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구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는가?"

무연고자와 장례주관자

by 여행자

입원 한 환자는 직계가족과 형제가 없었다. 이미 진행된 간경변으로 입원 당시부터 예후는 불량했고 곧 사망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예견하고 있었다.


가족은 없었지만, 환자 곁에는 이웃이 있었다. 이웃이라고 밝힌 그녀는 평소 건강이 좋지 않은 환자를 위해 식사나 청소 등 일상생활을 도와왔다고 한다. 그러나 가족관계가 아니었기에 병원에서는 면회를 허용할 수 없었고 차선으로 사회복지팀을 찾아와 환자의 치료 상황을 문의했다. 사회복지팀 역시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환자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알릴 수 없었기에 단지 위중한 상태라는 정도의 정보만 전달할 수 있었다.


이 여성은 환자의 장례를 걱정하며 사망 이후의 절차에 대해 여러 차례 상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가족이 아닌 타인이 장례를 주관하는 것은 법적·행정적으로 여러 제약이 따랐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넘기 어려운 벽이 존재했다.


이웃이 장례까지 고민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관계를 의심했고, 행정복지센터를 통해 동거 여부나 사실혼 관계를 확인하고자 했지만, 어떤 기록에도 그들의 관계는 남아 있지 않았다.


현행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사법’)」은 가족이 아닌 타인도 구청장의 인정을 받을 때 ‘연고자’로서 장례를 주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의료법」에서는 사망진단서 발급 권한을 환자의 ‘가족’에게만 부여하고 있다.


장례법상 인정되는 ‘장례주관자’가 의료법상 진단서를 발급받을 수 있는 주체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도 간 불일치가 발생한다. 그 결과, 장례를 치르려 해도 사망진단서가 없어 화장 절차를 진행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두 법률 간의 해석 차이는, 사별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상실과 좌절로 이어진다.


며칠 후, 그녀는 희망에 찬 표정으로 사회복지팀을 찾아왔다.

“구청에서 장례주관자 신청하고 왔어요. 장례를 치러도 된다고 하네요.”

“장례주관자라 하더라도 진단서 발급이 불가능하므로 어찌 장례를 치른다고 해도 화장부터 불가능할 겁니다.”

단박에 자를 생각은 아니었지만, 현실적인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구청에서는 된다고 하고 병원에서는 안 된다고 하니 이해되지 않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결국 환자는 무연고자로 분류되어 지자체의 무연고 장례 절차를 통해 화장되었고, 유골은 시립납골당에 안치되었다. 무연고 장례가 끝난 후에도 그녀는 다시 사회복지팀을 찾아와 유골을 인수할 방법을 문의했다. 무연고 장례까지 치러졌다면 잊히기 마련인데 왜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면담을 통해 그녀가 과거 환자와 혼인 관계에 있었던 사실을 확인했다. 알코올의존 문제로 오래전 이혼해 법적으로는 이미 타인이었지만 여전히 관계의 책임과 인간적 연민 때문에 환자를 다시 돌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무연고 장례는 최근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가족 관계의 약화, 비혼 인구의 증가, 그리고 장례 비용에 대한 경제적 부담 등이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2022년 기준 초혼 신혼부부 중 약 30%가 자녀가 없는 ‘딩크족’으로 조사되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가족 기반의 돌봄과 장례 문화가 약화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부부 중 한 명은 무연고 장례를 치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으로 가족 중심의 장례문화가 재구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생전 마지막을 함께해 줄 사람을 스스로 지정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있다면 외로움 끝에 인간의 존엄은 지켜지지 않을까?


장례를 치를 가족이 없다면 제3자를 ‘장례주관자’로 미리 지정할 수 있는 법적 절차나, 사망진단서 발급과 장례 절차 간의 제도적 연계를 보완하는 방식이다.


행정의 편의를 위한 논의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관계의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이기도 하다. 삶이 개인화되고 관계의 형태가 다양해지는 시대에, ‘무연고’라는 단어는 단순히 가족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제도의 경계를 넘지 못한 인간의 마음, 그리고 함께하고자 했던 누군가의 존재가 있다.


무연고 장례를 둘러싼 논의는 결국 “누가 누구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제도의 논리를 넘어 인간적 존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때론 논리적이지 않는 것이 답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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