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상자에 적힌 생산자 이름

농부의 꿈

by 여행자

사업 실패 후 부모의 농사일을 도우며 재기(再起)를 꿈꿨다.

도왔다고 하지만 부모는 고령으로 농사일을 할 수 없었다.

포도 농사를 시작했고 3년이 지나 첫 수확 시기가 찾아왔다.


포도나무를 심는다고 저절로 열매를 맺지 않는다.

적어도 2년 정도는 유목(幼木)으로 잎과 가지를 잘 관리하고 병충해를 이겨야 한다.

유목(幼木) 시기를 어떻게 거쳤으냐에 따라 열매의 품질이 결정된다.

3년째라고 해도 상품성이 좋다고 하기는 어렵다.

포도알이 굵지 않거나 송이가 조금 작을 수 있다.

다른 작물도 마찬가지겠지만 열매를 맺기 전부터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 포도다.


비료와 농약 등 농자재의 상당 부분은 외상거래나 대출이다.

농작물을 출하해서 얻은 수입으로 갚아가는 식이다.

확인된 부채만 8,000만 원이 넘었다.


포도 수확을 앞두고 뇌출혈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미혼인 환자는 형제들이 보호자 역할을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형제들은 당황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동안 보호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병원비 지원신청을 하고 수급 신청까지 진행했다.


회복을 기대하며 기다려 보지만 벌써 47일째 입원 중이다.

"이제 눈을 떴어요."

"제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요."

가족의 기대가 반영된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다.

자극에 반응하는 정도이고 인지능력이 있다고 판단하기 이르다.


이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다.

기대감에 보호자는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

불필요한 치료를 요구할 수도 있고 갑작스럽게 병원을 옮기기도 한다.


보호자를 진정시켜야 한다.

"좋아지고 있는 것 같기만 아직 치료 중이니 조금 더 지켜보고 판단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의사에게 치료 경과를 확인해 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급성기 치료가 끝났다.

재활전문병원이든 요양병원이든 병원을 옮겨야 한다.

병원을 알아볼 여력도 없고 병원비를 또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하다.

얼마나 더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지도 알 수 없다.


"얼마나 더 치료받아야 할까요?"

"더 치료받으면 나아질 수 있을까요?"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지만, 지금은 재활치료를 꾸준히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금방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답이 듣고 싶었을 것이다.


환자도 걱정이지만 추석 연휴까지 포도를 수확해야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

형제들은 병원비와 간병 비용을 감당하며 포도 수확에 매달렸다.

지역 귀농청년회에서도 일손을 도왔다.


"막연했는데 도움(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확한 포도 몇 상자를 가져왔다.

잘 익은 포도 몇 송이가 담겨있다.

환자의 땀으로 기른 포도를 직접 수확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포도 상자에 환자(생산자)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있다.

환자는 풍작(豊作)을 기대하며 입원 전 상자를 주문했던 모양이다.

병실에서 보는 환자 이름표에서 느껴지는 감정과는 또 다른 감정이 느껴진다.

유목(幼木) 시기를 잘 버텨야 좋은 열매를 맺듯 환자도 초기 치료시기를 잘 버텨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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