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행위를 결정할 보호자.

보호자의 기준

by 여행자

환자가 입원하면 병원에서는 으레 보호자를 찾는다.

가벼운 질환의 경우 환자의 의사로 충분하다.

환자 스스로 동의 여부를 결정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 환자와 일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대행결정권자로 규정하기도 한다.


의료법령에서는 보호자의 범위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지만 통상 민법상 부양의무자에 준하여 해석하고 있다.


보호자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실상 의료행위의 의사결정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의료기관에서 배우자나 친족관계에 있는 사람을 보호자로 인정하는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환자를 대신한 의사결정에 가장 신뢰할 수 있고 법적분쟁도 최소화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의료행위 동의여부 결정에 가족의 관여도가 높다.

심지어 환자가 동의 여부를 결정할 능력이 있음에도 가족이 의료행위를 결정하기도 한다.


보호자의 기준을 민법상 부양의무자와 동일시한다면 보호자의 범위가 지나치게 축소되어 환자에게 적절한 선택의 기회나, 적절한 진료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보호자가 없다고 모두가 적절한 진료를 받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응급 상황에서는 의사가 의료행위를 결정하기도 한다.

문제는 민원이나 법적분쟁을 감수하면서 의사가 의료행위를 결정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간경변과 간성혼수로 의식이 없다.

50대 후반의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부터 혈액투석까지 중환자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장비가 동원됐다.

언제부터 얼마나 음주를 한 것인지보다 당장 보호자 확인이 필요하다.


환자는 이혼 후 혼자 생활했고 의료진은 건강이 좋지 않은 채 방치된 것 같다고 추정한다.

기초생활수급자로 보호받고 있지만 돌봐줄 보호자가 없었던 것이다.


연락이 닿은 딸은 30년 이상 관계 단절로 지냈다.

음주운전부터 교정기관(구치소나 교도소) 수감, 병원 이용 등 문제가 있을 때마다 연락받았다고 한다.

환자가 입원했다는 말에 머뭇거린다.

보호자역할이나 병원비 독촉을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환자에 대한 애착도 없고 병원비 등 책임이 전가되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하지만 의료행위에 의사결정을 해줄 보호자가 필요하다.

직장에 반차를 내고 어렵게 병원에 방문했다.


사망 시 어떻게 조처되는지부터 궁금해했다.

관계 단절이라도 사망 시 직계가족을 찾고 신병 인수에 대한 의사를 확인한다.

신병 인수를 거부하면 지자체에서 화장 등 무연고 장례가 진행된다.


의사는 DNR(Do Not Resuscitate : 소생술 포기) 서약에 대해 설명했다.

딸은 누가 봐도 사회초년생의 티가 났고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불안해했다.


어린 시절부터 환자와 관계 단절 상태로 지내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의식 없이 누워있는 환자의 모습을 보고 왈칵 눈물을 쏟아낸다.

그렇게 10분은 넘게 기척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쉬움인지 원망인지는 모르겠다.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자녀가 환자를 보고 눈물 흘리는 장면을 종종 목격한다.

타인과 다를 바 없이 지냈지만, 가족이라는 끈 하나로 가족애를 느끼는 것일까?


고심 끝에 DNR(Do Not Resuscitate : 소생술 포기) 서약을 했다.

의료행위에 의사결정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힘들다.

뒤늦게 찾아오는 후회도 무시할 수 없다.

의사가 가장 잘 안 텐데 알려주면 안 되냐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어떤 결정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짐작만 할 뿐 생사에 정답은 없기에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회복에 대한 기대가 낮기도 했지만, 보호자로서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문득 가족(혈연)이라는 사실만으로 의료행위에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든다.

환자와 갈등으로 인한 관계 단절이라면 환자에게 불리한 의사결정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구에게 유리한 의사결정인지 의문이 생긴다.

적극적인 치료를 받겠다는 환자의 의사를 의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보호자가 뒤집는 것에 문제는 없을까?


혈연이나 혼인 관계가 아니라도 수년간 사실혼 관계로 지냈지만,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가족보다 더 가족같이 지냈더라도 법적으로 의료행위에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

반대로 직계가족이 있지만 의사결정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과연 누가 보호자로 더 적합할까?


보호자의 자격은 혈연으로 제한하는 것이 맞을까?

민법상 부양의무자에 준하여 해석하는 방법이 최선일까?


정서적 친밀감을 보호자의 기준으로 정할 수는 없을까?

정서적 친밀감을 보호자의 기준으로 정한다면 그 기준은 어떻게 정해야 할까?

치료 과정에 환자 본인의 의사결정이 가장 중요하다면 보호자의 선택도 환자의 결정에 따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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