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아지면 하지 않을 이유를 찾게 된다.

영알못의 영어 프레젠테이션

by 여행자

외국인 환자를 종종 만나게 된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느껴 영어를 배워볼까 생각도 했다.

출근 전 새벽반 영어 학원을 다니기도 했지만 영어실력은 늘지 않았다.

몇 개월 수강을 하니 귀가 트이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어려웠다.

리스닝이 되면 뭐 하나? 스피킹이 안되는데....


포기했다.

강한 목표의식도 없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새로운 것에 시도를 많이 하는 편이지만 포기도 빠르다.


삶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자기 암시를 했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히 거의 동시통역 수준의 번역이 가능하다.

심지어 사진만 찍어도 번역이 되는 정도다.


최근 입사하는 직원들이 어렵지 않게 외국인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놀랍다.

몇 년 차이는 내 생각이지 이미 세대가 다르다.

어린이집에서부터 영어를 배우는 세대와 비교가 불가능하다.


내빈이 방문하기로 했다.

약 3주간 머무르며 병원 구석구석을 둘러볼 예정이다.

환자에게나 관심 있지 내빈에는 관심 없다.

사회복지팀까지 방문할 일도 없어 마주칠 일이 없다.

그런데 내빈이 외국인이다.

정확히 어떤 목적으로 방문하는지 모르겠다.


각 부서에 지시사항이 내려졌다.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란다.

15분이라는 꽤 긴 시간을 말이다.

사회복지팀까지....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통령이 오는 것도 아닌데 프레젠테이션까지 할 일인가 싶다.

예행연습(리허설)까지 예정되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면 해 보고 고민해도 된다.

피할 수 없다고 즐길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피할 수 없기 때문에 한다.

이유는 나중에 찾아보자.

내가 생각하는 것과 상급자나 경영진이 생각하는 것은 다르니까.


어차피 영알못.

보고 읽을 정도의 수준으로 발표자료를 만들었다.

과하지 않을 정도의 텍스트, 과하지 않을 정도의 사진을 넣었다.


자료를 만드는데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한글로 작성한 시나리오를 번역기를 이용해 번역하고 Ctrl+C, Ctrl+V로 마무리했다.

적어도 스펠링이 틀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검토는?

할 수도 없고 못 한다.

번역기를 신뢰할 수밖에 없다.

단어를 읽을 수는 있지만 맞는 말인지 아닌지까지 검토할 수 없다.

문맥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냥 읽었다.


평소에 하던 업무, 더군다나 한글로 하는 발표에 긴장하는 일은 없다.

굳이 연습하지 않아도 발표 정도야 가볍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이골이 났다.


영어는 달랐다.

내가 읽고 있는 단어가 맞는 것인지 아닌지도 몰라 발표 중에도 머릿속은 의심으로 가득 찼다.

"천천히 하고 연습을 조금 더 하면 될 것 같다."라는 격려를 해주셨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래간만에 벌벌 떨면서 발표를 했다.

본 무대는 아직 3주 정도 여유가 있으니 발음이라도 좀 연습해야겠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꼭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 않아야 할 이유, 하지 않아도 될 이유, 꼭 내가 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찾게 된다.

불편한 일을 계속 피하면 정말 불편한 채로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불편한 일을 경험하는 것도 결국은 성장이다.


오늘도 새로운 경험을 했고 성장했다고 믿고 싶다.

사실 성장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성장보다 퇴화할 시기에 들어선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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