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목공 에세이 ⑥ 오리나무 (Alder)
목공을 배우게 된 계기를 똑 부러지게 설명할 순 없다. 그저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쓸모 있는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뭔가 대견한 일을 하는 것 같았다. 거기다 이런 기술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먹고사는 일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객관적 근거보다는 주관적 희망이 작용한 결과다. 지극히 주관적인 희망이 무럭무럭 자라면 빈 지갑도 열리고 없던 시간도 만들어진다.
뚝딱이 목공교실에서 무려 6개월의 과정을 수료했다. 반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3개월은 초급반이다. 첫날 모니터 받침대를 시작으로 좌식 책상, 수납장 같은걸 만들면서 기초적인 공구와 기계사용법을 익힌다. 또 3개월의 중급반에서는 협탁 같은 좀 더 복잡한 가구를 만들어 본다. 여기에 사용되는 공구는 보다 전문적이고 숙련도를 요구하는 것들이다. 고급반은 없다. 중급반을 마치면 이제는 동호회에 가입해 스스로 생각하고 설계해 원하는 것을 만든다. 이 6개월의 목공교실을 모두 수료할 즈음이 되면 반백년 이상 잠들어 있던 ‘제작 본능’이 샘솟는다.
이때부터 통장 잔고보다 많은 양의 나무를 사들이거나 심지어 집에서는 놓고 사용할 수 없는 테이블쏘나 샌딩기 같은, 이른바 ‘장비’를 소장하는 어마 어마한 일을 서슴지 않고 벌인다. 집안의 책꽂이, 테이블, 의자, 전자레인지 수납장, 도마 같은 것을 원목으로 만들어 바꾸고 나서야 심신의 안정이 되찾아지지만, 뭘 더 만들까 하는 궁리는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다시 찾아온 질풍노도의 시기를 건너면서 꼭 만들어보고 싶었던 무언가가 불쑥 떠올랐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카세트 플레이어를 선물 받았다. 지금은 없어진 금성사의 제품이었는데 딱 은색 양은 도시락처럼 생겼었다. 피아노 건반 같은 버튼을 누르면 입이 척 벌어져 카세트테이프를 넣을 수 있고,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철판 뒤로는 작은 스피커가 매립되어 있는 물건이었다. 스피커로도, 이어폰으로도 오직 모노(mono)로만 소리가 나는 진짜 어학전용이었다. 스마트폰으로 대부분의 미디어를 접하는 요즘과 비교하면 참으로 구닥다리 같은 얘기지만 무려 'MBC 청룡'이 창단하고 프로야구 리그가 처음 시작된 그 해의 일이다.
하루는 이걸 자랑해보려고 국방색 학생가방에 넣어 학교에 가져갔는데 결국은 꺼내지 못했었다. 우리 반 어떤 녀석이 일제 소니 워크맨을 떡허니 허리춤에 차고 있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가지고 싶은걸 다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 어학기로 무던히 많은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걸로 영어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도 특급 기밀사항이다. 이렇게 팝송을 듣는 한 무리에 끼게 되었는데 어떤 기기를 가지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구는 없었다. 우리는 오직 세계 3대 기타리스트 중 누가 제일인지 핏대를 세워가며 싸웠고,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같은 금지곡을 모은 불법테이프를 복사해 듣고 또 들을 뿐이었다.
TV가 얹혀 있는 거실장을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목공을 시작하면서부터 가진 목표였다. 어릴 적 이층 양옥 살던 친구 집에서 본 하이파이 오디오장 같은 건 아니지만 셋톱박스며 인터넷 공유기, 블루레이 플레이어, 리시버, 스피커에다가 아들의 게임기까지 어지럽게 널려있는 기기들은 잘 정리할 수 있는 이른바 ‘미디어 콘솔’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목재는 ‘엘더(Alder)’로 선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리나무’라고 부르는데 작업하기 좋고 가벼운 편이어서 소프트우드의 성격을 가진 하드우드라고 말하기도 하는 나무다. 이름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길목 길목 이정표로 삼기 위해 ’ 오리(五里)‘마다 심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습지에서 자라기 때문에 주변에 항상 ‘오리’가 꽥꽥 뛰놀아서 오리나무라는 설이다. 조금 생각해 보며 아니라는 걸 금세 알 수 있지만 조상님들이 남겨주신 이야기라니 재미있게 듣고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조상님들은 이 오리나무로 결혼식 때 백년가약의 징표로 삼는 ‘나무 기러기’를 만들고 ‘하회탈’도 만들었다. 아직도 하회탈은 꼭 오리나무로만 만든다니 여러 가지 귀한 쓰임새가 있었던 나무임은 틀림없다.
목공에서는 '오리나무'보다 '엘더'라고 보통 부른다. 유통되는 것은 주로 북미산이다. 자작나무과인 이 나무는 심재(나무의 중심부), 변재(나무의 바깥쪽)의 색 차이가 별로 없어 집성목으로 가공해도 무늬가 수려해서 가구 제작에 많이 쓰인다. 나는 집성목 원판 두장으로 TV장, 3단 서랍장, 화분받침을 만들었다. 여러 가지 기기들을 놓아야 하니 단순한 것이 좋다 생각되어 이 부분을 실현하느라 여러모로 애를 썼다. 모서리는 45도로 잘라 연귀 맞춤을 했고 서랍장은 푸시 레일을 사용해 손잡이가 없는 단순한 모양으로 했다. 작업 전에는 아주 밝은 색이지만 오일 마감을 하니 색과 결이 진하게 드러난다. 이후에는 색상 변화가 거의 없는 편이어서 거실 가구로 적합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거실에 들여놓고 여러 기기들을 연결해 놓고는 또 옛날 양은 도시락같이 생긴 카세트 플레이어 생각이다. 세상에는 더 좋은 원목을 쓰고 솜씨 발휘한 비싼 가구와 하이엔드 오디오도 많겠지만 내가 실현한 이 '거창한' 미디어 콘솔과 바꾸지 않을 작정이다.