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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밭에 부는 바람

텃밭에 속사정 ⑭ 고수

by 황반장

처음에는 ‘고수’가 이렇게 호불호가 강한 채소라는 걸 알지 못했다. 젊은 층이 많이 모이는 거리를 중심으로 베트남 쌀국수 전문점이 하나둘씩 생겨날 때의 일이다. 함께 간 친구들과 쌀국수를 시켜 놓고 이런저런 수다 삼매경이었는데 고수 이야기가 화제였다. 쌀국수에는 역시 고수를 듬뿍 넣어 먹어야 한다는 소수파와, 쌀국수는 맛있지만 고수는 향도 맡기 어렵다는 다수파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와중에 내가 한 말이 문제였다. 우리 집에서는 김장 때마다 고수김치를 담가 먹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소수파와 다수파는 정견의 차이를 넘어 단결했다. ‘이건 김치로 담글 수 있는 채소가 아니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는 고수가 나지도 않는다’했다. 공격 대상이 나 하나로 정리되면서 소수파와 다수파는 기세가 등등했다. 아니 그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먹어온 고수김치와 고수 쌈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엄마의 텃밭에는 늘 고수가 심어져 있었다. 늦여름 밭을 고르고 씨에서도 향이 나는 고수 씨를 훌훌 뿌리고 살짝 흙을 덮어두면 가을에는 작은 밭 한 고랑에 고수가 차고 넘쳤다. 이 고수는 김장하는 날에 작은 통 하나 정도 될까 말까 한 정도의 고수김치로 담가졌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분들은 부추김치를 상상하면 된다) 한 겨울에 두고두고, 조금씩 상에 올라오곤 했는데, 처음에는 특유의 향 때문에 젓가락이 잘 가지 않았지만 이내 그 맛을 알게 되면 제일 먼저 찾게 되는 게 이 고수김치였다.


내 고향인 경기도 파주는 고수의 메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고수가 흔하다. 텃밭에 고수가 심겨 있는 풍경은 일상적으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파주시의 구시가지 격인 금촌역과 금촌 시장 부근의 오래된 삼겹살집, 갈비집에서는 쌈채소로 고수가 나오는 곳들도 있다. 베트남 쌀국수집에서 주는 작은 접시 수준이 아니라, 상추 등과 함께 채반 가득 생채소 고수가 담겨 나온다. 지글지글 구워진 삼겹살에 고수를 곁들이면 고기의 풍미도 높여주고 잡내도 잡아준다. 쟁반 가득 고수를 내오는 주인장의 얼굴이 ‘파주에서 삼겹살은 이렇게 먹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다른 지역에서는 고수를 잘 먹지 않고, 호불호도 아주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앞서 말한 쌀국수집 사건 이후이다. 대한민국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고수김치를 담그지 않으며 삼겹살을 고수 쌈에 먹지 않았다. 얼마 전 이런 이야기를 SNS에 올렸더니 몇몇 지역에서 고수김치를 담그거나 고수를 먹는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가장 많은 얘기가 있던 곳은 김포와 강화도인데 이 지역은 파주와 인접한 지역으로 볼 수 있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강원도 인제에서의 군 생활 시절, 대민지원 나간 집에서 삼겹살에 고수를 줘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는 다수파의 증언도 있었다. 이렇게 대개는 임진강을 매개로 한 경기북부 지역이나 강원 북부에서도 고수를 먹는다는 게 확인되었다.

좀 생소하다 생각된 곳도 있었는데 완주나 장수 같은 전라북도 지역에서도 고수를 먹는다는 것이다. 고수김치를 담그는 집도 있고, 장터에서도 꼭 판다고 한다. 그 외의 지역에도 고수를 키우고 먹는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크기조정]20180527_123056.jpg 고수 꽃이 피었습니다.


지중해가 원산지인 고수가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키워져 식용으로 사용했는지 명확지 않다. 고려시대 때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한방에서는 고수의 열매를 호유실(胡荽實)이라고 하여 약해진 소화기관에 약재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몇 년 전,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매년 11월이면 김장을 이어오고 있지만 고수김치를 담그지는 않는다. 어찌 담그지는 모르고, 더 이상 텃밭에는 고수를 키우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장을 할 때마다 예전에는 고수김치는 담았었지 하는 생각이 들고 기억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올해는 텃밭의 한구석에 고수 씨를 새로 뿌리고 풀 관리도 두어 차례 해주었다. 처음에는 별 볼품없이 자라더니 한 여름을 지나고 나서는 제법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는 모양새다.


두어 번 고수 잎을 잘라서 먹고 이제는 씨앗을 맺었다. 고수 씨도 향이 나는데 잎에서 나는 향보다는 좀 더 상큼한 귤향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고수 밭고랑에 앉으면 진한 향이 가득 올라온다. 다시 고수김치를 담그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다시 씨앗을 받아 내년을 기약한다. 씨앗에는 오늘의 기억이 각인돼 있고 내일의 희망도 그려져 있다. 이렇게 이어지면서 또 하나의 삶의 궤적이 될 것이다. 그렇게 고수 밭에 바람이 분다.






<도시농부를 위한 고수 키우기 팁>


- 평평한 이랑을 만들고 깊지 않게 고수 씨를 심어준다.

- 고수 씨는 발아가 늦은 편이므로 수분이 마르지 않도록 해준다.

- 화분에 심어도 잘 자란다.

- 수확은 잎만 잘라먹어도 되고 뿌리째 뽑아도 된다.

- 씨앗을 받을 고수를 미리 정해두어 관리하면 채종이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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