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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밭을 지킨 사람들

탓밭의 속사정 ⑯ 고구마

by 황반장

어릴 적, 집 앞에 제법 넓은 고구마밭이 있었다. 어머니가 애지중지 가꾸는 이 고구마밭 덕분에 고구마 줄기 볶음이며 고구마 밥, 맛탕에 찐 고구마 등등 고구마를 이용한 여러 가지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특히나 대설이 지나고 깊은 겨울로 접어들면 방안에 화로를 들이고, 여기에 구워 먹던 군고구마는 깊은 밤의 허기를 채워주는 고마운 간식거리였다. 불이 잘 들지 않아 온기를 느낄 수 없는 구들방의 윗목에는 늘 고구마 상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집 땅인 줄 알았던 고구마밭은 사실은 미군부대에 달린 야산을 어머니가 돌을 골라내고만 든 밭이었다. 이후에 미군부대의 철책선이 정비되면서 더 이상은 고구마를 심을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고구마를 못 먹게 되나 했는데 어머니는 서울 사람이 사놓은 땅이라고 알려진 산비탈을 일궈 다시 작은 고구마 밭을 마련했다. 어머니에게 고구마밭은 없어서는 안 되는 살림으로 보였다.


고구마1.JPG ▲ 어머니가 일군 산기슭의 고구마밭.


이처럼 척박한 산등성이 돌밭에서도 잘 자라는 고구마는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고구마의 원산지는 중남미로 알려져 있다. 유럽 국가들의 중남미 침략으로 많은 식량들과 함께 고구마가 유럽으로 전래되었고, 이것이 다시 중국과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고구마의 어원 역시 일본의 대마도에서 부르던 ‘고귀위마(高貴爲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농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퍼져 나가거나 특별한 계기로 한반도에 전해진 것이 아니고, 관료나 학자들에 의해 아주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고구마에 처음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18세기 실학자 ‘이광려’(1720~1783)다. 중국 서적인 ‘농정전서’ 등을 통해 고구마에 대해 알게 된 이광려는 백성들의 기근을 해결할 수 있는 구황작물(救荒作物)이 바로 고구마라 생각하게 된다. 고구마의 보급을 주장하는 글을 쓰기도 했는데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수확량이 많으며 흙을 가리지 않으니 우리나라에 들여올 수 있다면 풍흉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을 먹일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에게 종자 고구마를 구해달라 청하기도 했지만 귀국 과정에서 썩어버려 실패하고 만다.


이광려가 고구마 도입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지만 실제 고구마를 들여온 사람은 조선통신사 정사로 1763년에 일본 대마도를 방문했던 ‘조엄’(1719~1777)이다. 그가 1764년 쓴 ‘해사일기’에는 고구마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 섬에는 먹을 수 있는 뿌리가 있는데 감저, 또는 효자마라고 한다. 일본어로는 고귀위마라고 하는데 참마나 오이, 토란과 같다. 날로 먹을 수도 있고 찌거나 구울 수도 있고, 밥과 섞어지어도 되니 구황작물로 좋겠다'라고 쓰고 있다. 조엄은 1763년 대마도의 종자 고구마를 1차로 부산진으로 보내고, 1764년에 다시 고구마와 재배 자료를 부산진으로 가지고와 동래부사인 ’ 강필리‘(1713~1767)에게 전달했다.


고구마 도입과 재배에 세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이 이 동래부사 강필리다. 강필리는 고구마 재배에 성공하여 동래 인근의 군현과 제주도에 보급하였으며, 이후 고구마 종자를 한양으로 가져와 재배하며 실질적인 보급에 기여한 사람이다. 또한 고구마에 대한 자료를 모아 재배법을 담은 책인 ‘감저보’(甘藷譜)를 저술했다. 강필리는 이 책을 통해 ‘고구마는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많고 맛이 달며, 흉년에도 쌀을 대신할 수 있다’고 하고 있으며 재배 및 저장법도 상세히 적고 있다.


이런 선구적은 노력에 부응한다면, 고구마는 빠르게 보급되어 백성들의 기근을 퇴치하는 구황(救荒)의 역할을 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마가 부산진에 도착한 지 30년이 흐른 1794년, 호남위의사 서영보(1759~1816)가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다. ‘고구마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백성들이 앞다투어 심었으나 영읍(營邑)의 가렴주구와 한리(悍吏)가 고함을 치며 빼앗아갑니다. 관에서는 백 포기를 요구하고 관리들은 한 이랑을 거두어가니 고구마를 재배한 사람이 곤란하게 되어 백성들이 고구마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임금이었던 ‘정조’는 고구마 수탈을 금지하고 고구마로 인한 부채를 탕감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고구마2.JPG ▲ 땅을 가리지 않고 잘 자라는 고구마.


이런 고구마의 역사가 현대까지 이어진 지역이 바로 제주도다. 제주도에 고구마가 전해진 것은 1795년 제주목사 ‘윤시동’이 부임하면서부터로 알려져 있다. 땅이 척박한 제주도에서도 잘 자랐기 때문에 제주도 사람들의 주요한 식량이 되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고구마가 많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다. 일제는 제주도에 주정공장을 세워 전분과 주정을 생산했기 때문에 이 원료인 고구마 재배를 확대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제주도의 주요 작물이 고구마일 정도로 고구마가 많이 재배됐지만, 이후 고구마 전분으로 만드는 당면과 주정의 원료가 값이 싼 수입산으로 대체되면서 제주도 고구마 생산량은 급격히 감소했다. 이후 제주도 주요 소득작물은 고구마에서 귤로 바뀌게 된다.


고구마의 역사에서 ‘함평 고구마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함평은 해남과 함께 전남의 주요 고구마 생산지였다. 1976년, 농협은 함평의 7,000여 고구마 재배 농가에게 고구마 60kg 한 포당 1,317원에 전량 수매하겠다고 약속했다. 농민들은 농협에서 나눠준 고구마 포대에 고구마를 담아 농협이 실어가기 좋도록 길가에 내놓았다. 하지만 농협이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며 고구마를 실어가지 않았다, 날이 추워지자 고구마는 썩기 시작했고 농민들은 피눈물을 머금고 포대당 200원씩에 일반 상인들에게 고구마를 넘기는 사태도 발생했다. 농민들은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즉각적인 피해보상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곤봉과 군홧발 세례였다. 하지만 농민들은 질기게 투쟁을 이어갔다. 1978년 4월 24일, 농민들은 광주 북동 천주교회에서 대규모 농민대회를 개최하고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각계각층의 지지가 이어졌고 학생들의 항의시위도 진행됐다. 천주교 사제단이 동조 단식에 돌입하면서 여론이 출렁이자 유신정권도 어쩔 수 없었는지 보상안을 제시했다. 눈물겨운 농민들의 고난이 만든 작은 승리였다. 이후 감사원의 조사로 밝혀진 농협의 비리는 상상을 초월했다. 농협이 고구마를 구매하는 주정회사와 짜고 구매대금 80억 원을 횡령한 것이다. 전국적 비리 사건으로 관련자만 600여 명이 넘어 단군 이래 최대의 비리사건이라 불렸다.


2020년 가을, 우리나라에 고구마가 처음 재배된 후 250여 년 만에, 시배지인 부산시 영도구에 ‘고구마 역사박물관’이 개관했다. 2021년 우리나라에서는 497,756톤의 고구마가 생산되었고, 여전히 해남 고구마와 여주 고구마가 지명도가 높지만 최대 생산지는 강원도이고 경상북도, 충청남도 순이다. 길거리의 군고구마 장수는 사라졌지만, 환하게 불 밝힌 편의점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맥반석 구이통에서 속 노란 고구마가 익었다. 고구마밭을 지켜 삶을 지탱해온 사람들을 기억해본다.






< 도시농부들의 고구마 키우기>


- 척박한 자투리땅을 이용하기 좋은 작물이다. 옥상에서는 자루에 흙을 담아 심어도 잘 자란다.

- 줄기와 잎은 볶거나 국으로도 먹을 수 있고 김치도 담 글 수 있다. 다양하게 활용해보자.

- 추위에 약해 얼면 섞어버리게 되니 보관에 유의해야 한다. 적정 보관 온도는 12도~15도이다.


고구마3.jpg ▲ 도시텃밭에 심은 고구마는 줄기와 잎, 열매까지 버릴 것 없이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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