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오랜기간 동안 한 아이를 후원하는 후원자가 복지관으로 연락이 왔다. 이번에 아이가 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는데 첫 등록금을 납부할 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기관에서 연 1회 결연아동의 근황을 편지로 작성하여 후원자에게 전해주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고 전화를 준 것이었다.
며칠 뒤 후원자는 직장동료들과 후원금을 모아 장학금을 전달해주었다. 흔한 전달식을 바라지도, 아이와 만나서 직접 주겠다는 이야기도 없이 기관의 후원계좌로 장학금을 보내주었고 기관은 아이 통장으로 전달해주었다.
또 다른 전화를 받았다. 이번엔 옷을 후원하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후원담당자는 비닐봉지 뭉텅이로 쌓여있는 옷들을 가져와 분류하기 시작했는데 색이 바랜 옷, 얼룩이 묻어 있는 옷, 3XL정도의 큰 옷들이었다. 이 옷을 분류하는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한다. 또한 연말이 되면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품이나 화장품을 후원해주며 기부금 영수증을 요청하는 업체도 있다. 얼마 전 TV뉴스에서 아름다운가게에 기부된 옷들 중 60%는 폐기물이라는 것을 다룬 내용을 볼 때 씁쓸한 마음이 든다.
2017년 겨울, 롱패딩이 한창 유행을 하던 때 논란이 되었던 기사를 읽었다.
‘20만원 짜리 롱패딩, 빈곤 아동은 꿈도 꾸지마?’(2017.12.16. 조선일보 기사 제목)
어느 한 후원자가 자신이 후원을 하고 있는 아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롱패딩을 보내주려고 하는데 괜찮은지 물었고, 아이는 재단을 통해 모 브랜드 140사이즈 롱패딩을 갖고 싶다고 문자를 보냈다. 후원자가 확인해보니 20만원짜리 롱패딩이었고 자신을 물주로 생각하는 것 같다며 후원을 중단하겠다는 메시지를 해당 단체에 보냈다는 기사였다.
이 기사에서 아이가 처음부터 고가의 패딩인 것을 알고 후원자에게 요구했는지, 단지 남들이 다 입는 브랜드의 패딩을 가지고 싶어서 요구한 것인지 그 마음은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것은 후원자가 마음이 상해서 더 이상 후원을 못하겠다고 중단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이가 너무 과한 요구를 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후원자가 패딩을 사주겠다고 하니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을 말한 것 뿐인데 너무 과한 반응 아니냐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그 금액이 부담스럽다면 아이를 타일러서 적정수준의 금액으로 사주겠다고 이야기를 하거나 어른으로서 경제관념을 알려줘도 되지 않겠느냐는 반응들도 있을 것이다.
동정으로 후원을 하는 사람은 후원의 상대를 떠올릴 때 내가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준다면 당연히 고마워 어쩔줄 몰라하고, 고개숙이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만일 기껏 마음을 내어 도와줬더니 받는 쪽에서 기쁜 내색을 하지 않거나 감사의 표시가 없다면 서운함과 분노감이 올라올 것이다. 후원하는 사람은 본인이 하고 싶어 하는 후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분노하는가? 본인의 행위 자체를 만족해야지 행위에 대한 보상까지를 바라는 것은 상대에 대한 소유욕이다. 자기가 원하는 행동을 해주기를 바라는 인형놀이와 같다.
또다른 예시로 가난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상처받는 아이들이 있다. 기초생활수급자 아동이 프렌차이즈 돈까스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떤 어른이 '저 비싼걸 나눠먹지 않고 각자 하나씩 먹네'라며 불쾌감을 드러낸 일도 있고, 무료로 영어 괴외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아이에게 틴트를 선물해주었는데 얼마 후 아이가 학교에 틴트를 바르고 가자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틴트 살 돈은 있나보다?'라고 얘기 했던 것 등 실제 우리의 현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들이다. 가난한 아이는 돈까스 말고 라면만 먹어야 하는 것인가? 가난한 아이는 자신을 꾸미는 것이 사치인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가난한 사람의 삶을 함부로 단정짓고 그 이상을 바라거나 요구하는 것은 사치라 생각하고, 너와 내가 다르다고 구분지으려고 하는 것은 또다른 차별이다.
한 인권연구가는 주는자의 마음에 달려있는 후원은 자선으로서의 접근이고, 최소한의 생활영위가 가능하도록 주는 접근은 필요에 따른 접근, 사회구성원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접근은 권리로서의 접근이라고 하였다. 당장의 결핍을 모면할 정도의 수준만 주는 것, 비참함을 벗어날 정도로만 주는 것이 비윤리적이라고 말한다.
요즘은 시대가 변화하여 후원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있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단순 클릭이나 댓글 하나만으로 몇 백원씩 후원에 동참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어떠한가? 불쌍한 사람은 낡은 옷, 유통기한 임박한 식품들도 기꺼이 받으며 고맙게 생각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마음은 기부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남을 불쌍히, 업신여기는 비뚤어진 마음이다. 세계인권선언문 제 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헌법 제 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세계인권선언문과 헌법에 명시된 인간의 존엄성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며 누가 누구를 업신여기고, 자기보다 낮춰 상대를 바라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후원자의 선의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에게는 제 3자가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행복만 허락되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자선 의식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싶다.
비단 개인 후원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후원단체에서도 종종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요구할 때가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동에게 장학금을 연계해주기 위해 후원단체에 신청서를 작성할 때면 홍보의 목적을 가지고 아동의 사진이 노출될 수 있다거나 기관 행사에 아동이 반드시 참석해야하는 단서조항을 두는 경우가 있다. 물론 동의, 미동의 여부를 체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나 형식적인 것일 뿐 동의하지 않으면 탈락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선정에 불리하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어쩔 수 없이 동의를 하게 된다. 장학금을 주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만 민감한 사춘기에 있는 아이들이 사진촬영을 할 때 어색하게 쭈뼛거리고 고개 숙이는 모습과는 달리 환하게 웃는 후원자의 얼굴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내가 낸 후원금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목적대로 사용했는지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후원자의 권리이고, 후원처도 분명하게 후원금 사용 내역을 공개해야할 의무를 가진다. 그러나 그 이외에 후원하는 아이와 따로 만나게 해달라거나 아동의 사진을 요구하는 것은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다. 헌법 제17조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말 그대로 처지를 바꿔서 생각한다면 내가 불쾌하거나 불편한 일은 상대도 싫기 마련이다.
뒤에서 도와준다는 후원(後援)의 의미처럼 나의 우월을 드러내기 위해 보여주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선한 실천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