다. 음주한 날은 술기운도 깰 겸 술자리를 나와 지하철역 몇 정거장 정도 건너뛰며 1~2km 이내라도 걸으려 했다. 걷는 거 말고는 따로 건강관리를 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식습관과 음주행태는 거의 그대로였다. 생활습관이 크게 바뀐 거라고는 1년간 걷기만 빼놓지 않고 했다는 점뿐. 물론, 1년간 걸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런 건강이상 소견이 없는 건 아니리라. 하지만 지금껏 받아보지 못한 놀라운 소견을 받게 된 이유 중 가장 큰 요인은 역시 걷기라는 자체결론을 내렸다. 그전에도 걷기를 아예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평소 출퇴근 하며 다닐 때는 대부분 1인 운전을 하며 다닌다. 하지만 늘 마음 한편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0.1톤도 안 되는 나 한 사람 몸을 이동시키기 위해 스무 배가 훨씬 넘는 2톤짜리 차가 다닌다는 게. 그것도 운전자 한 사람만 태우고 말이다. 도로와 세상에만 미안한 게 아니라 내 다리에게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몸뚱이 주인님, 전 다리잖아요. 걷고 달리기 위해 존재하는 거 아닌가요? 근데 왜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앉아만 있나요?" 이렇게 다리가 나에게 묻는 듯했다. 그래서 한때는 차를 놔두고 자전거로 출퇴근하기도 했다. 내 다리 쓸모를 늘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땐 다리도 신이 났는지 허벅지도 불끈, 종아리도 불끈했었다. 그 시절이 나에게는 건강 리즈시절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여러 가지 제약이 있어 차로 다니지만, 차 트렁크에 운동화 한 켤레를 넣고 다니며 짬나는 경우에는 신발을 갈아 신고 잠깐이라도 걷는다. 걷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는 회사 영어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한 암기학습 시간이었지만 그 걷는 즐거움을 점점 알게 되었다. 퇴근 후 별일이 없으면 어김없이 운동화를 신고 나간다. 1시간 내외는 꼭 걷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 일하며 잠잘 시간도 없는데 운동할 시간이 많아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나 역시 회사에서 일하고 와서 집안일과 육아를 마치고 나서야 밖으로 나선다. 내가 가진 24시간 중에서 이러저러한 자투리 시간 1시간을 모아 나가는 거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운동하는 시간이 하루를 짧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생이 길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 건강해지기 위해 걸으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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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계기 외에도 계속해서 꾸준히 걷는 데에는 내게 그 흔한 '업그레이드병'이 없는 것도 무시 못 할 이유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걷기 즐거움이 업그레이드되어 달리기로 연결되지 않아서 참 좋다고 말이다. 아마 달리기로 취미가 옮겨 갔으면 내 체질과 체력은 버티질 못했을 것이다. 얼마 전부터 걷기보다는 달리기가 열풍이다. 러닝크루가 되어 달리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고, 방송과 신문에서도 예전보다 달리기 효능에 대한 기사를 더 자주 접하게 된다. 걷기와는 또 다른 달리기의 매력과 효과가 당연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걷기만으로도 너무 좋다. 내 몸은 달리기보다는 걷기를 원한다. 걷기를 본격적으로 좋아하기 이전부터도 몸은 알게 모르게 그걸 원했나 보다. 예전부터 친구들과 간혹 골프를 나가면 동반자와 캐디에게 시작 전에 양해를 구한다. 내 카트자리는 따로 정하지 않아도 되니 그 자리 편하게 않으라고. 잠깐잠깐 경기 흐름을 서둘러야 하거나, 홀과 홀 사이가 멀어서 반드시 카트를 타고 이동할 때 외에는 가능하면 18홀 내내 걸어 다니려고 한다. 걷는다고 해서 경기 흐름이나 동반자 플레이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게다가 나는 장비나 하드웨어에 대한 업그레이드병도 거의 없는 편이다. 그쪽으로는 감각이 좀 무딘 편이다. 걷기나 달리기를 하려면 어떤 브랜드의 무슨 운동화가 끝판왕이라는 글을 가끔 보게 되지만 그리 현혹되지 않는다. 그냥 평소에 쉽게 접하는 유명 브랜드 중저가 수준 운동화 정도면 만족하는 편이다. 양말도 마찬가지로 그리 까다롭지 않다. 그냥 너무 얇지 않고 푹신한 좋은 면이면 만족한다. 이러한 성정은 걷기 말고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 남성들과 달리 차에 대한 로망도 그리 많지 않다. 차를 살 때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꼼꼼히 따지기보다는 영업사원에게 한두 번 설명 듣고 권해주는 차를 그냥 바로 구입하는 편이다. 어찌 보면 그 큰 금액의 상품을 사며 충동구매에 가까운 편이다. 참 만만하고 편한 고객(이 아니라 호구인 것)이다. 장비병이 자주 온다는 골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골프는 잘되면 장비 탓, 잘되지 않아도 장비 탓이라는 우스갯말이 있다. 골프 가방 속에 들어있는 드라이버 채는 십몇 년 전부터 치던 거다. 십몇 년을 쳤는데도 굳이 신상품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은 거의 들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가며, 더더욱 작게나마 마음속에 있던 장비병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이럴지 언대 하물며 걷기를 한다고 유난을 떨며 운동화나 양말을 사거나 하는 행동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편한 운동화만 있으면 족하다. 얼마 전부터 무릎보호대를 하는 게 전부이다. 이처럼 나에게는 편안한 운동화 한 켤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걷기의 매력이다. 제주도 여행 가서는 관광지를 돌다가도 올레길 한두 코스를 걷고, 높지는 않아도 나름 걷는 재미가 있는 나지막한 산들 둘레길을 걷는다. 동네 주변 마실 가듯 한강에 연결된 산책길도 걷기에는 그만이다. 난 이 매력덩어리 덕분에 그나마 더 건강해졌(다고 믿고 싶)다.


걷다가 집에 돌아와 몸이 기분 좋게 뻐근해질 때면 오래된 외국속담이 생각난다. 매일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매일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허준 동의보감에도 비슷한 내용의 문구가 있다고 한다. '좋은 약을 먹는 것보다는 좋은 음식이 낫고 음식을 먹는 것 보다는 걷기가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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